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망하거나 죽지 않고 존중받을 권리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초」에서




망하거나, 죽거나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집에 빨간 압류딱지가 붙어있습니다.”


오늘 아침 다음 아고라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재능학습지 노조에서 사무국 일을 하고 있는 한 활동가의 남편이 올린 글이었습니다. 급여체계와 노동조건의 하락을 반대하는 항의시위에 해고와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던 회사가 낸 방해금지가처분신청이라는 민사소송을 법원이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1000일간 끈질기게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그 자체로 형벌입니다. 맞벌이와 노동조합 활동으로 바쁜 자식들을 대신해 아이를 돌보려 살림을 합친 노모가 김치를 담가주겠다며 용돈을 모아 마련한 김치냉장고에 붙은 빨간딱지를 보며 자식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도 덩달아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했거나 하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반올림의 활동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삼성 측에서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민다더군요.


허울 좋은 산재(산업재해)처리는 늘,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법으로 인정된 것만 가능하다며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같은 사업장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견된다면 문제점을 찾아내는 노력과 더불어 이미 피해를 당한 이들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는 그저 ‘사용자’의 도덕적 책임감에 맡겨져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의 실효성 확대를 위한 개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노동인권’이라고 부릅니다. 아프거나 망하거나 죽거나 굴욕을 감수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일하지 않을, 혹은 거부할 권리, 그래도 살아갈 권리 말입니다.



근로기준법에 딴죽 걸기


저는 사실 근로기준법에 딴죽 걸기를 자주합니다. 잘 들여다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거든요. 하고 싶은 말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근로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좋은 일일까? 왜 근로기준법일까? 임금은 근로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에 매긴 가치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근로자를,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로 정의했을까? 더불어 왜 근로계약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계약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을까? 임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노동,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계약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결국 노동자들에게 임금만 바라보고 열심히 일해야만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닐까? 취업을 거부하거나 노동조건에 반발하여 파업을 하는 경우, 아프거나 해서 오랫동안 쉬어야 할 경우에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거나 사회에서의 추방, 잉여인간으로의 취급을 감수하도록 요구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적용범위를 정한 조항은 정말 최고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주로 근무하게 되는 영세/무급/비정규직/여성, 청소년, 장애인 노동자, 무급가족 종사자나 재가/파견/가사/간병노동자 등은 아예 배제시켜버리니 말이야.


예고해고의 예외적용은 사실상 예고해고 혹은 해고되지 않을 권리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근로자 명부 작성(이력, 학력, 생년월일, 가족 등)은 꼭 필요한 일인가? 특히 성소수자의 경우 성전환을 하고 법적으로 성별을 바꾸고도 이력(남/여중/고/대)에서 아웃팅당할 수도 있는데. 밝히고 싶지 않은 가족내력이 드러날 수도 있고…….



노동과 고용 상황이 유연화된 상황에서 원청의 사용책임을 모든 산업에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족수당은 가족임금을 적용했던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임금체계의 흔적 아닌가?



근로자와 사용자라는 용어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없나? 특히 사용자라는 말에서 노동자에 대한 도구적인 관점이 느껴져.



안전과 보건, 재해보상에 대한 규정에 새로운(혹은 변화된) 산업과 업무형태, 조건에 대하여 그 유해성에 대한 예방 노력 규정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벌칙 조항은 너무 약해서 실효성이 없을 것 같고, 다른 법에 의해 노동기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명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법문은 왜 또 그 모양인지. 난독증을 유발하기 딱 좋아. 또 문서에 익숙하지 않거나 글을 읽을 수 없는 노동자에게는 어떻게 이 내용을 알릴 것인지? 혹시 문맹이거나 시각 장애인의 경우 근로기준법에 적용받는 사업장에서 일하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은 아닐까?



15세 미만자에 대한 고용금지 또는 연소자 증명서에 대한 조항은 청소년의 노동을 ‘노동’이 아닌 ‘알바’로만 바라보게 하는 것 아닌가?



여성에 대한 조항은 여성을 ‘모성보호’를 위한 신체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불쾌한데? 모든 노동자가 유해하지 않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각각의 노동자 상황에 따라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산업별, 작업장 조건별로 노동건강권(예방, 치료, 보상 등을 담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근로기준법에서 ‘근로자’는 남성, 성인, 비장애인이 5인 이상의 규모가 있는 사업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어 놓고 화폐화하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이름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하면 너무 억지일까요? 물론 여성과 소년(소녀는 어디?)에 대한 조항이 있지만 그들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주로 부각될 뿐입니다. 보호를 명목으로 차별적 시선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불쾌감마저 듭니다. 그나마 이들은 형편이 나은 거라고 해야 할지……. 성소수자나 장애인, 노인의 노동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노동을 하고 있지 않을 존재들이거나 아예 없는 존재들처럼 말입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산과정에 포함된 ‘근로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아파서도 안 되고, 실업상태이거나 취업거부자여서도 안 됩니다. 하물며 파업은 더욱 안 되죠. 근로자가 어떻게 일을 안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해서 ‘무노동 무임금’의 신화가 완성됩니다.


더구나 저는 근로기준법에서 언급하고 있는 많은 내용들이 사실 자본가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의심을 합니다. 즉 노동자들의 정신과 신체를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지요. 심지어 노동시간과 휴게(휴식)시간, 출퇴근 시간 등에 대한 취업규칙 부분, 기숙사, 벌칙 등에 대한 조항에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측면이 있긴 하겠지만 작업장에 나의 정신과 신체가 적응되고 훈련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자본가의 작업규칙에 따라 죽은(소외된) 노동을 하고 기계가 되어 가도록 적응되는, 그리고 나의 신체는 조각조각 나뉘어 작업장의 부속품으로 바뀌는, 결국 임금 없는 노동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그런 확신에 가까운 의심입니다. 노동자를 그런 상태로 만들기 위해 자본가가 치러야 할 비용이나 절차를 정리해 놓은 것이 결국 근로기준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근로기준법을 너무 심하게 헐뜯고 있나요?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 근로기준법의 역사나 유래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금’을 말하고 있거든요. 사실 과거에도 유효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때도 이런 문제 제기를 했을 사람들이, 혹은 하고 싶어도 못했을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근로기준이 아니라 노동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


근로기준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노동관련법을 모두 다시 정비하면 될까요?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자본은 노동자를 고용하기보다 ‘노동의 흐름’을 ‘구매’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정착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몇 년 동안 생산과정에 있는 노동자 중 절반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가는 모습이 바로 자본의 유연화 체제의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흐름으로만 존재하며 개별화된 노동자 개인이 삶에서 감당해야 할 불안과 두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스펙 쌓기’나 부동산 열풍이 그 영향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개개인이 노력하지만 허망하게도 워킹 푸어(Working Poor)가 되어 일하면서도 가난하거나 하우스 푸어(House Poor)로 평생의 미래 노동을 답보 잡혀 집을 마련하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또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또한 현실이구요.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면 될까요? 혹은 작업장 내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것으로? 고용안정이 되고 임금을 많이 받으면 과거만큼의 행복이라도, 혹은 희망이라도 꿈꿀 수 있게 될까요? 또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노동현장에서 노동하는 것이 노동자에게 좋은 일일까요?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존중받으며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일하지 않고도 망하거나 죽지 않고 존중받으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 이것을 저는 ‘노동인권’이라고 말합니다. 노동력을 재생산할 의무를 오로지 개인이 알아서 하게 하는 사회는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먹고 사는 추악한 사회니까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원한다면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포섭되지 않고도 죽은 노동, 소외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권리 말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에게는 두 가지 다 필요합니다. 노동할 권리와 노동하지 않을 권리.


저는 그래서 엉뚱하게도 법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리끼리의 네트워크를 생각합니다. 생산, 유통, 소비, 문화, 재생산을 모두 아우르는, 우리 삶의 총체적인 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아! 그렇다고 해서 법 개정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라는 거 아시죠? 더 좋게 바꿀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한 온힘을 다해서 바꾸어야죠. 그런데 여기에만 너무 기운 빼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