월간 사람

[특집] 우리시대 비폭력 운동은 무엇인가

미니에게

미니에게


미니 씨, 안녕하세요. 팔레스타인 평화연대에서 일 하고 있는 미니 씨의 활동에 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지면을 통해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미니 씨도 아시듯, 지난 5월부터 거리를 밝힌 촛불을 두고 많은 사회적 논의가 촉발되었습니다. 그런 논의 중 하나가 저항의 방식으로서의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마 이처럼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의 방식으로서의 폭력/비폭력에 대한 논쟁을 벌인 것은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이전까지의 폭력에 대한 논쟁이라면 소수의 운동 지도부들이 정세 등을 고려해서 은밀하게 내린 ‘지침’과 보수언론들의 ‘폭력집회’ 여론몰이 정도가 전부였기에 이러한 대중적인 토론은 사실 평화운동을 하는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많은 이들이 비폭력을 외치는 모습, 온라인 공간에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경우의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모습은 저에게 큰 충격과 감동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지금의 비폭력 논쟁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해 주십니다. 조중동의 판옵티콘에 갇힌 비폭력의 외침이라는 분석에 저도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이래서 달라지겠냐?’며 분풀이로 행해지는 폭력으로 거리의 입장이 극단화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촛불과 함께 등장했던 폭력/비폭력 논쟁이 분명 이후 사회운동에서 큰 의미를 가질 것이며 평화운동가들이 이 부분을 더욱 면밀하게 분석하고 확장시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촛불집회의 모습을 관찰하며 그 모습이 흔히 이야기하는 비폭력 직접행동과 많은 부분 유사하다고 분석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불법과 합법의 테두리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연행에도 당당한 분위기, 빠르게 결판나는 힘과 힘의 충돌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질기게 버티는 비폭력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사람들의 외침은 그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던 부분은 비폭력과 무저항을 동일시하면서 비폭력에 대해서 터부시하던 지배적인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즉 저항의 방식으로서 비폭력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효과적임을 거리에서 증명하면서 생소한 용어였던 비폭력 직접행동을 사회운동에 있어서 유력한 선택항으로 만든 것이지요.


물론 비폭력 직접행동은 사실상 여러 직접행동의 하나이며 언제나 성공하는 만병통치의 무엇도 아닙니다. 또한 어떤 방식의 우위는 그 자체에서 온다기보다는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촛불과 함께 등장했던 비폭력적인 가치가 지금 한국사회에 내재되어있는 여러 모순들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며 우리 안에 있는 군사주의적인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2008년 거리의 촛불을 분석하면서 그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왜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쳤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비폭력이 등장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가장 크게 이 운동을 흔히 이야기하는 운동권이 시작하거나 주도하지 않아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운동권 안에서 암묵적으로 깔려있는 저항폭력에 대한 긍정이 시민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사실상 운동권 내부에서도 폭력에 대한 논의나 논쟁이 부재한 상태에서 자신의 폭력은 무조건 정당하다고 하는 독선적인 논리가 지배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당연히 논의되었어야 했던 폭력의 문제가 운동권이 밀려나고 나서야 비로소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논의의 주체였던 ‘일반시민’들이 내세운 비폭력 논리는 사실상 지배적인 매체들을 통해서 각인되어온 폭력/불법 집회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비폭력을 통해서 자신들은 여론의 뭇매를 맞아온 기존 운동권들과는 다르다는 ‘순수한 시민’으로서의 구별 짓기의 욕구도 있었지요. 그럼에도 저는 이 부분이 오히려 과정 전체를 놓고 보면 현명한 전략이었으며 자연스레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으로 쟁점이 확대되는 것을 보면서 조중동 판옵티콘에서 시작한 비폭력이 결국 그 판옵티콘에 저항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고 봅니다.


전체 매체시장의 70% 이상을 보수언론이 장악하고 있고, 그 언론으로 인해서 약간의 폭력도 침소봉대되어서 전체를 매장시킬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황에서 비폭력은 전략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밤새 도로에 앉아 “연행하라”를 외치면서도 경찰에게 물병을 던지는 시민에게 “이러면 지는 겁니다.”라며 말리는 모습은 진정 이기기 위해서 비폭력을 택했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그렇게 외친 비폭력 역시 보수언론들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본 시민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프레임의 한계를 깨닫게 되면서 언론개혁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촛불로 인해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여론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현명함은 기존의 운동권이 놓친 ‘민간인’성의 우위를 이용하는 모습과 무의미한 힘 대결을 피하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사실상 엄청난 폭력수단으로 무장한 국가 특히 한국과 같은 근대화된 국가를 상대로 한 저항에 있어서 폭력수단의 실효성에 대한 저의 생각은 좀 회의적입니다. 미니 씨가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전경버스를 끌어낸 것에 대해 시민들의 1미터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저 역시 동의합니다. 저는 전경버스를 끌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우리 고유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끌어내어 몇 미터의 전진은 가능하겠지만 거리의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청와대 진출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거리의 촛불들은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틀에서 처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인 열세를 보다 많은 힘으로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프레임 자체를 바꿔버렸습니다. 즉 비무장 민간인과 무장한 국가권력의 대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저항했던 것입니다. 그리스(윤활유) 바른 명박산성 앞에서 스티로폼을 쌓아 토론했고, 물대포 앞에서 스크럼을 짜서 버텼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민간인성을 강조하는 비폭력을 미디어 앞에서 희생자를 재현하는 스펙터클의 정치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저는 유럽과 같은 소수 활동가들의 직접행동과 연행 그리고 법정투쟁이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촛불의 비폭력에는 이러한 비판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YMCA의 ‘눕자’행동 같은 것이 그러한 민간인성을 극대화한 저항의 한 유형이라 할 것입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외부의 폭력뿐만 아니라 내적인 폭력에도 매우 민감합니다. 수단과 목적의 일치를 추구하며 그렇기에 때로는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촛불집회가 우리 사회운동에 준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내부의 폭력에 대한 민감성을 높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운동권 사이에서 자연스레 깔려있었던 저항폭력에 대한 합의가 깨지면서 이제 운동권들도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운동권 사투리가 아닌 보통의 말로 설명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행위를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조직된 집단이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이 등장하는 순간 이미 시민들 사이의 역할은 갈립니다. 선봉에서 길을 여는 영웅들과 그를 응원하는 나머지. 그 순간 더 이상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과 재치 있는 피켓을 들고 있는 청소년들은 부차적인 존재가 되며 앞선 이들이 길을 여는가에 그 저항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러한 분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인 의료지원과 자전거 동호회의 행진 상황 정보에 박수를 보냈지만 예비군 집단의 임의적인 통제는 반발했습니다.


물론 촛불집회에서도 “여자는 뒤로 나와”라는 외침은 존재했습니다. 물리적인 힘의 대결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힘의 크기이며 그러한 공간에서 여성은 부차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때문입니다. “장애인 뒤로 나오세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장애인은 애초에 공간에 진입조차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전 그렇다고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조화롭게 경찰방패를 밀어내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방패를 밀어내는 것은 ‘정상 남성’을 가정한 저항의 방식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촛불의 거리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차이를 존중받으며 할 수 있는 많은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집회대오의 한 명이 아니라 스스로가 저항의 주체라고 생각했으며 그랬기에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앞선 이야기들은 그 어느 집회에서보다 가장 많은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앞서 살핀 비폭력 직접행동으로서의 촛불이 가지는 많은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무엇을 폭력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합의는 부재한 상태입니다. 저는 폭력에 대해 선험적인 합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물을 파괴하는 것이 폭력인지 아닌지에 대한 부분은 직접행동의 오랜 경험을 가진 주체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의 대상입니다. 1999년도 시애틀 투쟁에서 제3세계 착취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스타벅스와 나이키 매장의 유리창을 깬 것을 두고 시위대는 비폭력 저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장 우리에게는 미니 씨의 글처럼 전경차를 부수는 것은 폭력인가 하는 구체적인 논쟁 지점도 있습니다.


저는 폭력을 논의함에 있어서, 특히 저항의 수단으로써 폭력/비폭력을 사고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는 그런 것을 ‘맥락적 평화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평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와 폭력의 맥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고민에서입니다. 그렇게 폭력의 맥락을 살피는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가 ‘정당하게 독점하고 있는’ 폭력의 잔혹함과 일방성을 인지할 수 있으며 그것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그러한 폭력에 닮아갔던 것을 반성하고 폭력적인 문화에 대한 민감성을 체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민감성이 바탕이 된 비폭력 직접행동이야말로 진정 폭력에 반대하며 대안적인 저항을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의 비폭력 담론과 직접행동의 고민은 이제 시작입니다. 척박한 토양에서 뒤늦게 시작했던 평화운동이 어떤 운동보다 빠르게 성장했던 것처럼 비폭력 담론 역시 촛불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빠르게 확산되고 논쟁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전 누구보다 평화운동가들이 책임 있는 주체로서 이 논쟁에 참여하고 발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니 씨와 나누는 이 글이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