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기억 투쟁과 기억의 정치

한국사회의 과거청산

오늘은 4·19다. 1980, 90년대 초반, 서울의 청년학생들은 일제히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4·19마라톤, 4·19기념제를 개최했다. 4·19기념탑은 그것이 발생했던 서울 대학로, 도심을 벗어나, 4·19와 무관한 수유리에 있다. 4·19철이 오면 수유동 한산한 동네에 경찰차가 빼곡히 들어서고, 검은 복장의 경찰이 가득 찼다. 4·19기념탑 현관이 닫혀 학생들은 골목이나 거리에서 기념집회를 해야 했고,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은 방패와 곤봉으로 무장한 채 최루탄을 쏘아댔다. 그 동네 사람들에게 4·19는 최루탄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민간정부가 들어서고, 1997년 그곳이 ‘국립화’하면서 최루탄은 사라졌다. 청년학생들의 발걸음도 뜨음해졌다. 나도 그날을 피하여 3월쯤에 일찌감치 그곳을 방문한다. 오히려 그날 그곳은 검은 세단차, 검은 양복을 입은 정치인들이 도열하고 있다. 소위 대학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그곳은 민주화와 연결되지만, 많은 일반 대학생들에게는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다는 사실은커녕 4·19마저도 기억되지 않는다.


작년은 제주에서 4·3사건이 발생한 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기념행사에 참여했다가 놀랍지만 놀랍지도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 초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 고등학생들 상당수가 제주4·3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2000년, 5·18 항쟁 20년 맞이를 했던 빛고을에서도 들었던 얘기였다. 지역 교사나 지식인들은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가르친 게 없으니, 배운 게 없어서….”라고 회한에 젖는다.


대학가마저 4·3, 4·19, 5·18철이 되어도 특별한 기념행사가 없다. 4·3 관련 보상법이 만들어지고 4·19,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국가의 기념일이 되면서 사회적 기억에서부터 멀어져갔다. 오랫동안 현대사 교육이 미약한 형편에 4·3사건이나 4·19민주항쟁, 5·18민주항쟁 등은 정규시험에 나오지 않으니 그런 사건을 기억하는 청년, 청소년들의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조차 5·18을 영화 <화려한 휴가>로 알게 되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뉴라이트 측에서는 몇 년 전부터 ‘대안역사교과서’를 만들면서 별러왔던 학교 역사교과서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금성출판사 등의 고등학교용 『근·현대사』 교과서가 공공의 적이었고, 2008년 내내 ‘좌빨’ 교재로 악선전 당했다. 그 덕분에 학부형까지 자녀가 대학진학이나 취업이 어려워질까봐 학교 당국에 압력을 가하고, 학교 당국에서도 부당한 차별을 우려하여 교재 채택을 철회했다.


2008년 순식간에 현대사의 기억들이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일요스페셜> <인물현대사> <그것이 알고 싶다> 등 현대사의 비극을 다루었던 프로그램에서 그런 주제들이 사라지거나 프로그램 자체가 사라졌다.


2008년 연말 국회에서는 14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을 통폐합하려는 법안이 나왔다. 한마디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측에서는 통폐합을 밀어붙이기 위해 수차례 토론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과거사 관련 위원회나 관계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그 법에 무조건 색깔론을 들이대는 구태를 연출하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과거청산은 이루어졌는가?



냉전시대 기억의 정치학


독일은 잊을 만하면 2차대전 당시의 전범 사실을 상기시킨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전쟁 희생자 위령탑을 방문하여 ‘무릎 꿇기’(Kniefall in Warschau)를 한 이래로 최근 영화, <더 리더(The Reader)>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범 사실을 반성하는 담론들이 나오고 있다.


독일에서는 청년이 군대를 가면 초병 시절 2차대전 당시의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나치 히틀러의 전범 사실을 기억하며 ‘평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들은 인류를 향해 벌인 선조의 가해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국민이나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군대가 더 이상 파시스트 군대가 아니며 평화의 군대임 선언하고 있다. 그들은 기억의 정치학을 통하여 평화와 번영, 통일의 독일을 재구성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정반대이다. 그들은 1945년 원자탄과 평화헌법에 의해 자신들은 피해자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앞장서고 있는 일본 우익들은 메이지 일본 왕을 섬기는 야스쿠니(精國)신사 참배 운동을 전개하며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회고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 ‘천황’의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에 의해 서양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동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켰다고 태평양전쟁을 정당시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일본군위안부’를 ‘창녀’로 부르고 조선인의 강제징용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히노마루(일본기)를 흔들고 기미가요를 부르며 “조선인은 물러가라.” “한국여성은 다 창녀다.” “조선을 일본이 해방시키지 않았으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따위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주도하는 지식인이나 시민들은 기존의 역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한다. 그러니 일반 국민이나 청소년들은 ‘자학’을 그만두고 자긍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류열풍이 혐한류 열풍으로 급진전된 배경에는 이런 위장된 사이비 역사 전쟁, 기억 투쟁이 작동하고 있다. 자위대 체제 하에서 세계 군사비 2위의 나라가 ‘피해의식’을 주장하면서 ‘자학’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의 새 대통령이 일본 수상을 만나는 자리마다, “과거는 이제 그만!”을 외쳐왔다. 그런 한일관계사의 계기는 1965년 한일수교를 준비하는 자리에서 한국 측 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 씨가 일본 오히라 외상에게 “독도가 문제되면 파괴시켜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하겠다.”는 발언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과연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와 함께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했었던가? 일제에 의한 강제징용 노무자들의 규모나 대일 청구금액 규모도 조사하지 않았던 무능력하고 나태했던 정부가 과연 과거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시도라도 했던가? 심지어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일본의 정보기관에 얽혀 납치를 당했을 때, 진상규명하기 위한 어떤 노력을 했던가?


한편 1960년 4·19가 나고 1961년 초 한국전쟁 당시의 피학살자유족회가 결성되었다. 가족이 미군과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으나 희생자의 유족들은 그 신원을 회복시키기는커녕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빨갱이 낙인만 찍혀 벙어리 냉가슴을 앓던 유족들이, 민주화가 되었으니 방치된 시체를 찾고 억울한 신원을 회복해달라고 나섰다. 1961년 5·16쿠데타로 일어선 군부정부는 그들을 ‘반국가사범’으로 판결하여 주모자에게 ‘사형’언도까지 하였다. 그렇게 냉전시대 국가는 수 십 년간, 수 백 만 명이 얽혀 있는 기억의 문을 잠가 버렸다.


1990년 과거 일본군성노예였던 김학순 씨가 “내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양심고백을 하기까지 정부는 침묵했다. 또한 1999년 전직 미군 사병이 한국전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대량 사살했다.”는 양심고백을 하기까지 정부는 침묵했다. 유족들이나 피해자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기억들이 잊히는 듯 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하면서도 한국 정부 자신은 국가폭력의 기억을 지우고 있었다. 국가가 실현하는 기억의 정치학에 도전하는 어떤 기억도 불온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는 냉전의 기억을 되새겨야 했다. 심지어 식민의 기억 역시 냉전에 의해 재구성되어야 했다. 그런 사이 희생자 ‘개인’의 기억은 ‘유족 집단’의 기억으로 되고, 침묵을 강요당한 ‘국민 집단’의 기억으로 자리잡아갔다.



탈냉전과 국가폭력, 그리고 기억의 연대운동


1990년대 탈냉전은 기억의 정치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 넣었다.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해제된 문서에서 구소련 당시 국가의 악행이 폭로되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동독 국가에 의한 악행 역시 폭로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출범하면서 백인정부 시절 악행의 진실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중남미에서 이라크와 중동, 동아시아 등에서 식민 시절이나 독재 시절 자행된 대량민간인학살이나 성폭력, 국가테러 사건들이 조명되었다.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의한 582만 960명의 희생자와 1990년대 세르비아에 의한 학살과 성폭력 사건 역시 국가폭력에 의한 제노사이드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또한 1945년 오키나와에서의 미군과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과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의 민간인학살사건 역시 국가폭력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폭력이야말로 전 인류적 범죄라는 보편적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2000년대 전후하여 동북아시아에서는 기억의 연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97년 대만에서 1947년에 장졔스 국민당 정부에 의해 발생한 2·28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학술회의를 계기로 동아시아평화인권 학술대회가 2003년까지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 등을 순회하며 개최되었다. 학술대회는 회를 거듭함에 따라 식민주의와 전후 제국주의의 연속선에서 제노사이드의 의한 패권적 연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각 국가 시민사회는 기억의 공감을 넘어 기억의 연대를 추구하며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한 의지를 분출하였다.


또한 2000년 12월의 동경에서는 남북,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미국, 독일의 여성들과 관계자,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을 개최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통한 기억의 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 사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2002년 설립된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기억의 정치학을 위한 전범을 창조했다. 즉 진실규명을 기초로 한 사과와 용서야 말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이 화해에 이르는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지난 냉전시대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은 구성원을 가해와 피해의 장벽 안에 가뒀다. 분단과 전쟁에 의한 피학살자 유족들은 긴 세월 동안 이중, 삼중 피해의 감옥 안에서 갇혀 공포와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오히려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 주고, 가족의 시체라도 찾아달라는 애절한 주장은 거대한 범죄라도 된 듯,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제6조 ‘특수반국가행위’에 저촉을 당하는 사건까지 빚게 되었다. 노근리 사건만 해도 1990년대 초반에 그 유족들이 소청(訴請)을 넣었으나 무시당했다. 1999년, 노근리 학살에 가담했던 한 주한미군의 양심선언과 미국 클린턴대통령의 사과가 있기 전까지 한국 정부는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1990년대 사회적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차츰 그동안 억눌러졌던 목소리들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노근리 학살이나 금정굴 학살사건, 거창민간인 학살사건이나 함평민간인 학살사건은 수많은 학살사건 가운데 하나이고, 남한의 100만 명의 대량학살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60년 가까이 억압되었던 것은 개인에게는 엄청난 외상 후 스트레스성 증후군이자 한이 되지만, 사회적으로도 거대한 암세포를 안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100만여 명의 피학살자의 원혼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사회적 삶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관계의 해체와 위기의식, 사회적 불화와 잠재된 갈등의 소지가 잠복되어 있었다. 그나마 제주도에서는 4·3사건 피학살자의 진혼을 위하여 마을 굿 형태로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 유족들은 피해의 진실을 얘기도 못한 채 억울함을 삭혀야만 했다.


2000년대 국가에 의한 전시폭력 문제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시민사회가 움직이고 국제연대조직도 생겼다. 우선 국내에서는 피학살자 유족들이 중심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꾸린 유족회를 근간으로 하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이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남한, 북한, 일본, 미국시민사회가 연대하여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 특별조사위원회(미국 워싱턴 본부)’가 조직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한울, 2005)에는 최소한 669건의 학살사건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피학살자 규모로 보아 100명 이하 사건이 430건, 100~500명 규모 사건 170건, 500~1,000명 규모 사건 40건, 1천여 명 이상 사건 30건으로, 이 보고서에 실린 피학살자 수만 해도 25만에서 30만 남짓으로 파악된다. 유족들의 노력과 희생에 의해 마침내 2005년 5월 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안’(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그해 12월 2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조사를 통하여 피학살 문제를 접근하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겠느냐고 묻는 유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민주정권이 끝나고 구 권력층이 복권한다면, 자신들은 다시 연좌제에 의한 죄인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등과 같은 의혹에 찬 눈길을 보냈다. 2000년대 중반까지 10년가량 한반도에 불어온 화해의 볕은 한바탕 봄날의 백일몽이었던가.



다시 아래로부터의 기억 투쟁


1980년대까지 이 땅의 고난 받는 민중들은 침묵 속에서도 잊기 않기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 돈 내고 시간 내어 잊지 않기 위한 투쟁을 했다. 기억 투쟁을 시작한 곳은 광주의 5월항쟁 관련 단체들과 제주 4·3항쟁 관련단체 및 일제 강점기 정신대문제 관련 단체들이었다. 더욱 힘든 일은 한국 반공이데올로기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한국전쟁 전후 시기 희생 사건 조사 문제였다.


이 단체들은 각종 1차 자료 및 신문 등과 같은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생존자들에 대한 구술 작업을 벌여 나갔다. 그들에게는 세련된 조사기법도, 넉넉한 조사비용도, 조사한 자료를 보관하고 연구할 공간도 없었다. 국가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어렵게 조사한 자료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일이었다. 심지어 조사나 결과물의 출간 자체도 구속을 각오한 일이었다.


그들의 아래로부터의 기억 투쟁은 미네르바의 부엉이 같은 연구자들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연구자들이 조사에 합류하며 기억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성과가 2000년대 국가 수준의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출범과 연결되었다.


과거사 관련 위원회 가운데 가장 큰 진통을 겪고 있는 위원회 중 하나는 진화위이다. 진화위의 경우 피해 유족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가해의 원천은 지난 반공과 독재 국가권력이며 지배집단이다. ‘수사권’이나 ‘구인권(拘引權)’도 없는 위원회가 구 국가권력에 맞서 피해의 기억에 접근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절반의 실패를 예정해두었다.


2008년 현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기억의 정치를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급기야 2009년,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전 인류적 범죄라고 언급하면서도 정작 이 땅의 국가에 의한 인권문제를 다루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예산 문제로 접근하여 그 기능을 축소하고 성격마저 바꾸려 하고 있다. 작년 말 국회에서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을 통폐합하려는 시도는 올해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지도자라면 과거사는 미래를 발목 잡는 장애물이 아니라 과거사야 말로 미래로의 길을 열어나가는 열쇠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빌리 브란트가 있기에 독일은 전범 국가였으나 세계인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일본의 수상, 정치인들로 인해 일본은 세계인들의 존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한 현실로부터 한국 정부나 정치인들이 국민이나 세계인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성찰해야 한다.


잠시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고 하여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침묵 속에서도 인류의 보편적 진실을 찾아나가기 위한 기억 투쟁은 계속되고, 기억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결합하여 보편적 기억으로 나아가고 있다. 식민과 냉전시대, 국가폭력이 가한 모든 범죄의 기억으로부터 이 땅의 구성원들이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진정한 화해가 필요하다. 진정한 화해에 도달하는 길은 진실규명과 과거사 청산이며, 그 힘은 기억의 정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