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아직은 어색한 이야기

나는 ‘홈리스행동’이란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고 있다. 먼저 홈리스란 외래어를 쓰는 이유를 밝혀야겠다. 홈리스라 하면 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연상하는 게 보편적인 것 같다. 그러나 노숙인의 법적 정의는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노숙인 쉼터에 입소한 18세 이상의 자”를 일컫는다. 그렇다보니 쪽방과 같은 불안정 주거나, 노숙과 쪽방을 오가는 이들, 만화방과 찜질방같은 비주택 거주민들은 대책에서 배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또한 정부의 ‘노숙인 대책’ 역시 시설 입소를 중심으로 편협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노숙, 주거 빈곤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사고하고 대책 역시 큰 틀에서 짜여야 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홈리스’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 용어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도 존재한다. 한 부류는 정책 비용의 부담을 느끼는 일부 관료들일 테고, 또 한 축은 외래어니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외래어를 대체할 우리말을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용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내 입장이다. 왜냐면, 우리사회는 과거 홈리스 문제를 겪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거지, 떨거지, 부랑자 등으로 불리는 거리생활자들은 있었지만 현재의 홈리스 문제는 그런 전통적인 빈곤 문제와 함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대표되는 사회체질 변화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몸으로 벌어먹던 이들이 산업체계 개편으로 퇴물 취급당하고, 그에 따라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되는 게 보편적으로 홈리스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로다. 물론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은 옳다. 거리노숙을 하고 있는 분들의 평균 학력은 중졸 이하인데, 그러다보니 상점의 간판에서부터 정책 용어까지 영어가 보편화된 현실에서 갑갑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컴퓨터를 배우려고 해도, 어느 건물 앞에서 만나자고 할 때도 참 그놈의 영어가 장벽이 될 때가 많다. 해서 ‘우리’의 말이니까 사랑하자는 주장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언어 장벽을 없애자는 의미에서 한글 사용에 동의한다. 그러나 홈리스 상태에 처한 이들이, 그것도 서울에서만 한 해 300명씩 죽어나가는 현실에서 ‘단어’ 논란으로 정책의 개선을 막는다면 그것은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권을 만났다고 하기엔 아직 이른


홈리스 조직운동을 하는 나는 주민센터라든지 구청, 토지주택공사를 찾아가거나 연락할 때가 많다. 기초생활보장수급 신청을 돕는다든지 임대주택 입주지원과 같은 활동에 동행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소속을 밝히는 일로 대화가 시작되는데 대개 홈리스행동이란 ‘인권’ 단체에서 활동한다고 한다. 그러면 부연설명 없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권은 누구에게나 동의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인권을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 질문해보면 ‘아니’라고 하기엔 좀 체면이 아니고 ‘아직’이라고 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마감을 훨씬 넘겨 제출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인권을 만난 것 같지 않은데 무엇으로 지면을 채운담? 바닥에 떨어진 홈리스 대중들의 인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인권옹호자와 인권 탄압자의 역할을 반복하고 있다. 홈리스 대중들을 만나면서 한숨 쉬고 같이 아파하기도 하지만 그들에 대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명의도용 피해를 입은 홈리스 분들을 만나 당시 사건 개요를 정리하고 고발장을 쓰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럴 때 얘기를 이어나가다보면 열불이 뻗친다. 그깟 여인숙 한 달 방세 내줬다고 인감, 등초본 다 내주고, 말도 안 되는 동업 꼬임에 넘어가 바지사장으로 수억 세금을 뒤집어쓰는 식이기 때문이다. 열통이 터져 성질을 부린다. 그렇게 씩씩 거리며 쓴 고발장을 갖고 경찰에 간다. 근데 경찰도 훈계를 늘어놓는 게 아닌가? 인생 그렇게 무책임하게 살면 되냐고, 당신은 공범인데 무슨 고발이냐고, 정말 몰랐느냐고, 피해자로 온 사람한테 추궁이다. 그럼 나는 또 당신이 노숙하는 사람들이 왜 명의도용을 당하는지 알기나 하냐고 어쩌고저쩌고 하며 당사자를 두둔한다. 뒤돌아서면 경찰이나 나나 그놈이 그놈이다. 뭐 대략 이런 식의 반복이다. 그러니 ‘인권을 만난 후’를 전제한 글은 뒤통수가 뜨거울 수밖에 없다.



인권은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


창피한 얘기지만 한 번도 인권 학습서라 할 만한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인권활동가들을 만나며 그들에게서 공통적인 활동 기풍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난 이것을 인권적 활동 기풍으로 이해하고 되도록 그렇게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맨 처음 느낌은 ‘인권은 대상화 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라 불러도 좋을까?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는 늘 옳은 방식, 좋은 방식을 잘 생각해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럴 때 인권적 가치는 아무리 좋은 의견일지라도 충분히 이해될 때까지 선택을 유보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개는 빠른 길 찾기에 익숙하다. 신속하고 일사분란한 일 처리가 효율적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 의사결정 단계마다 고유의 권한을 부여하고 이것은 곧 서열이 된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적응하다보니 이런 사고가 내면화된 것 같다.


여타 활동도 그럴 테지만 홈리스 대중 스스로 권리를 인식하고 주장하는 활동도 논의로부터 시작하나 대부분의 경우 논의는 최소화하고 빨리 결정사항을 만들고자 할 때가 많다. 그래서 회의를 하고 나서 에둘러 듣게 되는 이야기는 거의 “그 얘기가 그 얘기고만 뭘 그렇게 길게……”란 거다. 물론 회의가 어렵고 재미없게 진행된 문제도 있긴 하겠다. 어쨌든 충분히 소통하고 평등하게 대화하는 방식은 여전히 우리 활동에 있어 숙제다.


그러나 더 염려되는 것은 이런 방식이 사회 적응의 결과인 한편 홈리스 상태에 처하게 되면서 더 내면화되고 심화된다는 데 있다. 홈리스 상태에 처하게 되면서 사회복지의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위계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숙인 복지’라는 것이 잔여적이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다보니 끊임없이 홈리스 상태에 처한 이들을 대상화시키고 있다. 한 예로 서울시에서는 노숙인/ 쪽방/자활사업 참여자를 대상으로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서울시에서 ‘서울형 복지’로 홍보하는 사업 중 하나인데, 나는 이것이 대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올 해 사업 계획은 아직 미완이라 지켜볼 일이지만 작년의 경우, 인문학 교육 참여자들에게는 더 높은 급여의 일자리를 주고, 저축액을 두 배로 쳐서 주는 희망통장 가입 우선권을 주도록 하였다. 높은 급여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홈리스 상태에 처한 이들은 희망의 인문학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이 도구로, 미끼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당사자들이 이리저리 쏠려 다녀야 하는 현실, ‘노숙인 복지’에 있어 당사자들은 철저히 객체가 되는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글쎄다. 최소한 현재의 사회복지란 곳간은 서열의 삭막함을 만들지언정 인심의 훈기는 찾아보기 힘든 듯하다.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난 달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한 분을 면회하는 참에 함께 담당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의사는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족이든 직장이든 뭐든 지킬 게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환자의 입장으로 생각해봤다. 빈곤의 밑바닥에 처해 있는 그가 ‘지킬 것’은 뭘까?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도, 일을 구할만한 건강도 되지 않는다. 삶이 밑으로만 치닫다보니 어느 순간 탈수기에서 끄집어 낸 빨래처럼 쪼그라든 자신 밖에 남지 않았다. 분명 한 순간에 빼앗긴 것은, 한 순간에 없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젠 원래 내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어느 놈이 빼앗아갔는지도, 그에 대한 분노조차 끓어오르지 않는 상태, 참말로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상태다.


노숙에 대해 공격하는 언론들이 자주하는 이야기는 “노숙을 즐긴다”는 것이다. 아마도 언론사 기자에게 거리 생활을 하는 분은 “이게, 편해” “적응이 돼서 괜찮아” 식으로 얘기했을 것이다. 당사자들의 이런 설명은 주로 면식이 없는 이들에게 하는 일반적 표현이다. 그러나 친분관계가 형성된다면 이분들의 이야기는 “소설을 써도 몇 권을 쓸”만한 것으로 바뀐다. 노숙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탐문을 하는 이들에게, 그의 질문 의도가 단순한 궁금증에 지나지 않을 때 당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웅변할 만큼 에너지를 쓰기 어렵다. 이러저러한 시도 끝에 남은 것은 진드기 같은 무기력에 불과할 때, 그 무기력을 묻는 질문조차 괴로울 때 말은 우습게도 긍정으로 나온다. 비빌 언덕이 철저하게 없어진 상태, ‘노숙인 복지’는 바로 이 상황에서 절실하나 현재의 복지는 ‘시설’에 입소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지원책을 강화하면 오히려 거리 노숙인이 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식이다.


인권이라는 당연한 권리,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 스스로에게는 부정당하고 있는 권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인권이라는 당위가 아닌 손에 잡히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이 실체를 통해 ‘지킬 것’을 하나 둘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먹고 살만한 물적 재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해야만 할 인권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제공하고, 이 가치가 ‘지킬 것’이 되어야 한다.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성공 사례’를 참 좋아한다. ‘노숙자 출신 CEO’ 같은 케이스가 딱 그 짝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홈리스 문제의 반동적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성공하려면 밟고 올라서야 할 무수한 인간 탑이 필요하고, 그 탑의 밑바닥은 바로 홈리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약삭빠름은 정의롭지 못하다.



인권의 이름을 빌어 핑계를 궁리하는 이들에게


몇 달 전에 형들(함께 운동한다고 표현하기는 계면쩍고, 그럴 날을 기대하며 같이 열심히 놀고 있는 홈리스 당사자분들을 통칭하여)이랑 놀러갔다 오는 길에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생후 1개월이나 됐을까 싶은 놈이었다. 외모가 정말 훌륭했다(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노숙견 출신이란 뜻에서 노식이라 불린다). 지금도 우리 사무실에서 잘 크고 있는데, 특히 노숙을 하다 수급자가 되어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한 분은 끔찍이도 이 녀석을 아낀다. 아침 일찍 시장에 들러 동태 대가리를 잔뜩 얻어와서 삶아 먹이고, 올 겨울에만 벌써 자기 이불을 두 채나 이 녀석에게 헌납했다. 보름 전엔 전기장판까지 갖다 깔아 주었다. 나는 ‘재기’ ‘성공’ ‘자활’이라는 거품이 아닌, 노식이와 고시원에 사는 이 아저씨 사이를 돈독하게 했던 그 무엇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라고 믿는다. 노식이 맘을 잘 모르니 조금 일방적일 수는 있지만 나는 그것을 바닥을 쳐 본 이들의 연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서울시의 한 공무원이 앞장서서 ‘노숙인 명의도용 예방사업’을 추진하려 했던 적이 있다. 노숙인의 명의도용 문제가 심각한데 노숙인을 대출불가자로 등록하면 대출 사기가 안 되니 명의도용을 막을 수 있을 거란 것이었다. 물론 대출불가자로 등록되면 신용상 불이익이 있지만 명의도용을 당해 수 천, 수 억 원의 피해를 받는 것보단 낮지 않겠냐는 것이다. 요즘 회자되는 ‘빈곤 비즈니스(빈곤의 실상을 꿰뚫어 이윤을 창출하는)’의 극한을 달리는 명의도용의 작동원리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문제가 있더라도 네 처지에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않느냐란 것 아닌가. 만약 그 공무원에게 “당신도 같이 대출불가자로 등록 합시다”라고 했다면?


나는 인권이란 것은 여전한 과제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이만큼이면 족한’ 것은 시혜일망정 인권이 갈 길은 아니란 것이다. 시민들의 ‘인권’이란 명목으로 노숙생활자들의 ‘격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인권의 이름을 빌어 핑계를 궁리하는 이들에게, 그렇지만 역시도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소심하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네 속에 내 인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