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조금 더 발칙해도 좋아

“학교 왜 그만뒀어요?”
“재미없어서요.”


이렇게 대답하면 주로 욕을 먹거나 잠시나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함께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뭐 어쩌겠나, 즐거울 권리도 권리인데.


청와대가 설치류에게 점거되고 나서야 느끼는 거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릴 적 대통령 두 명은 인권을 참 ‘띄우는’ 사람들이었다. 그이들이 얼마나 반인권적인 행위를 많이 했느냐, 국가가 인권을 홍보하는 게 말이 되느냐 등등의 말을 자주 하고 또 듣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국가, 인권, 위원회라는 어색한 세 단어의 조합에서 발행하는 (최근의 예산삭감으로 이제는 격월간이 된) 월간 『인권』을 읽으면서 인권이라는 말을 처음 만났다.


미술시간에 급식실에서 젓가락 서른 쌍을 훔쳐다가 단체로 라면을 끓여먹거나, 어느 날 갑자기 카자흐스탄 아이가 전학을 오는 꽤 당황스러운 중학교였는데, 학교 도서관 소파에 슬쩍 누워서 그 예쁜 잡지를 꽤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글도 말도 사진도 하나같이 알록달록하고 친절해서, 인권은 뭔가 당연하고도 좋은 것이지만 사람들이 자꾸 잊고 지내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잡지 속 이야기들을 내 삶 속으로 소환하기 시작했는데, 개중에는 색약이라서 이공계 진학을 포기했던 당시의 남자친구 이야기나, 여자로서 여자를 좋아했던 친구의 러브스토리도 있었다. 그렇게 『인권』은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는 걸 꽤 많이 도와줬는데, 동시에 출석번호 1번은 왜 항상 남자냐고 교감한테 따지다가 여자도 군대 가면 1번 시켜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울분에 싸여 ‘독자의 편지’를 써야했던 것처럼 조금은 피곤했던 순간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어찌되었건 『인권』이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행하는 잡지여서인지, 다른 매체들을 접하고 나서야 인권의 범주 속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들도 많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나 주민등록증 지문날인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개기는 것도 내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으니까.


어느덧 중학교 졸업반이 되어, 대한민국의 어느 학교를 가건 이 학교에서처럼은 살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1년 내내 듣다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고등학교를 아예 안 가기에는 용기가 달렸는데, 이왕 갈 바에야 해병대를 가자는 식의 지금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당시에는 있었다. 그 개념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겠다는 욕심 그리고 수학이 없어진 입학시험 덕분에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첫 한 해 동안 참 열심히도 달렸다. 뒤는 물론 현재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앞만 보고. S대만 가면 인생이 아름다워 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S대를 가겠다는 건 온전한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1학년이 반쯤 지났을 때 몹시 당연하게도 마음이 고장 났다. 낮엔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았고 밤엔 잠도 안 왔다. 그러다 몸까지 삐걱. 내과와 외과를 번갈아 전전하다 큰 병원에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듣고서 갔던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희귀난치병. 이건 뭐, 싸구려 3류 영화도 아니고……. 그제야 나는 S대 교문 안의 내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통조림에 담긴 지식들을 되새김질하고, ‘친구들’과 줄의 앞뒤를 두고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받는 느낌, ‘재미없다.’


그저 그런 영화나 소설들로 수업과 야자시간을 때우는 것도 슬슬 지쳐갈 무렵 청계광장에서 인권영화제가 열렸다. 부스 여러 개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인권영화제 티셔츠를 파는 곳 맞은편에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부스가 있었다. 밀짚모자를 쓴 눈 댕그란 언니에게 왜 한국에서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하냐고 물어봤다.


“저기 보이는 저 큰 건물 18층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어요. 한국정부랑 이스라엘의 무기거래 규모는 장난 아닌데, 그 와중에 한국 사람들이 하도 성지순례를 많이 다녀서 이스라엘 직항이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생긴 나라가 한국이에요. 누군가를 몰아내고 괴롭히고 죽이는 자들에 대한 분노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에 관계없겠지만, 뭐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고요.”


이제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쪽팔림과 더불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팔레스타인 뉴스 번역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당사자운동의 일환으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도 결합하고. 그제야 학교 안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이 결국은 인권의 맥락에서 얘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히 대한민국 최상위법이라고 할만한 ‘교칙’으로 교복 위에 겉옷을 절대 금지한다던지, 원래 머리가 갈색인 애들도 검정색으로 만들게 해준다던지, 아침 해도 안 뜬 시간에 눈을 뜨게 하는 일 등 말이다. 주위엔 학내투쟁이나 조직화를 위해 때려치웠던 학교에도 복학하는 경우까지 있었지만 내 내공은 너무나 부족해서, 매일 그런 반인권들을 마주하면서도 정면으로 맞서지 못함 혹은 않음에 힘들어하다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다. 그게 두 달 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찌되었건, 어디서 학교를 때려 칠 배짱이 나왔냐고 묻는다. 좀 오그라드는 표현이긴 하지만, 다 인권 덕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부모님이 당장 “인권이란 놈이 누구야? 튀어나와!”라고 하실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새벽같이 ‘단정한’ 복장으로 ‘선도’부원들을 마주하지 않을, 파마한 머리를 숨기지 않을, 원하는 옷을 입을, 무엇보다 비교나 줄 세우기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건 ‘쓸데없는 반항’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라는 걸 믿었기에 비록 본격 저항하지는 못했어도 ‘성공적으로 졸업’하면 보장된다던 수많은 것들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릴 수 있었다. 동시에 그런 유무형의 억압들이 학교 내부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내 시간과 생각, 행동이나 말의 자유가 가능한 직업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서 상임활동가 역할을 맡게 되었고.


물론 덕분에 부모님과의 마찰과 병원비에 대한 무한부담감도 덤으로 얻게 되긴 했지만, 결국 인권과의 만남이 사람으로서의 나를 찾아 나설 용기를 주었다. 길을 나서고 보니, 세상에는 매달려 싸울만한 사안들이 정말로 많은 것 같은데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하려 든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자신의 인권 유린이 될 것 같고, 개중에서도 팔레스타인처럼 우연 혹은 운명처럼 다가왔거나 청소년, 주거권, 의료권 등등 내가 두드러지게 당사자인 것들에 우선적으로 목소리와 힘을 써 보려 한다. 사람끼리 부대끼는 이런저런 공동체들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암튼 이 정도면 평생 살면서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앞으로 더욱 발칙한 본인의 활약을 널리 기대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