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모욕당한 자들의 사회

문학작품에서의 모욕과 사회적 성찰

언어폭력과 예술


한 맹인 텔레마케터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한 사람은 흥분한 목소리로 주문한 고기가 상했다고 윽박지른다. “당신 유대인이냐”라고 빈정거리는가 하면, 그가 장님인 것을 알아차리고 “도대체 바다가 무슨 색인지 아느냐”라고 도발한다. 심지어는 “장님인 주제에 여자랑 섹스는 해 봤냐, 이 겁쟁이야”라고 극한 언어폭력까지 가한다. 그런데 전화한 사람은 실제로는 고기를 주문조차 하지 않았다.


영화 ‘세븐 파운즈’(감독 가브리엘 무치노)의 첫 장면은 ‘공격성과 연민’을 의도적으로 중첩시켰다. 주인공 팀 토마스(윌 스미스 분)는 순간의 실수로 7명의 목숨을 잃게 한다. 그 후 번민에 빠져 지내다 자신이 선정한 7명의 사람에게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팀은 무자비하게 맹인 텔레마케터 에즈라 터너(우디 해럴슨 분)를 몰아붙임으로써 극의 긴장을 높였다. 격한 모욕은 듣는 사람에게 삶의 의지를 꺾어버릴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팀은 화가 나면 욕을 하라고 에즈라를 부추기지만 에즈라는 침착하게 응대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에즈라의 곤란해하는 표정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언어폭력을 감당하는 에즈라의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적 연민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렇다면 불운한 삶을 살고 있던 에즈라가 이러한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그는 텔레마케터라는 직업 이외에 피아니스트로서 예술적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삶을 정화하고, 삶의 시련을 극복하는 내적 힘을 획득한다. 에즈라의 예술정신은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빛을 발한다. 안구를 기증받은 그가 훌륭한 피아노 연주로 팀의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인간은 언어폭력만으로도 삶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살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규정한다면, 더구나 그것이 공공연하게 공표된다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강자가 약자를 향해 휘두르는 체제적 폭력일 때, 그 굴욕감은 더욱 치명적이다. 이러한 모욕적 공격은 문학 속에서 ‘정화의 효과’를 발휘하며 표현된 예가 많다.



문득, 타인을 느낄 때


은희경의 단편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창비, 2007)는 ‘비만인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관해 이야기한다. 소설 속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서른다섯 살의 미혼 남성이고, 체중이 100kg에 육박한다. 어머니는 유부남인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나’를 낳은 뒤 홀로 길렀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 되거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만 나타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사 줄 뿐이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성장했다. 그런 ‘내’가 서른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다이어트를 선언한다. ‘내’가 선택한 다이어트는 탄수화물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방을 분해하는 식이요법이었다.


그렇다면 비만인 ‘내’가 감당했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흔히 사람들은 뚱뚱한 사람은 계단 등을 오르기 힘들어하고, 건강에 쉽게 위협받으며, 심지어는 식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불편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비만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라고 말한다. ‘나’도 “남의 눈에 띄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훨씬 더 불편하다”고 말한다. 덧붙여 이런 상황도 나온다.



내가 패스트푸드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뚱뚱한 사람이 나타나는 즉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맥도날드 소송을 떠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이 무얼 먹는지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다가 특히 어린애가 많기 때문이다. 어린애들은 솔직해서 눈에 띄는 점이 있으면 그것을 빤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천진함에 대한 아이들의 권리만 인정할 뿐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는 교육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쌜러드만 먹고 있으면 부모들은 아이에게 속삭일 것이다. 뚱뚱해서 저렇게 조금만 먹어야 하는 거야. 저렇게 적게 먹는데도 뚱뚱하다니, 저 아저씨 불쌍하지. 그렇다고 감자튀김에 더블 싸이즈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있다고 해서 몸집에 걸맞다고 자연스럽게 보아넘기는 것도 아니다. 저런 식으로 먹으니까 뚱뚱해지지, 라는 눈빛을 서로 교환하며 웃음을 참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기 일쑤였다. 뚱뚱한 사람은 몸집이 커서 눈에 잘 띄는 게 아니다. 뭔가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에 시선이 멈춰지는 것이다.(99쪽)



집요한 시선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시선에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이 어우러져 있는 경우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당사자는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내’가 겪는 고통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인다는 데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에 담겨있는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이 ‘나’를 괴롭힌다. 비만인 사람은 너무도 쉽게 ‘절제를 모르는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규정된다. 다이어트 중인 ‘나’도 어떤 식으로든 죄인으로 취급된다. 샐러드만 먹어도 과거의 무절제로 인한 업보를 감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햄버거를 먹으면 탐욕을 버리지 못한 악덕을 지닌 자로 지목된다. 어떤 방식으로도 이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간주한 것 속에는 ‘공격적 편견’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사회적 공통감각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비만인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감수성 예민하면서 조금 뚱뚱한 사람은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더구나 체질적으로 비대한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적 체중보다 더 나간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회적 평균이 요구하는 것에서 의도적으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평균이라는 것은 없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회를 구성할 뿐이다. 그 다양한 사람 중에 항상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나도 누군가에게 폭력적인 시선을 던지는 평균적 인물이 되고 만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나오는 ‘나’는 결국 험난한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다이어트 과정에서 ‘나는 누군인가’라는 정체성에 혼란을 경험한다. 몸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오히려 몸을 학대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급작스러운 폭식을 하게 된다. ‘사회적 시선이 요구하는 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나’가 될 것인가. 그 선택은 오로지 ‘나’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사회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성의 평균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 쉽다.



구조적 폭력, 그 치명적 모욕


시선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만이 문제일까?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공공연한 구조적 폭력이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경쟁만이 삶의 원리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낙오자에게 가해지는 배제의 폭력은 ‘치명적 모욕’을 동반한다. 비정규직에게는 계약 만료로, 정리해고자에게는 ‘문자 통보’로, 그 폭력은 갑작스럽게 도래한다. 그러면서 한 인간이 온 몸으로 버텨왔던 자신의 가치를 폭력적으로 짓밟아 버린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소멸될 때 가장 치명적인 모욕감을 느낀다.


김숨의 단편 「박의 책상」(『침대』, 문학과지성사, 2007)은 슬픈 소설이다. 이 소설은 1980년대식 철제 책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책상을 12년 동안 이용했던 인사부 ‘박영기 계장’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어느 월요일, 사무실에 있던 그의 책상이 아무 통보 없이 갑자기 탕비실로 옮겨진다. 그는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박영기 계장의 태도가 기이하다. 박계장은 여전히 탕비실 속에 있는 철제책상으로 출근해 “철제 책상을 지키고 앉아 연필을 깎거나 신문을 읽거나 녹 자국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근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박계장의 이 무언의 저항은 어떤 숙연한 느낌을 자아낸다. 박계장의 상관은 “결정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것쯤은 자네도 이해하고 있겠지”라고 말하고, 관리부 직원들은 “자신들도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내보일 뿐이다. 그렇게 철제책상은 20여 일 동안은 탕비실에, 25일 동안 복도 구석에 놓여있게 된다. 박계장도 20일과 25일 동안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근무 시간에는 가능한 한 철제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박영기 계장은 폐기처분 되어가는 철제책상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했다. 그는 어떤 투쟁의 의지를 갖고 회사측과 대항한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인간적 배려도 없이 용도 폐기하는 무자비한 조직체계의 폭력에 무언의 항변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모욕이었다. 처음에는 밀폐된 탕비실에 철제책상을 옮겼다. 그가 계속 출근을 하자 모든 회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복도에 철제책상을 놓아둔다. 여러 앞에서 공공연하게 노출되도록 해 명예를 훼손하면 그 사람이 겪는 모욕감은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탕비실에서 복도로 철제책상을 옮김으로써 조직은 박영기 계장에게 극한 모욕감을 주었다. 소설의 결말에서 박영기 계장은 철제 책상이 ‘관계자외출입금지 구역인 보일러실’로 옮겨지자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 최소한 더 이상의 모욕은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모욕은 직접적이다. 이 직접성 때문에 모욕을 가하는 사람과 모욕을 당하는 사람 모두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직체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모욕은 실체가 없는 듯이 가장하기에 훨씬 가혹하다. 박영기 계장은 이 익명의 모욕에 대항해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유지하려 했다. 그 의지가 철제책상에 투영되었던 것이다. 조직 혹은 체제의 폭력은 익명을 가장한 채 가해지기에 책임소재를 모호하게 한다. 모두의 책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이 조직의 생리이다. 이 모호한 무책임성은 인간에게 더욱 치명적 상처를 안긴다. 진정 무서운 것은 조직이나 체제가 인간에게 강제하는 모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모욕을 가장 힘겹게 감당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노동자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사이의 시는 검토할 만하다. 김사이는 구로동과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한 시를 발표한 시인이다. 그는 1971년 해남에서 태어나 호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했다. 시인 김사이가 최근 『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2008)을 발표했다. 그의 시를 보면 노동문학이 이후의 노동문학이 연상된다. 시의 배경이 구로공단이고, 시적 화자도 여성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그는 노동현장의 구석에서 노동자의 현실을 자신의 일상언어로 그려냈다. 「가리봉동엘레지」「카타콤베」「달의 여자들」 「몸말」「곰팡이꽃」 「나방」과 시는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이 휩쓸고 간, 그래서 노동현장마저도 쇠잔해가는 구로공단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한 때 시인은 “내가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나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이후 “내 생이 허기진다”라는 갈증을 느낀다.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산실이었던 구로공단은 이제 세상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다. 자본주의 밖은 없다고 이야기되는 지금,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매혹 당했고, 변화하지 않는 노동현실 속에서는 자본에 의해 모욕당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544만 5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노동조건은 악화되었다. 심지어는 노동할 의지가 있음에도 사회 시스템에서 배제된 이들인 실업자 및 취업준비자 등이 346만 명에 이르고 있다. 통계로는 구체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구체적 일상이다. 대중매체도 재현해내지 못하는 것이 삶의 속살이다.


김사이 시인은 “재개발도 안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가리봉동 등지에서 “아직도 뱉어내지 못한 징그러운 삶”의 편린 들을 시속에서 확인한다. 가리봉동에는 “십년 전 벌집은 그 자리에 있”지만, 그 벌집을 채우는 이들은 “쿠르드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 몽골 연변 구로”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시인으로서 스산한 풍경으로 변모해가는 구로공단을 거닐며 ‘약소자(minority)의 생활’을 노래한다. 그는 시속에서 지금도 부당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의 현실을 그리다가도,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자본의 꿀맛”에 젖어 자본주의적 일상을 영위하는 것에 대해 반성하는 시어를 날린다.



막차를 타려고 뛰어가는데
지하도 큼직한 기둥들 사이로
웅크린 돌덩어리들
아니, 인기척을 내는
소름 확 끼치는 거대한 짐승들 있다
순간 가슴 벌렁벌렁거리게 하는 이 고요
카타콤베



내 웃음의 이면이다
노동자도 수입하는
갖출 것 다 갖춘 불빛의 地下
지하의 지하
지하도 없는 지하



살아 있음을
한 끼니로 간청하다가
절망도 없이
잠을 청하는 이곳을 지날 때
순례자의 마음으로 하라
뼈다구만 남은 이상주의자들도 죄를 고백하며
걸어야 하는 카타콤베



내 등줄기에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혹처럼 자란다
나는 구역질한다


- 「카타콤베」 전문




시인은 막차 시간이 급해 지하도를 뛰다가 노숙자를 발견했다. 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몸을 웅크리며 “거대한 짐승”처럼 지하도를 점유하고 있다. 도시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이를 외면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치부를 갑작스럽게 발견한 듯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려 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곳에서 오히려 삶의 진실을 발견한다. “내 웃음의 이면”, 즉 모든 이들의 일상의 이면에는 “지하의 지하/지하도 없는 지하”가 있다. 그곳에서는 노숙자가 죄인이 아니라, 모두가 죄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순례자의 마음”이 되어 지하도를 건너야 한다고 말하고, “뼈다구만 남은 이상주의자들도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모욕당한 자들의 사회


시인은 ‘노숙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지하도’를 ‘카타쿰베(Catacombe)’라고 말한다. 카타쿰베는 안식처라고 일컬어지는 지하묘지를 지칭한다. 카타쿰베에는 로마시대 탄압받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시인은 자본주의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웅크리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모욕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들은 구조적 희생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구조의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해 ‘개별적 패배자’로 규정된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한국 사회는 성찰의 기회를 갖는다. 이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약자에게 폭력적이며, 배제된 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그들은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구역질”을 해댄다. 김사이 시인은 체제의 가혹한 폭력으로 인해 모욕감을 느끼고 한국사회 시스템에 대해 심한 거역반응을 일으키며 구역질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모욕을 심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농담이나 무례, 건방진 표현 등으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 모욕당했다고 말한다. 이는 수치심이나 분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심리적 충격만을 모욕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체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은 더 심한 모욕이 아닐까? 체제와 시스템에 의해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이야말로 치명적인 모욕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유일체제가 되어가고 적자생존이라는 무자비한 삶의 원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훼손된 삶을 살고 있다.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나의 생존이 보장된다면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은 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회적 통념’과 ‘사회체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개별적이기에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고, 다양한 가치를 지향할 수 있기에 오히려 윤리적일 수 있다. 그런데도 사회가 규정하는 틀에 자신의 가치를 맞추려 하면 모두들 체제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숙명처럼 보이는 현실도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싹트면 ‘한시적 현실’이 된다.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의 근원을 성찰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모욕 없는 자존(自尊)의 사회’로 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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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은 | 문학평론가,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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