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팔딱이는 서툰 물고기

인권이 내게로 왔다

#1. 요즘 나, 참 많이 서툴다. 바짝 긴장하고 간 인권교육에서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기 힘들고, 버벅거리는 목소리는 정돈이 안 된다. 반인권적 상황에 적절한 대응지점을 놓쳐 쩔쩔매기도 한다. 이럴 때면 ‘인권’을 원망해 본다. “왜 이제야 온 거야. 올 거면 좀 일찍 오지!”



#2. 요즘 나,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엄마는 이명박이야!”라는 항의를 들을 때가 있다(촛불집회에서 용산관련 영상을 보고난 뒤 이 아이에게 ‘이명박’은 악의 상징이 됐다!). 평소 인권 엄마라 자부하지만 시시때때로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존재하는 어른과 아이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어쩔 수 없이 봉착하는 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럴 때 오히려 기분이 좋다. ‘그래, 나는 너무 늦게 만났지만 아이들에게 좀 더 일찍 인권을 만나게 하면 되는 거야. 끊임없이 항의해라!’ 실컷 욕을 해댔다고 생각한 아들은 웃는 나를 보고 더 성을 낸다. “엄마, 이명박 물러나라!”



그래, 나는 이렇게 좌절도 느끼고 기쁨도 느끼는 혼란 속에 버티고있다. 지금의 이런 나의 서툰 혼돈과 펄떡임을 말하기 위해서는 인권교육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인권교육을 말하기 위해서는 인권교육을 만나기 이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교육을 알기 전에는 주로 ‘앉아서’ 일했다.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에서 5년이 넘게 일했는데, 인터넷 속에서 자료를 모으고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주로 내가 한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부천에서의 지역 활동에서도 내 역할은 주로 ‘웹’이었다. 민주노동당 부천 원미을 지구당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것을 시작으로, 선거운동, 시민강좌 등이 있을 때면 내 몫은 항상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었다. 제일 잘 하는 일이었으니 그랬던 것 같다.


인권교육을 만나다


그렇게 2~3년이 흐른 뒤 주로 하는 ‘실천’은 소통의 통로로 홈페이지를 가지고 싶어 하나 기술적 기반이 없는 단체의 일을 지원하는 것이 됐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조악하여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참 많은 홈페이지와 웹자보를 만들었다. 즐거웠지만, 한편으로 나를 계속 목마르게 하는 일이었다. 어떤 활동을 ‘웹’으로 지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모호한 것이어서 움직이고 있지만 움직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들게 했다. 자꾸만 인권이라는 것, 평화라는 것,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내 삶과는 동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성공회대학교에서 비정규직이었던 나는 우여곡절 끝에 사이버NGO자료관에서 인권평화센터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리고 2006년 그해 여름, 처음으로 인권교육을 만났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성공회대학교 인권평화센터 주최로 교사 인권교육을 열게 됐는데, 이때의 교육내용은 인권교육 활동가들의 인권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었다. 줄곧 명망가 중심의 인권교육 프로그램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참여자들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삶을 풀어 놓게 하는 인권교육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즈음 인권교육활동가들이 열었던 인권교육 강좌에 참여했던 것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인권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하는 탐색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 갔던 교육이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교육 참여 과정도 즐거웠지만 교육이 모두 끝난 며칠 뒤 이메일을 통해 받았던 ‘교육 후 자료집’ 은 너무나 신선한 감동이었다. 쪽지 한 장의 계획안이 교육 당시에 나누었던 여러 말들이 모여 수십 장의 자료로 확장된 것을 받아 보는 기쁨이란.


그 후로 인권평화센터의 인권교육을 진행하면서 교육 후 자료집을 만드는데 온 정성을 쏟아 부었다. 교육기간 내내 나오는 말들을 모두 타이핑하고, 자료들을 모아 사진을 찍고, 오고 간 이야기들을 모았다. 교육 후 며칠 동안은 자료집으로 만들어내는데 시간을 바쳤다. 녹화된 테이프를 돌려 보며 비어 있는 내용을 보완하고, 교육 결과물들을 모아 기록했다. 인권교육의 경험이 없었던 나로서는 인권교육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을 40여 명의 참가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내가 몸으로 겪은 것을 선사할 수 있길 바랐고, 어느 날 갑자기 우편으로 자료집을 받아 본 참가자들 역시 기뻐했다.
그렇게 서른 즈음에 만난 인권교육은 내 삶 전체를 헤엄치고 다녔다. 투명한 젤리처럼 굳어 변하지 않고 고여 있던 삶이 녹기 시작했다. 행복했지만, 한편으론 두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내 머리 속에 견고하게 뿌리내려 있는 편견을 해체하여 들여다보고 마주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청소년 인권을 만나다


인권에 대한 두 번째 전환점은 ‘청소년 인권활동가’의 존재를 알게 된 일이다. 십대 시절 교사에게 단 한 번도 반항해 본 적 없이 순응적이고도 착실하게 학교에 다녔던 나는 대학 입시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교문을 나오면서 모든 고통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십대 때의 구속과 억압이 그 이후의 내 존재까지 모조리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때에서야 분노했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오늘의 권리를 미래에 빼앗기지 않고 당당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교사 인권교육에서 청소년활동가들이 벌였던 활약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토론자로 초청받아 찾아온 청소년 활동가는 단상에 앉아 인권에 대해 논했다. 40여 명의 교사들이 의자에 앉아 청소년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의 위치가 뒤바뀐 셈이다. 결국 뒤바뀐 구조를 참지 못하고 불쾌감을 드러낸 교사들이 적지 않았다. 청소년의 입을 통해 교사의 행동이 비판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비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은 듣기만 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기에, 스스로 입을 열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일이 된 것이다.


지금도 청소년활동가들의 ‘도발적’ 활동과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마주할 때면, 이 세상이 청소년을 가두는 것은 청소년이 두렵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저항의 에너지를 애써 묻어 두기 위해 교복, 규제, 검열, 체벌로 청소년을 일정한 틀에 가두려는 시도들이 눈에 비친다. 아무런 자각 없이 벌어지는 폭력들을 목격할 때면 이제 몸이 부들부들 떨려 온다. 아마도 나는 이제 이 문제의식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앞서 고백했듯, 지금은 너무 서툴다. 어떻게 풀어낼지 몰라 허둥거리고 있으니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저 멈추지 않고 문제의식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것이 지금의 내 목표라면 목표일 것이다.


아동문학을 만나다


인권에 대한 색다른 세 번째 전환점은 아동문학을 만난 일이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만 기억하고 있던 내가 서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아동문학은 어린이의 현실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어린이의 인권 문제를 삶의 언어로 풀어낸 김중미, 박기범, 권정생의 작품을 보면서 마음 아팠고, 그 움직임에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 인문학 지원금을 받아 등록금 부담 없이 아동문학을 전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여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삶 곳곳에 스며들어 인간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동문학은 인권 감수성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었고, 어린이의 삶을 마주한다는 면에서는 청소년인권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아동문학 작품 속에는 어른들의 요구에 ‘저항하는 어린이’를 찾기 힘들다.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는 68혁명을 전후하여 권위주의에 도전하는 작품들이 나왔던 것과 비교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아동문학은 착한아이의 이미지를 거스르지 못한다. 더더군다나 어른을 전복시키는 모험을 감행하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작품 속 어린이의 형상이 사회의 의식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아직 어린이의 편에 서있다고 하는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도 어린이에 대한 보호의 관점 그 이상을 넘어서고 있지 못함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다시 바라보니, 아동문학을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작품을 즐기는 유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시대와 어린이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임을 자각하게 됐다. 권정생이 언젠가 한 말처럼 아동문학의 임무는 어린이 스스로 어른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고 저항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자양분을 쌓는 일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어른들이 제시하는 교훈적 틀을 훌쩍 뛰어 넘어 공상하는 기쁨을 즐길 수 있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문학을 아이들이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과 마구마구 나누면 얼마나 즐거울까. 다행히,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든 ‘어린이책 공룡트림’ 모임은 이런 나의 갈증을 시원히 해소해준다.


어린이를 만나다


아이들과 책을 읽으며 가장 즐거울 때는 (나도 어른이면서) 어른 흉보기다. 평소에는 학원 다녀와 피곤하다며 드러눕던 도서관의 아이들이 발딱 일어나 『어른들은 왜 그래?』라는 그림책에 몰입해 들어갔다. “어른들은 맨날 자기들만 운전해요. 우리도 운전하고 싶은데”, “엄마는 맨날 나만 칫솔질 3분하래요. 자기는 2분만 하면서”, “내가 할머니한테 다 물어 봤는데 엄마도 공부 안했대요. 근데 공부 잘했다고 거짓말 쳐요!”


일곱 살 난 아들이 한 때 입에 달고 다니던 말도 “어른들은 나빠”였다. 왜 어른들만 어린이에게 화를 내는 것이냐? 왜 어린이만 어른들 말을 다 들어야 하는 거냐? 엄마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심지어, 왜 엄마 마음대로 내 이름을 짓느냐고 항의를 해댔다. 결국 스스로 지은 이름은 ‘똘똘.’ 아직도 이 이름이 익숙지 않아, “병윤아~”하고 이름을 부르면 즉각 나지막이 읊조린다. “아니, 똘똘.” 나의 아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어른인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망에 걸려들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스로 자각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아이의 충고에 따라 즉각 행동을 수정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이렇게 나는 서른이 되어, 인권교육을 만나고, 청소년인권을 만나고, 아동문학을 만나고, 어린이를 만났다. 이 만남들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고 나온 것들이다. 철저히 깨부수고 새롭게 나온 것들이니, 아직 혼돈 속에 서 있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난 이렇게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지 않은가. 루시드폴의 노래 <물고기 마음>의 가사처럼 “보잘 것 없는 목소리에 불안한 음정”을 지녔어도 “평생을 건 숙명처럼” “아주 멋진 노래 그리며 살아”가는 일이란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인권’이란 길은 끝없이 헤엄쳐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든 인권활동가들의 움직임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