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풀뿌리와 인권이 만났을 때

2010 제주인권회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 Freire)는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아이들을 때리지 말자고 호소하는 ‘착한 교육학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마을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가난한 농민을 만나게 된다.



“박사님, 민중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박사님은 한 번이라도 우리가 사는 곳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그리고 그는 자신들이 사는 비참한 집 구조에 대해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형편없는 시설에 대해, 극도로 좁은 공간에 온 가족이 몸을 구겨 넣어야 하는 형편에 대해 일러주었다. 최소한의 생활필수품마저 마련할 돈이 없다고 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며,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도 없노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들에겐 행복할 권리나 희망을 가질 권리가 금지되어 있음을 말해주었다. … “자, 박사님, 뭐가 다른지 봅시다. 박사님도 댁에 가면 피곤할 거라는 걸 저도 압니다. 박사님은 하시는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랴, 글 쓰랴, 독서하랴, 이런 연설을 하랴, 바쁘시겠지요. 그런 일도 사람을 지치게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박사님, 지친 몸으로 돌아가더라도, 한쪽은 자식들이 깨끗이 씻은 몸에 잘 차려입고 굶주리지 않고 잘 먹은 얼굴로 맞이하는데, 다른 한쪽은 더럽고, 굶주리고, 빽빽 울고, 시끄러운 아이들이 고개를 내밉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네 민초들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상처받고 상심하고 절망한 채로 또 다른 일과를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식을 때리고, 그것도 ‘도가 지나치게’ 때린다면, 박사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삶이 너무나 힘든 까닭에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지만, 이것은 계급적 지식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프레이리는 ‘착한 교육학자’에서 ‘민중의 교육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는 그 시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의 경험은 특히 정치적 교육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학습과정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정치적 교육이 진보적이려면 민중 집단이 만들어낸 세계 읽기와 민중의 담론, 민중의 구문, 민중의 의미, 민중의 꿈과 욕구에서 표현되는 세계 읽기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인권이 풀뿌리를 만나야 하는 이유를 이런 만남에서 찾고 싶다. 인권이 제아무리 정당하고 올바른 개념과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민중의 시선과 언어, 꿈으로 녹아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이야기다. 다양한 시민사회운동들이 이런 관점을 당위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실제 활동에서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래로부터 사회를 바꾸려는 풀뿌리의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풀뿌리의 관점을 가지려면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한국의 사상가 장일순은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긍정으로 가는 것 아닌가? 예수가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참된 자기를 얻는데 그 참된 자기라는 게 뭐냐 하면 우주의 본체와 같은 것임을 깨닫는 거라. 그러니까 여기서 ‘신비로운 수동성’이란, 위대한 자기긍정에 이르도록 하는 철저한 자기부정을 말한다고 봐야겠지.” 나 속의 타자, 우리 속의 타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된 자기를 만날 수 있다. 아니, 타자 속의 나, 그 속의 우리를 보며 참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장일순 스스로도 이런 글을 남겼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옵니다. 혼자 걸어오면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오늘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이건 뭐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 하고 반성도 합니다. 문득 발 밑의 풀들을 보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밟혀서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들을 대지에 뿌리내리고 밤낮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단 말이에요. 그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내 스승이요 벗이 되는 순간이죠. 나 자신은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사상가 함석헌 역시 자신을 바꾸고 초월하지 않으면서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자기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기부정을 못하고 제가 사람인 줄만 알고, 제가 심판자·개혁자·지도자인 의식만 가지고 제가 스스로 죄수요 타락자요 어리석은 자임을 의식 못하는 사람은 혁명 못한다. 혁명은 누구를, 어느 일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명(命)을 바로잡는 일, 말씀 곧 정신, 역사를 짓는 전체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풀뿌리의 관점은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욕구를 실현할 기반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밖과 소통하지만 내부에 깃든 잠재력을 실현하는 과정이자 각자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보살피는 과정이기도 하다. 혼자서는 못할 일을 다른 이들과 함께 이뤄가는 과정이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인권은 지식인이나 활동가의 언어에서 민중의 언어로, 전문가나 활동가의 활동에서 민중의 삶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럴 때 류은숙의 말처럼 “인권은 인간 존중의 식탁에 누구나 둘러앉아 같이 먹고 마시며 누구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권담론은 이런 풀뿌리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언어로 거듭나고 있는가? 한편으로 그런 노력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풀뿌리 민중의 정치행위로 이해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인권은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학교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세계인권선언이나 사회권규약을 구체적으로 배우지 않고 설령 배운다 하더라도 실제로 써먹기 어렵다. 인권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곤 있지만, 청소년의 노동을 착취하고 두발자유를 단속하고 체벌을 가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전문가나 활동가의 언어에서 일반 대중의 언어로 체화될 수 있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풀뿌리의 관점은 이런 징검다리를 놓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인권담론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에 풀뿌리운동이 결합될 수 있다.



인권과 풀뿌리운동의 확장, 무엇이 마을인가?


반대로 인권의 관점은 기존의 풀뿌리운동이 관심을 가져온 영역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풀뿌리운동은 그동안 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고, 그러다보니 풀뿌리운동의 주요한 의제도 보육이나 청소년, 주부와 연관된 것들로 제한되었다. 물론 풀뿌리운동의 주체가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으로 확장되고, 의제 역시 평화나 주거권으로 확대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운동의 주된 흐름은 ‘가족’을 중심에 둔다.


예를 들어,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KYC)>가 엮은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 『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또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강원도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들은 대안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지만 앞서 지적한 바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인식의 격차는 격월간 《사람》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김현영: 아무래도 결혼 중심으로 관계망이 형성되는 것 같아요. 저도 생협 조합원이고 성미산 지키기에 서명도 했지만, 마을사람이라는 느낌은 전혀 못 받았어요.


위성남: 가족 중심의 커뮤니티고, 삼사십 대가 많고, 미혼 커뮤니티는 아주 취약하죠. 미혼이 최근에 늘어나는 추세인데 독자적인 자기 커뮤니티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죠. 기혼들 사이에 끼어 있다 보니 아무래도 고민이나 관심사도 많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저 같은 기혼이 미혼커뮤니티를 대신 고민해줄 수는 없잖아요? 바라만 보고 있죠. 언제 될지 모르지만 본인들이 아쉽고 답답하면 만들겠지 하면서. (…)


권김현영: 기존 커뮤니티에 접근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지역에서 성폭력 피해자 쉼터나 성소수자 커뮤니티처럼 마을에서 공개되지 않는 커뮤니티도 있어요. 근데 이런 그룹을 조직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집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든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이런 커뮤니티가 지역운동과는 연결되기에는 어려운 조건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 풀뿌리운동이 강조하는 ‘스스로의 변화’는 소수자들이 겪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그들의 문제’로 만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라는 특성이 ‘배타성’을 띠기도 한다. 이는 현실에서 진행되는 풀뿌리운동 또한 철저한 자기부정이라는 성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자기부정 없이 ‘우리’만 부각되다 보면 풀뿌리운동이 지향하는 공동체들이 ‘그들만의 공동체’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풀뿌리운동이 일상의 생활정치 속에 소수자의 시각을 녹여내고 그것이 가진 차이를 통합하려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도현의 글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라 그로스(Nora E. Groce)라는 사회학자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해안가의 외딴 섬인 마서즈 비니어드(Martha’s Vineyard)에서 농인(deaf people)들의 생활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섬에서 농인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만의 농문화를 형성하지도 않았는데, 이는 섬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와 수화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이링귀스트(bilinguist)들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농인들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농인들은 지역사회의 삶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시점에서 풀뿌리운동은 탈시설(deinstitutionalization)운동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단지 장애운동만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풀뿌리운동이 아이들의 언어, 주부의 언어, 장애인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을까? 지역사회의 주민은 아니지만 지역에서 노동하는 다양한 주체들, 예를 들면 환경미화원,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마트의 계산원 노동자들과 소통하며 서로의 삶을 돌볼 수 있을까?


인권운동이 발전시켜온 감수성과 합리성, 권리의식은 어른들이 바라는 ‘아이들을 위한 도시’에서 ‘아이들의 도시’로, ‘주부들을 위한 정치’에서 ‘주부들의 정치’로, ‘장애인을 배려하는 도시’에서 ‘장애인의 도시’로 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며 풀뿌리운동의 자기부정을 자극할 수 있다.


하지만 풀뿌리와 인권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짐 아이프(Jim Ife)의 물음은 그 어려움을 잘 드러내 준다. “지역사회개발은 인권의 기본원칙에 역행하여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대원칙은 지역사회개발에 있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한 경계를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가 지역사회 활동가에게 인종차별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경우, 지역사회 활동가는 지역사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고(이러한 거절이 지역사회 자결 원칙에 위배된다 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정당한 거절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언제나 이처럼 명쾌할 수만은 없다. 인권은 논쟁적인 개입이므로, 지역사회 활동가는 때로 지역사회와 인권에 관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인권에 관한 논쟁은 그 지역사회 내에서 인권이 어떻게 규정되고, 어떻게 이해되는가, 다른 곳에서는 인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인권을 실현하고 보호하는 방식의 지역사회개발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등의 문제가 포함된다.”


풀뿌리운동이나 풀뿌리민주주의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만큼 인권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맞닿을 수 있을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나 “열 사람의 한걸음”같은 구호보다 그 사이의 실천이, 그 실천을 위한 관심과 행동을 유도할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국가에서 지역사회, 마을로


어떤 면에서 인권의 탄생과 확산은 근대국가체계의 형성·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그러하고,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도 마찬가지이다. 인권은 인간의 권리로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정치체제의 형성과 법질서를 통해 구현되고 국가는 이런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당위) 정치적 결사체로 얘기된다. 인권은 사회가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계약의 목적으로 선언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자연 상태에서 각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는 국가라는 정치적 결사체를 통해서만 보호될 수 있을까? 이런 가상의 자연 상태에 관한 전제가 새로운 담론의 형성을 방해한다. ‘현재의 국가’가 문제일 뿐 정녕 ‘미래의 국가’는 인권을 수호하는 파수꾼이 될 수 있을까? 허나 국가는 자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을 뿐 아니라 관료조직의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도 자율성을 가진 국가, 착한 국가는 가능할까? 이런 얘기를 길게 하다보면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다시 한 번 치열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인식틀(frame)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중심에 둔 사회구성체 논쟁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마을, 자치와 자급이라는 인식틀로 논쟁이 진행되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발전과 복지는 여전히 중요한 의제이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복지국가의 모델이 여전히 중요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프랑크푸르트학파(the Frankfurt School)의 논의만 살펴도 서구의 복지국가 내에서 시민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왜곡되었는지에 관한 많은 얘깃거리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없이 서구의 복지국가가 가능했을까? 복지국가는 경제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났을까? 그런 점에서 짐 아이프는 복지국가가 사회의 대안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복지국가의 위기는 앞서 간단히 살펴본 네 가지의 정책전략(복지국가 옹호, 뉴라이트, 조합주의, 마르크스주의. 인용자) 중 어떤 것을 사용하더라도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현존하는 성장 중심의 사회·경제·정치적 시스템-복지국가는 그 내부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은 한순간도 환경파괴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사회의 발전된 형태의 복지국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제 사회변동의 구조로서 (생태학적 관점에 기초한)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다른 구조, 다른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한다.” 심지어 아이프는 복지국가의 장점이라 얘기되는 적절한 최저생계 보장, 사회적 불평등 감소, 공평성이 실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의 기밀성, 사회의 익명성, 관료주의 등이 강화되었을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국가에서 사는 시민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사회민주주의라 불리는 정책과 그 권력구조에만 관심을 둔다면 복지국가 모델은 여전히 중요하게 보일지 모른다. 허나 대중의 능력을 얕잡아 보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자비로운 시각이야말로 나쁜 국가를 불러온다는 사실은 그냥 받아들이고 참아야 하는 딜레마일까? 그리고 왜 그런 자신의 가치와 믿음이 우리의 미래이어야 할까? 우리에게는 우리의 언어, 우리의 권리로 미래를 구성할 힘이 없을까? 특히나 식민지의 국가구조와 교육체계, 정신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식민성의 굴레에 갇혀 있고,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가 외부적인 기준에 맞춰 자기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국가와 개인의 계약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면 개별자로서의 인권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인권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사회적 개인에 관한 논의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로버트 오언(R. Owen)은 이를 “우리가 지금 주장하는 원리는 분명하게 이해되고 한결같이 실현되는 자신의 행복이 공동체의 행복을 늘리는 행위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개인적 행복은 주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늘리고 확장하려는 노력에 비례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관념은 이미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생각이다.


이런 인간관을 받아들인다면 요구하는 권리에서 구성하는 권리로 논의가 확장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치와 자급의 마을이 구성된다면 그 마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힘과 관계도 그만큼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인간의 욕구와 역량이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그 내부의 기준에 따라 발전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인식틀의 전환이 중요하다. 중앙정부, 민족/국민국가에 맞춰진 우리의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내가 디디고 있는 발밑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그와 관련해 최근 인권과 관련된 조례들이 제정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중앙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정부 차원에서 인권조례들이 만들어지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조례는 법률과 달리 주민들의 ‘직접참여’가 가능하다.


최근 경기도교육감과 서울시교육감, 전북교육감 등이 추진 중인 학생인권조례보다 앞서, 2004년 1월 목포시는 ‘목포시건축물의 허가 등에 있어 장애인편의시설 설치사항의 사전점검에 관한 조례’를 공포하고 신축되는 병원, 공공시설 등 대형 건물의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사전점검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안산시는 ‘외국인주민의 인권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서 외국인 주민이 정책이나 공공시설물 이용, 고용과 관련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또한 광주광역시가 2009년 10월에 제정한 ‘광주광역시 인권 증진 및 민주·인권·평화도시 육성조례’ 역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도시의 발전비전으로 인권을 내세운 조례이고 2010년 3월 경남도의회가 통과시킨 ‘경상남도 인권증진 조례안’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조례들이 지역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안산시가 원곡동의 국경없는 마을을 기반으로 다문화라는 브랜드를 개발하고 있다는 비판이나, 광주광역시의 인권조례가 민주, 인권, 평화를 내세운 도시개발이나 지역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비판은 그 진의(眞意)를 의심케 한다. 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자치도에 초대형 해군기지건설이 추진되는 우리 현실에서는 그런 배신이 언제든지 가능하다.


어떤 면에서는 조례 제정이 시민문화나 아래로부터의 동력 없이 진행되거나 그런 동력을 제도라는 틀 속에 가두어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런 조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조례가 다른 조례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가, 서로 충돌하는 부분은 없는가이다. 똑같은 조례라 하더라도 단체장이나 지방의회가 발의한 것인지, 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주민발의로 발의한 것인지에 따라 그 앞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제도가 원뜻대로 작동하려면 그 진의를 강요할 힘이 민중에게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민중이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제도가 민중의 언어, 꿈, 욕구, 언어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자면, 조례로 표현되는 제도화와 그 합의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화적인 영역들이 있다. 국제앰네스티의 아이린 칸이 지적하는 바는 곱씹어 볼 만하다. “페루는 남미에서 산모와 영아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특히 지방 원주민 여성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산 호세 드 세까의 마을과 오코페카, 후쿠마키리, 상끄와 루페이의 공동체들, 안데스의 아야쿠초에서는 지역 NGO주도로 정부에서 지원하는 의료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조사했다. 거리와 비용, 부족한 시설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부의 지원이 그들의 문화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직원들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시설을 찾아가는 일이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와의 대화를 통해 문화적인 접근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년 동안 관계가 향상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시설을 이용하였고 마을의 전통적인 산파들과 직원들 사이의 관계도 친밀해졌다. 출산환경이나 출산전후 관리가 그 지역문화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서 있는 자세로 아이를 낳는다거나, 출산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이 손을 잡고 서 있는 것, 혹은 태반을 가족에게 돌려주어 직접 묻게 하는 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직원들은 환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고 그 지역 언어로 설명하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시설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사망률이나 환자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 경우를 통해 우리는 소외문제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 가난한 여성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할 때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배울 수 있다.”


조례는 지역사회의 법이고 법은 시민의 공공성과 여론, 문화를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조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만큼 그 지역성을 반영할 때에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지역사회운동의 힘을 제도로 잘 흡수한 참여예산제도가 한국사회에서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는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관련된 정보와 참여의 부족, 지역문화와 무관한 기계적인 제도의 도입, 제도의 발전과정에 대한 평가의 부족 때문이다.


인권은 보편적인 가치이지만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은 매우 구체적이고 그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몇몇 활동가나 전문가가 아니라 그 가치와 권리의 주체들이 현실의 제도변화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인권과 풀뿌리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인권과 풀뿌리의 만남이 언제나 아름다운 풍경만을 일구진 않겠지만 그런 노력들이 밑거름으로 변해 언젠가는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인권과 풀뿌리는 가진 자들의 삶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사람들, 허나 채우기 위해 버릴 줄도 아는 사람들의 삶에서 꽃피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2010년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렸던 제주인권회의 5세션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에 실렸던 글을 보완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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