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이주자에 대한 편견은 왜 ‘신화’인가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이주민, 이주노동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어간다. 그 사이 한국 정부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체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잠깐 쓰다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이주노동자들이 그들 맘처럼 ‘처리’되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어렵사리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 한국에서 가족 결합을 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이곳에서 결혼을 해 자녀를 낳아 키우기도 한다. 이 아이들은 부모의 신분이 불안정하거나 체류 자격이 없어 언제 가족 전체가 추방될지 모를 위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또 그 사이 결혼 이주자들도 10만 명이 넘게 늘었고, 소수지만 난민들도 한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들이 살아가기에 결코 쉬운 사회가 아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국적과 언어가 다른 이들은 매일 냉대와 차별 속에서 우리보다 더 큰 상처와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한국 정부와 달리 많은 한국 시민, 노동자들은 이주자들,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 일부 언론들은 이들 이주자들이 한국인들의 일자리, 복지 등을 축내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심심찮게 제기한다. 이런 주장을 접하면서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주자들의 인권과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우리 한국 ‘국민’의 이익이 먼저 아닌가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누구나 동등한 인간이라는 보편적 개념은 매우 추상적인 문구가 되어 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겠는가? 이주자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도, 임금을 떨어뜨리는 사람도, 우리 사회를 범죄와 테러의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들도 아니라면? 우리가 이런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면, 이주자들의 권리와 우리의 공존을 훨씬 힘주어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비바 촘스키의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비록 미국의 얘기지만, 신기하게도 오늘 날 이주자들에 대한 온갖 편견과 비난의 근거는 사실 어느 국가를 가든 다르지 않다. 모든 국가들이 똑같은 역사와 문화, 갈등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렇듯 이민자들에 대한 비난의 근거들이 보편적인 것들이라면 이민자를 둘러싼 온갖 주장들의 진정한 진실도 보편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민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과 신화’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민자들에 대한 온갖 주장들이 사실이 아닌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장점은 이 신화들을 미국의 역사·정치·경제적 측면 등에서 매우 폭넓게 사회 전반과 연결시켜 근거를 제시해 반박한다는 점이다. 즉 이주 문제는 단지 이주자들의 유입과 그에 따른 결과로서 발생한 문제라는 식의 협소한 접근으로 볼 수 없는 문제임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사회의 정치, 경제 시스템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임을 잘 보여준다.


또 이 책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미국의 법과 제도가 애초부터 얼마나 차별에 기초해 있는가, 그리고 법률에서 노골적인 인종 차별 조항들이 폐지됐다 할지라도 현재의 법률이 어떻게 그 차별들을 여전히 제도화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정부들이 목 놓아 외치는 그 ‘법과 질서’가 얼마나 중립적이지 않은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촘스키는 “법은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인디언 원주민에게 서로 다른 의미였다. 후자에게 있어서 ‘법’은 노예화, 배제, 정복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 책에서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미국 정부는 9·11테러 이후 자국의 안전을 위해 미국 전역의 공항, 국경, 항구 등에 10억 달러가 넘는 돈을 들여 외국인의 지문과 사진을 채취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고, 엄청난 돈을 들여 국경 수비를 날로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최초의 ‘국경수비대’의 기원은 정말 터무니없는 이유로 만들어졌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백인들에게만 시민권을 허용한 미국은 멕시코인들의 인종을 ‘백인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가 없어 국경을 개방했지만 이들을 완전한 백인으로 볼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서 1920년대에 국경경비대를 만들고 ‘불법 입국’을 범죄화하고 추방을 만들어 냈다. 결국 이주에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여진 역사는 불과 100년도 되지 않는다.


오늘 날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각국의 국경 수비와 국경 통제, 소위 ‘불법’ 이주자들에 대한 가혹하기 그지없는 야만적 추방은 어디를 가든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은 이렇게 황당하기 그지없고 노골적이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근본은 다르지 않다. 과거 그 근거가 인종에 기초했다면, 오늘은 그 근거가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로 바뀌었을 뿐이고, 특히 이민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노골적인 계급적 차별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의 이주 규제법인 출입국관리법도 50만 달러 이상을 공장, 부동산 등에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체류 기간과 상관없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달성할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해 사실상 영주권을 신청할 권리를 완전히 봉쇄했다. 그리고 지금 이명박 정부는 123억 원이라는 큰 예산을 들여 미국이 먼저 시행한 입국 시 외국인들의 지문과 사진을 채취하는 제도를 시행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정말 너무나 닮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