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병역거부자는 어떻게 노동조합 활동가가 되었나

인권이 내게로 왔다



‘인권’이란 말을 처음 들었던 게 언제였더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지금이야 입 밖으로 내뱉는 게 어색하진 않지만 예전에는 노동이니, 혁명이니, 계급이니 하는 말들보다 더 어색하던 때도 있었다.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부터 ‘인권’이 내 삶으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난다. 아니 내 삶을 인권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난다고 해야 옳겠다.



병역거부가 가져다 준 선물


내가 병역거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대학교 4학년 때인 2002년 여름이다. 그해 봄부터 내가 속한 학생운동 조직은 병역거부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정하고 오태양 씨의 병역거부 선언을 지지하고 알리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때만 해도 내가 병역거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이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오태양 씨가 감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연대하는 심정이었지 내 삶과 연관지어 내 문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2002년 여름을 보내면서 병역거부를 결심했다. 그 전까지 병역거부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훨씬 전부터 예비 병역거부자였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남성이 아마도 한때 예비 병역거부자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꼭 가고 싶어 하는 남자를 나는 TV 광고에서 말고 본 적이 없었다. 애써 외면하고 피해왔던 문제를 부여잡았을 때, 마침 한국사회에선 병역거부라는 개념이 막 등장했고, 내가 속한 학생운동 조직은 병역거부운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었다. 군대 가기 싫은 이유,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십 개 들 수 있었고, 가고 싶은 이유는 하나도 없었고, 가야할 이유를 굳이 찾으면 부모님 때문이었다. 큰 불효라고 생각했지만 별로 망설이지 않고 병역거부를 결심했다. 내가 군대 가서 불행하게 사는 게 부모님께 더 큰 불효가 될 것이라고 애써 위안 삼았다.


나는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한 것은 아니다. 인권 감수성이 풍부해서 병역거부를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병역거부를 했기 때문에 평화와 인권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인권이 내게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병역거부’라는 돛단배를 타고 왔다.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공식 선언을 하고 학교를 졸업한 뒤 병역거부자들의 모임인 전쟁없는 세상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신생단체였던 전쟁없는 세상은 나와 몇 명의 병역거부자, 그리고 평화운동가들이 함께 만든 단체였다. 전쟁없는 세상도 초보였지만 나와 내 친구들도 사회운동 경력이 거의 없는 초보 활동가였다. 부족한 경험을 메우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함께 병역거부운동을 하고 있던 평화인권연대의 소개로 다른 평화활동가들과 인권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이들은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혹은 경험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날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덕분에 난 그이들에게서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배웠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나이어린 나에게 쉽게 반말하지 않는 거였다. 서로가 깍듯했고, 친구가 된 뒤에는 서로가 평등했다. 인권활동가들은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약자 편에서 세상과 싸우면서도 교만하지 않았다. 노동자, 민중을 추켜세우면서도 언제나 가르치려드는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 스스로가 이미 약자였다. 쥐꼬리만 한 활동비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는 빈곤층이고, 여성이고, 성소수자고, 장애인이었다.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비껴 나가면 큰일 날 것처럼 노심초사하며 주류 질서에 들어가기만을 애쓰는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나 약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도와주려 하는 모태천사들도 있지만, 인권활동가들은 스스로 노력해 약자가 됨으로써 약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싸우려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헌신적으로 싸우면서도 언론 기사에 자기 이름자 남기는 데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게 꽤 멋져 보였다. 나는 어느새 그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먼저 내 삶을 살펴봤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지 처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부잣집이나 국회의원, 장관 부모 아래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남성이고, 오른손잡이에, 이성애자, 젊은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 졸업생, 비장애인……. 내 삶은 아주 많은 영역에서 세상살이에 불편함이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아주 익숙하고 당연하게 누리고 있어 그것이 기득권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 모든 안락과 기득권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닐 터, 내가 그것을 누리는 뒤에는 누군가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런 자각은 큰 충격이었다. 나는 인권활동가들처럼 스스로 약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장 죄 안 지으면서 사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병역거부는 내가 최초로 세상과 겪은 불화였다. 그 전에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맘에 안 들어 하거나 주류 가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했지만 그저 불만 많은 불평분자에 그쳤을 뿐이다. 병역거부자가 되면서 내 삶은 이 세상에서 이물질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세상이 이대로 굴러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내 존재 자체가 불편하고 내다버리고 싶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건 한편으로는 좀 귀찮은 상황에 처하는 것이었지만, 주류 질서에서 낙오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버린다면 아주 신나고 즐거운 세상으로 접어드는 길이기도 했다.


병역거부자가 되어 만난 새로운 세상은 자전거를 타고 고기를 끊는 것으로 이어졌다. 병역거부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고기를 안 먹는 이유는 서로 비슷한 듯하면서도 각기 달랐지만 그러면서 겪게 되는 경험은 매우 비슷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시선을 받는지, 어떤 차별을 받는지 알게 됐다. 물론 그것만으로 내가 세상 모든 차별 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나 또한 약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그로부터 오는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감수성을 가지게 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좀 귀찮은 것들이라 여겼던 것들, 예컨대 병역거부의 경우엔 전과자가 돼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번듯한 직장을 포기하니 새로운 여러 갈래 길이 내 앞에 생겼다. 그 길들을 기웃거리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병역거부 안했다고 번듯한 직장에 보란 듯이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기회비용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주류 질서에서 낙오되는 것이 딱히 손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내가 출판사 편집자가 될 줄이야


언젠가부터 병역거부운동이 재미없어졌다.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처럼 내가 감옥을 갔다 왔다고 그런 건지, 너무 오래 끌면서 지겨워진 때문인지,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위한 노력들에 더 이상 감정이 이입되지 않았다. 병역거부를 하고 싶다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마치 거래처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는 일처럼 귀찮아졌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건지, 그만둘 때가 온 건지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다른 일이 겹치면서 전쟁없는 세상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주 작은 돈이지만 전쟁없는 세상에서 받던 활동비가 끊기자 당장 입에 풀칠하는 일이 문제가 됐다. 자격증은커녕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는데 취직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게다가 나는 전과자였다. 둘레에 물어보니 그나마 전과자인 것을 상관 안 하는 분야가 출판계와 라디오방송 시사프로 구성작가 쪽이라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KBS에서 PD 집필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KBS 작가들이 대거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나같이 경력도 없는 사람은 명함 내밀 기회도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출판계였다. 출판계 사람들이 구인구직에 관한 정보를 올리는 인터넷 사이트를 훑어보다가 경력과 학력은 보지 않고 몸으로 일하는 자세가 배어있는 사람을 뽑는다는 문구를 보고 별 고민 없이 한 번 경험 삼아 넣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출판사는커녕 회사에 다닐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그렇게나 많은 조직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출판사에서 들어와서 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교육서 편집자를 지원해서 들어오게 됐는데 교육서가 어떤 책들인지, 편집자는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전혀 몰랐다. 들어와 보니 내가 주로 맡을 책들은 ‘평화발자국’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시리즈였는데, 바로 인수인계 받은 책들이 용산참사를 다룬 만화책과 비전향장기수 선생님이 쓴 수기를 만화로 그린 책이었다.


교정교열이란 말을 출판사에 들어와 처음 들어볼 정도로 문외한인 나를 뽑은 이유는 내가 병역거부자이기 때문에 평화발자국 시리즈를 맡기려고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회사 사정상 일 가르쳐줄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난생 처음 책 만드는 일을 했다. 정신없이 하다 보니, 『내가 살던 용산』과 『나는 공산주의자다』가 턱하니 책으로 나와 있었다. 내가 만드는 책이 평화나 인권과 같은 가치를 바탕으로 국가폭력으로 내몰린 약자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내가 노동조합 조합원이 될 줄이야


회사에 들어올 때 노조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병역거부운동을 하면서 바라본 노동운동은 너무 조직적이고, 경직돼 있고, 그래서 좀 재미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회사원이 될 생각도, 노동자가 될 생각도 해 본 적 없으니 관심을 덜 가지는 게 당연했다. 어쩌다 사회를 뒤흔드는 이슈가 되는 노동현안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때도 나를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큰 기대 안하고 원서를 넣어봤다 덜컥 다니게 되어 회사에 대한 정보나 업무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난생처음 하게 된 회사 생활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배워야할 게 산더미였으니,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잔데 노동조합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도 익어가고 동료와도 친해지면서 자연스레 노동조합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대한민국 평균을 놓고 봐도 노동조건이나 복지수준이 좋은 편에 속한다. 급여야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출판계가 워낙 박봉이란 걸 생각한다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출판하는 책들도 나름 뜻과 의미가 있는 책들이라 일하는 보람도 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꽤 좋은 회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회사라도 회사는 회사고, 노동자는 회사에 비하면 약자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 대부분이 동의했다. 나 같은 경우는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노동자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결정되는 것에 문제를 느꼈다. 회사에서 주인의식을 느끼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가 하나도 없었다. 꼭 이용석이 아니라도 그냥 누군가 이 자리에 있으면 회사는 아무렇지 않게 굴러갈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내 처지가 기계 부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덜컥 들어오느라 많은 생각은 못하고 그냥 월급만 꼬박 잘나오면 만족하자고 했는데 막상 다녀보니 월급만 꼬박 통장에 채우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길 원했고, 내 일터에서 나 또한 책임감을 느끼는 주인 중 한 명이길 바랐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저마다 회사에 비해 약자라고 느끼는 경험들이 있었으리라.


뜻을 모으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노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예 없었고, 이곳이 첫 직장인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산별노조와 기업별노조가 어떻게 다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유니온숍이니 오픈숍이니 하는 것도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들어본 기억만 언뜻 남아있을 뿐이었다. 문득 학생운동할 때 노동법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 노동해방이니 계급투쟁이니 떠들어댔던 기억이 떠올라 심하게 부끄러웠다.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하나 공부하고 준비해야 했다. 다른 출판사 노조 이야기도 듣고-그 많은 사회과학 출판사들은 대체 책 안에서만 민주노조와 노동운동을 떠들어대는지, 노조가 있는 출판사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노무사에게 강연도 들으면서 차근차근 준비해 마침내 창립총회를 하게 됐다. 창립총회는 또 어찌나 갈팡질팡했는지, 구경 온 손님들이 이렇게 자유분방한(?) 노조 창립총회는 처음 봤다며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축하인사를 건넸다. 대학생 때 학생회장을 하면서 다시는 이런 선출직 간부는 재미없어서 안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창립총회에서 분회장이 돼 버렸다. 노조가 만들어지면 열심히 참여할 생각이었지만, 내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에 중요한 일까지 맡아버려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악덕기업은 아닌지라 뚜렷한 쟁점도 없고,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것만큼 노조에 관심을 가져주지는 않는다. 회사 쪽도, 조합원들도, 출판계 다른 사람들도 우리 노조가 단순히 임금협상과 노동자들의 복지증진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봐왔던 노조들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듯하다. 이건 확실히 나에게 버거운 일이다.



지치지 않고 뚜벅뚜벅


한 친구가 회사에 들어가 책을 편집하고, 노동조합 활동하고 그러니까 네가 진짜 출판계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이것이 원래 네가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묻는다. 모르겠다. 무슨 거창한 출판인으로서 포부나 편집자로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니 원래 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병역거부를 했던 것도, 출판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도, 원래 내 일이라서 하는 건 아니다. 원래 내 일이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권도, 평화도, 원래 내 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나에게 주어진 몫을 묵묵히 잘 해내고 싶다. 세상이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뀌기를 바라지만 나 하나 몸부림친다고 바뀌지는 않을 거고, 아니 내가 아니라 그 어떤 천재나 대단한 사람이라도 혼자 바꿀 수는 없을 테니까. 병역거부자에서 노동조합 분회장까지. 누군가에겐 대단해 보일 수도, 다른 이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그래, 인권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이 길을 걸어가고 있진 않았겠지. 아니, 이렇게 걸어가면서 인권이 조금씩 내게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닭이 먼저면 어떻고 달걀이 먼저면 또 어떤가. 지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지나온 길에 대해 좀 더 자신 있게 얘기할 날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