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과거와 대면하는 법

한국사회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기억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과거를 현재화하는 정신적 현상으로, 개개인의 고유한 체험과 연관된 것으로, 주관적이며 사적인 조각들을 기억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과거를 구성하는 역사(학)의 위기 이후 ‘기억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국내에도 개인의 기억, 구술, 사적인 기록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역사쓰기가 모색 중이다.


역사와 대조되는 기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구의 근대성과 문명의 본원적 위기감이란 배경 아래에서였다. 기존 역사가 중요하게 여기던 민족, 국가, 계급 등 집단적 주체의 의미가 약화되는 대신, 편향적, 분산적, 우연적인 과거와 개인들의 기억들이 시민권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 ‘기억’이다. 다시 말해서 집단적 과거가 더 이상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을 때, 대신 역사라는 공적 공간에서 ‘억압’되어 왔던 사적 요소인 기억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2009년 용산의 기억과 망각


하지만 기억은 개인의 즉자적 체험을 반영하기보다,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다. 단적인 예로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을 동일한 시공간에서 겪은 사람의 경우에도, 개인의 사회적 위치, 인간관계 및 가치관, 의식 등 변화에 따라 전혀 다른 당대 역사에 대한 기억을 지닐 수 있으며, 이는 당연한 일이다.


2009년 2월, 용산 참사는 한국사회 소수자들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담론화되는지 알려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마치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직전 서울시가 “광주 오면 직장이 생긴다”는 말로 이들을 이주시킨 것처럼, 뉴타운이나 명품도시 논리들은 재개발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또 다른 환상이었다. 그러나 2월 9일 ‘철거민 유죄, 경찰 무죄’라는 검찰 수사결과 발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사건은 정치권력, 법 그리고 공권력이 지역개발을 위한 자본의 이익에 얼마나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지 보여준 사례일 뿐이었다. 용역과 경찰은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철거민들은 가해자일 뿐이었다.


이처럼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과 철거민들은 단지 ‘진압의 대상’이자 정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조차 없는 ‘시민권을 박탈당한 자’들이었다. 이는 일상적으로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용역들은 철거민들을 내쫓기 위해 일상적인 욕설, 오물 투척, 자녀에 대한 협박, 건물에 쓰레기 투척, 스프레이 낙서, 전봇대 방뇨, 영업 방해 등을 일삼았다. 무법천지이자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용역에 대한 ‘공포’로 이주해야만 했다. 또 다른 한편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이것저것 보기 싫고 용역들에게 너무 시달려서 망루로 올라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런 용역과 경찰들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지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또한 망루로 무작정 특공대를 투입한 진압 과정을 보면, 경찰이 철거민들을 인권을 가진 시민이 아닌, 몰아내어야 할 짐승으로 여기고, 그리고 짐승 잡듯이 골짜기로 이들을 몰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망루에 불이 나서 소화를 경찰에게 요구하자 이들은, “불은 소방관이 끄는 것”이라며, 뻔뻔스럽게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헬기가 뜨고 망루 기둥에 매달린 사람을 향해 ‘떨어지라고’ 물대포를 쏘던 광경은 흡사 서울 한복판의 ‘월남전’ 같았다는 기억하는 이도 존재한다.


더불어 철거민들은 생존권이 아니라, ‘돈을 바라는 집단’으로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실정에 맞는 임대주택’과 ‘재개발 전 거주 가능한 가수용 단지’ 등을 요구했을 뿐이다. 하지만 언론과 국가는 ‘돈에 환장한 전문적 데모꾼’이자 ‘테러리스트’ 등으로 이들을 의미화시켰다. 왜 철거민들이 철탑 위로 올라갔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누가 화염병을 던졌고, 망루를 설치하기 위해 연습을 했다”는 식의 ‘조직된 범죄 논리’만이 공식적 기억으로 강요되고 있다. 하지만 구속된 대부분 철거민들은 이번 사건이 초범인 보통 사람들이며, ‘테러’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대부분 10~15년 사이 장기거주자인 이들은 말은 도심 한복판에 살았다지만, “옆 집 강아지가 새끼를 몇 마리 낳은 것”을 알 정도로 시골사람 같은 정서를 가졌다.


더 큰 문제는 ‘침묵하는 대중’과 ‘대중들의 망각’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와 달리 대중들은 분노의 감정을 상실하거나 쉽게 용산의 죽음들을 잊어갔다. 재개발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로 여겨졌다. 그 안에서 철거민들의 기억은 억압되었다. 백주대낮에 20대 용역남성과 70대 철거민 할아버지가 싸워도 ‘왜?’라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고, 구타당한 노인에게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는 상황, 오직 철거민들 자신 이외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 2월 용산참사였다.


이처럼 소수자들에 대한 기억은 늘 ‘망각’과 동반해서 나타났다. 하지만 망각은 기억의 반대말이나 기억의 극복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망각은 기억을 가능하게 해주는 본질적인 계기이다. 기억은 ‘망각’을 통해 체험자의 본원적 체험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흔히 고통스러운 체험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추방 혹은 억압되지만 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흔(trauma)으로 남아서 고통을 가한다. 용산참사 이후 하루 1~2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혹시 잠이 들어도 ‘떨어지는 꿈’을 꾸는 철거민의 상흔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왜 사망했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아버지는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고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 채 ‘잊혀질까봐 그 현실을 두려워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낼까?


한국사회는 용산참사 희생자들과 철거민들을 두 번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과거 광주대단지 주민처럼 용산 철거민들을 범죄자와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그들의 죽음을 자살로 몰아간 한국인들이 저지른 범죄이고, 또 하나의 범죄는 그 후 이들에 대한 기억을 철저히 억압하고 다시 사회가 대면하게 만드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어쩌면 ‘망각을 강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이란 곤봉, 물대포, 군대나 총뿐만이 아니다. 며칠 동안 굶어서 배고파 우는 어린 아이를 아사하게 방치하는 것도 더욱 큰 범죄이다. 우리가 이들의 기억을 방치한 것도 역시 2009년 오늘, 범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과거극복과 기억 그리고 현재화


민간정부 이후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 각종 반인권적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 명예회복 그리고 보상 작업이 진행되어 온 바 있다. 국가폭력의 당사자인 국가 기구에 의한 진상 규명의 한계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적이지만, 수 십 년 간 묻혀온 개인의 기억을 ‘공적인 담론’으로 불러들인 점은 분명한 성과이다. 하지만 작년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과거사를 둘러싼 각종 위원회들은 ‘존폐 위기’에 놓여있다. 이들 기구를 ‘한시적’으로 만든 민간정권의 안이함에서 문제가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더 이상 국론을 분열시키는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난이나 방만한 조직 운영 및 예산 낭비 등 이유를 들어 이들 기구를 통폐합시키려는 시도가 집요하게 진행 중인 것이다.


하지만 보수정권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전면적 축소, 폐지 방침과 별개로 그간 진행해온 ‘과거사 청산’에 대한 평가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보수 세력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탄압 자체가 과거사 청산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사 청산은 인적, 정신적, 물질적 그리고 진실 규명 차원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그간 억압받아온 피해자의 기억(혹은 증언)이 주된 매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과거 청산 시 언급되는 기억은 정치슬로건처럼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 너무 쉽게 ‘기억 투쟁’으로 통칭되거나 이슈가 과잉 정치화되어 과거사 청산의 원래적 의미가 왜곡된 경우도 존재했다.


이러한 과거청산과 기억을 둘러싼 논란은 민간정부 시기 기념일, 기념식, 각종 기념물 등을 둘러싸고도 나타났다. 앞서 기억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념’은 집단적인 기억이 발현되는 장으로서 통합보다 ‘배제’를 지향한다. 즉 특정 기념(물)은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배타적 행위이다. 바로 특정 과거를 공유함으로써 정치-사회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는 결국 다른 개인과 집단은 그 기념과 기억으로부터 배제-주변화시키는 것이다. 과거 국가주의적 기념물이 지배적이었다면 민간정부 시기에는 민주화운동, 국가폭력 희생자를 추념하는 기념(물)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억은 과거를 다시 신비화하려는 보수주의 진영에 의해서도 전취되곤 했다. 독일에서도 이를 둘러싼 좌파와 우파 간에 대립이 존재했었다. 특히 이 양자 간 쟁점은 ‘타자’였다. 타자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폐쇄적인 자기 정체성을 재고한다는 의미였고, 이는 같은 기억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차이나는 대목이었다.


이처럼 현재 좌우간 과잉 정치화된 과거사 청산에서 특히 강조해야 할 부분은 과거 청산과 기억의 현재화에서 기억이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경계다. 앞서 본대로 기억은 복잡하며 망각과 결부된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과거사에 대한 복수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위험하다. 이는 기억이 ‘탈정치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기억 속에 내재된 권력 요소를 이해하는 것과 기억을 권력의 수단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과거청산’ 개념 역시 한계를 지닌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의문사, 억울한 죽음 그리고 국가폭력 등 과거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거청산은 긍정적이며 분명한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진실과 거짓 등 과거청산이 공유하는 개념들은 이분법적이거나 단순하며, 이로 인해 과거와 대면하는 올바른 원칙을 수립하는데 저해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억압된 기억을 불러온다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을 위해 특정한 집단이 다른 기억들을 억압하여 최종적으로 진실을 독점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과거는 특정한 세력에 의해 단숨에 청산되는 것이 아닌, 여러 집단 기억 간의 교통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되새겨져야 할 성찰의 대상이다. 더불어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시대와 사회가 변했다고 해도 과거는 결코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희생자 혹은 과거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본인과 주변인들에게 과거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맥락에서 독일에서는 ‘과거극복’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과거극복은 청산보다 좀 더 포괄적이며 반성적인 의미이다. 독일에서 ‘극복’이란 나치시기와 이 시기가 가져온 재앙과 고통에 대한 전후 독일인들의 대면(對面)을 뜻한다. 바로 부단하게 과거와 대면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계기로 과거사를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과거를 극복한다’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보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인식은 ‘복수극의 연속’을 낳을 뿐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미래에는 과거와 같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발생하지 않을지 혹은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과거 극복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 극복은 과거의 과오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과거 한국사회의 개인적-집단적 범죄를 시민사회 개별 구성원이 같이 짊어져야 할 부담으로 받아들이는 ‘비판적 대중의 형성’이 아닐까 싶다.


이제 과거를 현재로 불러옴에 있어서, 기억은 특히 소수자들에게 있어서 고립된 그들만의 ‘무기’가 아닌 함께 과거를 정면으로 대면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재현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80년 광주가 어떻게 박제화된 기억이자 기념으로 왜곡되고 정형화되어 왔는지 목격해 왔다. 이 점에서 나는 이제 역사가들-그리고 대중들-이 추구해야 할 바는 ‘실제 어떠했는가?’라기 보다, ‘그것이 어떻게 기억되었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소수자의 기억을 공감해 나가는 첫 발걸음이 아닐까 싶다.



타자의 고통을 나누기: 애도와 공감


그렇다면 앞으로도 일어날 소수자와 타자의 기억과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독일에서는 ‘애도’(mourning)란 개념을 사용한다. 애도는 사전적 의미로 타자의 상흔을 지속적으로 슬퍼하는 행위를 말한다. 독일에서 애도 개념은 결코 청산되기 어려운 나치와 전쟁 과거사에서, 희생자가 잊혀서는 안 되지만, 그들이 정치적으로 미화되어서도 곤란하다는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두는 동시에, 과거에 대한 관심과 연민의 감정을 지니는 것, 바로 그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다.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은 정신의 계승이라기보다, 상실의 아픔을 유지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더불어 애도 개념에는 과거에 대한 겸손함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과거 원형적 체험을 객관화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유지함으로써 하나의 공동체가 스스로 과거와 진실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온전한 의미의 과거극복에서 우선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며, 다음으로 이에 근거한 적정한 처벌과 희생자 보원 및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과거를 현재화-공개함으로써 과거는 극복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공동체 내 죄과와 희생을 지속적으로 과학적, 예술적 매체를 통해 내면화하고, 스스로 과거와 대면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점에서 타자의 고통과 아픔을 자기화하는 ‘공감’(empathy)은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이 역시 주의할 점이 존재한다. 공감이 자칫 잘못하면 대상에 대한 나르시즘적 동일화나 도덕적 위선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가장한 고통은 오히려 희생자에 대한 기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분명한 것은 결코 희생자들의 고통을 우리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우리가 재현하는 그들에 관한 기억이 결코 최종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바로 대변할 수 없는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진지한 고뇌야말로 성찰적이며 반성적 기억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과연 ‘애도’와 ‘과거극복’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공감의 정서를 통해 한국사회는 희생자와 관련자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고통과 공포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고뇌할 줄 모르는 사회에서 기억의 제대로 된 재현을 기대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 점에서 다음 말은 한국에도 해당될 것이다,


“독일인에게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는 문제에서 최종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 주체의 부단한 의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