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

벌써 또 두 달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저는 여전히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용산참사가 발생한 지도 지난 6월 20일로 다섯 달이 지났고, 제가 용산참사로 희생되신 철거민 열사들의 주검이 누어있는 이곳 병원 장례식장에 발이 묶인 지도 벌써 넉 달입니다. 그 많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지만 그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박종태 노동열사가 돌아가시더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무사히 장례를 치렀는데 우리는 아직 용산 철거민 열사들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 이게 제가 매일 마주 대하는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2년 만에 처음으로 동생의 추모제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글 하나 보내고 말았습니다. 지난 6월 초 마석 모란공원의 추모제가 끝나고 제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오셨는데 내내 눈물 머금고는 안타까이 바라보시는 통에 저도 울 뻔 했습니다. 언제일지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어도 다시 감옥에 가야 하는데, 학생운동 이래로 30년 가까이 고통이나 드렸는데도 그것도 모자라 다시 이 고통을 드려야 하는 자식이니… 참 몹쓸 놈이지요. 목발을 짚으시는 아버님도 한 번 보러 오시겠다고 성화인데 어떻게 뵈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이 일로 해서 누군가 고통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의연하게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아니시기에 더욱 괴롭습니다.


탈출의 꿈, 자유를 향한 열망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용산참사와 관련한 대책위원회의 책임을 맡다보니 그 탈출도 개인적인 의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속에서 4층에서 뛰어내리는 상상마저 들 던 때도 있었습니다. 용산에서 여섯 명(철거민 다섯 명, 경찰 한 명)의 생명이 죽어갔는데, 아무리 많은 일이 있다고 해도 이 문제에 왜 이처럼 무관심할까 원망의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용산참사 현장을 찾아와 주고, 마음을 모아서 돈도, 물품도 보내주는 덕에 버텨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정현 신부님으로부터 시작된 천주교 신부와 신도들의 정성, 기독교 목사님들을 비롯한 종교인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고, 계속되는 시국선언을 통해서도 용산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술인들은 용산참사 현장을 갖가지 예술작품들의 고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이 농성과 미사를 이어가는데, 참사 5개월을 전후해서 신부님들조차 경찰에 의해서 폭행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열사들의 영정이 깨지고, 유가족이 폭행당하고, 농성하는 대책위의 대표들이나 활동가들과 철거민들, 그리고 신부님들조차 온몸에 멍이 들도록 폭력을 당하면서 5개월을 넘어왔습니다. 사제단의 한 신부님이 그러셨다는군요. 우리는 일주일 있었는데도 하루하루가 이렇게 힘든데 유가족들은 5개월을 어떻게 버텼냐고 말이죠. 나날이 폭력에 노출된 용산 투쟁입니다. 그래서 용산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대의 단면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은 다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울었습니다. 노무현,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는 다른 서민적 풍모, 솔직담백한 모습,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안타까워 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가 한데 표출되었을 거고요.


그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직 대통령까지 죽게 만드는 권력의 횡포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되었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너나없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칫 노무현 대통령 때는 민주주의가 꽃피웠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노무현 시대의 민주주의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라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 민주주의를 가져본 적이 있을까요? 노무현 시대와 비교했을 때 민주주의가 후퇴한 측면이 있지만 그 본질에서 이명박 시대와 무엇이 다를까요? 결국 지금까지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해도 좋습니다)는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세우지 못한 사상누각의 민주주의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6월 항쟁은 곧이어 전개된 노동자대투쟁(사실 이런 용어부터가 차별적입니다)의 요구를 배제한, 즉 민중배제의 민주주의로 귀결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정부였다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 오히려 민중들은 더욱 더 생존의 위기 속에 놓이게 되었지 않은가요. 철거민들의 투쟁은 자본의 가장 극악한 약탈에 대한 저항운동이었고, 용산참사는 그 저항운동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가장 극악하게 진압한 사건입니다. 철거민 또는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나아가 정규직 노동자라고 해도 자본의 이익에 장애가 된다면, 언제든지 진압할 수 있다는 지배세력의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는 이런 국가의 폭력이나 그에 따른 죽음이 없었나요? 2005년 전용철, 홍덕표 농민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매 맞아 죽습니다. 2006년 건설노동자 하중근도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첫 해인 2003년 하반기에 이어졌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은 또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국가의 거대한 폭력에 의해서 농토를 빼앗기고 강제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대추리 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국민의 동의도 얻지 못하는 한미FTA 추진은 또 어떻습니까? 광장을 차벽으로 막아서 봉쇄하는 경찰의 버르장머리도 노무현 정권 시절에 등장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했던 일들입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평가는 일면적으로는 맞습니다. 탈권위주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발전, 자유주의적 인권의 확장과 같은 일들은 그나마 이명박과는 다른 노무현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검찰과 경찰이 권력의 철저한 하수인으로 전락한 상황, 국정원마저 민간인 사찰에 뛰어드는 상황은 분명 노무현 시절에는 없던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김대중 시절이나 노무현 시절이나 후퇴하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런 사회경제적 정책의 맥은 그대로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에 사회 양극화, 빈곤층의 확대는 심화되었습니다. 빈곤은 결국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사회권)의 박탈이고, 시민·정치적 권리(자유권)의 배제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되 경제적, 사회적인 자원의 배분에는 참여할 수 없는, 그들만의 민주주의였던 것이고, 그에 따라서 가장 고통 받았던 사람들은 민중들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률을 추진, 제정하지 않았습니까. 이명박은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이어받아 국가폭력이 일상화된 억압국가로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이명박과 김대중, 노무현은 이렇듯이 다르면서도 같은 민주주의를 하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회복할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야 하는 무엇입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하는 민주주의는 민중배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중주체의 민주주의, 한 번에 역전되고 후퇴할 수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굳건하게 세워지는 대의제를 넘은 직접민주주의여야 합니다.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민주주의를 향한 진군을 저는 꿈꿉니다.


용산참사는 민주주의의 참뜻을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사회적 약자 층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과 폭력 위에 세워지는 민주주의는 안 된다는 경고음을 발하는 것은 아닐까요? 검찰과 경찰과 같은 기관들이 권력의 사병노릇을 해서는 민주주의는 없다는 점을 실증하는 사건이 용산참사입니다. 검찰의 개혁을 말하면서 용산참사는 덮자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용산참사와 PD수첩 수사의 총책임자였던 초고속 출세주의자 천성관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공안=인권이라는 정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치관을 스스럼없이 내세우는 공안통입니다. 공안통 법무부장관과 짝을 이루는 검찰총장이 검찰을 내세워 얼마나 더 많은 패악을 저지를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용산투쟁은 다섯 분 철거민 열사들의 장례를 치른 뒤에도 계속되어야 할 장기투쟁입니다. 검찰이 감추고 내놓지 않는 수사기록 3천 쪽도 공개해야 하지만, 형사소송법의 미비점을 개정하여 다시는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수사기록을 감추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살인적인 재개발을 중단시키는 투쟁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용산은 어렵게 가지만 쉽게 접을 수 있는 투쟁은 아닐 것입니다.


이곳 장례식장에서의 수배 생활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이곳 생활을 차츰 정리해야 하는데, 요즘 다리에 힘 붙이는 운동을 꽤나 세게 합니다. 땅을 디뎌본 지가 너무 오래라서 밖에 나섰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지나 않을까 걱정해서입니다.


앞으로 언제 다시 <사람>에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독자 여러분들이 <사람>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은데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권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권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민주주의를 꿈꾸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용산 열사들을 모신 장례식장에서 편집인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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