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풀을 누이고 일으키는 바람

탈시설 자립생활 활동가 신인기 씨

인내하고 배려하는 사람을 달리 표현하면 베푸는 사람이다. 문제는 베풀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아님에도 인내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삶을 조금 더 고달프게 만든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인지상정이 아니어도, “침묵하는 자에게 인권은 없다”라는 명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무시되고 억압당한다. 그가 약자일 땐 더욱 무자비하다. 자신을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고 말하는 신인기 씨가 그렇다. 백일 무렵 열병을 앓고 뇌신경이 손상된 인기 씨는 현재 목 아래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뇌병변 장애인이다. 남의 손을 빌지 않고 살 수 없는 그는 그럼에도 배려와 인내가 녹슬지 않았다.


“오시는 분들(활동보조인 ‘활보’로 줄여 부름)한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해야 하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해주는 편이에요. 2007년부터 2년 넘게 활보로 일하신 분은요, 오셨을 때 내가 누워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그분도 옆에 같이 누워요. 그러면 누워서 쉬게 해드려요. 그러다가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면 밥 먹고 씻고 나가고 그랬어요.”


불편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조금 뜸을 들이던 그는 “조금 불편하지요. 그땐 쓰레기통을 거의 2주에 한 번씩 비우고 했으니까”하며 씩 웃는다. 어디 그뿐일까. 밥을 더 먹고 싶다, 천천히 먹고 싶다, 국은 따끈하게 데워주고, 고등어자반은 크게 뚝 떼 넣어주고, 바지는 오른쪽 다리부터 넣을지 왼쪽 다리부터 넣을지 사람마다 취향은 무궁무진하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궁한 취향을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고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말로 할 수밖에 없는 그 말이란 게 많아지면 베푸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참고 사는 수밖에. 인터뷰 내내 그는 “그냥 참았죠”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했다.


“내 손이 내 딸”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하는 게 가장 맘에 들고 맘도 편하다는 뜻. 그럴 수 없는 중증 장애인들은 활보에게 제 살림살이를 맡길 수밖에 없으니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인기 씨는 활보라는 육체 노동자들의 노동에 더 맘이 쓰이는 모양이다. 곳간에 쌓아놓고 사는 사람만 베풀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인기 씨의 이런 성격이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그에게 득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설에서의 독립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역설적으로 이런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설은 시설 생활자를 온전한 인간이 아닌 미숙한 피조물로 취급한다. 인기 씨처럼 인내와 배려가 많은 사람일수록 미숙한 피조물 취급은 폭력이 되고 반드시 벗어나야 할 무엇이 된다. 폭력에 대해 폭력적으로 맞설 수 없는 인기 씨에게 ‘자립’밖에는 탈출구가 없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인기 씨는 동네 또래 집단에 어울려 별 탈 없는 유년을 보냈다.


“광명에서 살았어요. 그땐 기어 다니고 높은 데도 올라가고 할 수 있었고, 동네에서 10년 동안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 있어서 왕따 같은 건 당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날 놀리는 아이들이 있으면 친구들이 가서 패주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어요. 부모님이 데리고 다닐 수가 없으니 그때부터 날 집에 가둬놓았던 거 같아요. 방안에 혼자 있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다르구나, 벽이 가로 막고 있구나, 장애가 있다는 걸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이 학교로 다 가버린 동네는 조용했다. 울지 않았지만 벽이 보였다. 갇혀 있는 인기 씨는 동네가 시끌벅적해지는 오후가 되어야 비로소 친구들의 목소리를 벽 너머로 들었다. 부모님이 알고 있는 특수학교는 삼육재활원뿐이었다. 서울로 통학을 시킬 수 없었고 무엇보다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부모님들은 대전에 있는 기숙학교로 인기 씨를 보냈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엄마와 떨어져야 했던 인기 씨는 많이 울고 선생님에게 떼를 썼다. 아마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떼를 쓴 게 아닐까. 분리되고 버려지는 경험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대전 기숙학교는 한 반에 18~20명이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는 곳이었다. 소아마비 장애아들이 있었다. 휠체어가 필요 없는 그 아이들에게 인기 씨는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느꼈다.


“소아마비는 소아마비끼리 놀고, 뇌성마비(뇌병변)는 뇌성마비끼리 놀았어요. 융합이 잘 안되더라고요. 언덕배기 올라갈 때 소아마비들은 날아서 올라가요. 중학교 땐 농구도 했는데 소아마비들이 잘 끼워주지 않았어요. 왕따는 아니었지만 그냥 구경만 했어요. 휠체어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부러웠어요. 일제 휠체어는 3년을 타도 고장이 안 났어요. 4학년인가 5학년인가 나한테도 생겼는데 국산이라서 앞바퀴 고장날까봐, 천천히 다녔던 기억이 나요.”


학교는 소아마비 장애인들의 세계와 중증 장애인들의 세계가 수직적으로 나뉜다. 이른바 ‘짱’먹는 아이들은 늘 소아마비들이었다. 장애인 학교나 시설에서는 장애의 경중(몸이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느냐) 그리고 지체 장애냐 지적 장애냐(장애 유형)에 따라 위계, 즉 권력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인기 씨 인생에 가장 끔찍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시설을 만든다고 5년 동안 인기 씨를 여기 저기 끌고 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시킨 성재(가명) 씨도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대전 기숙학교에서 중학교를 마쳤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특수학교에 가려면 한 달에 10만 원 정도 들어야 했다. 비장애인이었다면 상급 학교에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는 인기 씨의 꿈은 꿈으로 그쳤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둘인 형도 반대했다. 형제라고는 인기 씨뿐인 형은 진학도 독립도 모두 반대만한 야속한 형이다. 장애인이 배워서 뭐하냐는 게 형의 주장이었다.


“6학년 졸업하고 집에 올라가니까 형이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집에 형수는 없어요. 내가 가니까 친정으로 보낸 거예요. 결혼식 때도 절 부르지 않았고요. 나를 보여 주기 싫어서겠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아는 사람들 결혼식에 안 가요. 축의금만 내지 안 가게 되요. 형님 결혼식도 안 봤는데 남이 하는 결혼식 보면, 좀 피해의식 같은 것도 있고 여하튼 결혼식에는 안 가요.”


가족 행사에서 배제되는 경험은 장애인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비장애인 가족들은 번거롭고 불편하고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를 텐데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창피함이 있을 것이다. 수치심 때문에 가족의 일원으로 호명 받지 못한 경험은 장애인들에게 트라우마가 된다. 쉽게 말해 가슴에 사무치는 한이다. 인기 씨처럼 가족 행사에서 삭제된 장애인은 수없이 많다. 이들에게는 보편적 경험이다. 한 지적장애인은 오빠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가족사진에는 없다. 결혼식장 뒷좌석에 앉아 가족사진 촬영을 멀뚱히 구경하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람은 말이 아니라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감각적 인지 동물이다. 슬픔, 공포, 불안, 역겨움, 소외, 버려짐, 환멸, 분노에 대한 경험은 그를 어둠으로 밀어넣고 일그러뜨린다. 불행하게도 많은 장애인들에게 가족이 이런 경험을 가져다주는 생애 첫 가해자가 되곤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인기 씨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안산의 직업학교 명휘원으로 옮긴다. 명휘원이 평생 살아야 할 집이라고 생각하며 그 생활에 적응할 무렵 눈앞이 캄캄한 일이 벌어진다.


“총무 수녀님이 교체되고 다른 수녀님이 오신대요. 불안했어요. 총무님 가시기 전에 더 있게 해달라고 다짐도 해두었어요. 걱정 말라고 하시더니 일이 틀어져 버렸어요. 나가라는 거예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배신이었죠. 강제 반 타의 반으로 거기서 나왔어요.”


인기 씨는 거기서 나무젓가락 봉지 끼우기, 장난감 만들기, 물파스 불량 고르기 등 단순 작업을 했다. 해가 지나자 작업 지휘도 하고 아주 작은 돈이지만 급여도 받아서 1990년에서 1995년까지 5년 동안 120만 원을 저축했다. 무엇보다 친구를 얻었다.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성북자활센터의 소장은 같은 명휘원 출신이다. 총무 수녀님이 교체되고 명휘원은 지적장애인 직업학교로 바뀌게 된다. 친구도 꿈도 일도 모두 잃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형은 함께 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인기 씨는 다시 한 번 버려진다는 경험을 살갗에 새기게 된다. 명휘원을 나와 잠시 집에 있을 때, 성재 씨가 찾아왔다. 그는 자기를 명휘원 초대 졸업생이라고 소개했다. 이미 인기 씨를 알고 있다는 그는 아버지와 형, 형수를 만나 본인이 시설을 만들 계획이 있는데 인기와 함께 하고 싶다 했다. 그는 인기 씨를 데리고 화곡동으로 갔다. 미신고 시설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하숙집 같은 곳이었다.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 인기 씨가 방에서 대변을 보고 신문지에 싸서 내놓으면 밥 해주는 아주머니가 치워주었다. 3개월을 그렇게 살다 성재 씨가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며칠 지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성재 씨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인기 씨를 원격 조정한다. 집에서 허락을 받고 화곡동으로 데려올 때도 인기 씨와는 어떤 상의도 없었고, 설명도 없었다. 돌려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가서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가 수소문해 인기 씨의 대부가 원장으로 있는 홍천의 시설로 옮기게 된다.


“거긴 지적장애인들이라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대형 사고를 한 번 쳤죠. 자원봉사 온 군인에게 집에다 연락 좀 하게 해 달라고 했어요. 원장님이 알고 노발대발을 했어요. 거기선 편지만 할 수 있고 전화는 못해요. 집으로 편지를 해도 대답이 없어요. 그렇게 2년 동안 거기 있었어요. 그때 문득 떠오른 거 하나, ‘혼자 살아봐야겠다.’라고. 내 생애 처음으로 했던 거 같아요. 원장님에게 말했더니 또 노발대발하면서 너 혼자 나가서 어떻게 사냐, 안 된다, 조용히 가만히 있어라, 꾸중만 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기도실에 가서 죽어라 기도만 했어요, 나가게 해 달라고. 1998년 11월 22일로 기억해요. 성재 형님이 홍천으로 나를 찾아와서 데리고 나갔어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준 거 같았냐는 물음에 인기 씨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인기 씨 명의로 임대아파트를 얻고 자기만의 방을 얻게 되었던 2004년 그날보다 홍천 시설에서 ‘독립 성취기도’를 드리던 중 성재 씨에게 이끌려 시설을 빠져나왔을 때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들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은 여기(임대아파트) 들어와서 보다 홍천에서 나와서 더 많이 들었어요. 포기는 안했지만 그래도 가슴 속에 묻고만 있었지 그런 기회가 올지는 몰랐거든요.”


그러나 서천서역국 동대산 약물을 얻으려는 바리공주가 무장승에게 잡혀 물 긷기, 불 때기 그리고 일곱 아이를 낳아 주는 ‘고통 지불’을 해야 했듯이 인기 씨의 고통 지불도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된다. 홍천에서 인기 씨를 데리고 나온 성재 씨는 인기 씨의 아버지에게 각서를 요구한다. “나(인기)에 관한 모든 것을 너(성재)에게 맡긴다.” 뒤집어 말하면 너의 생사여탈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노예문서라고 할 수 있는 각서에 인기 씨도 동의하고 성재 씨에게 주었다.


성재 씨가 홍천에 인기 씨를 데리러 왔을 때 한 여성이 동행했다. 그의 애인이었다. 성재 씨는 인기 씨를 데리고 강화도에 있는 애인 집으로 갔다. 그는 시설을 만들고 시설장이 되겠다는 꿈을 아직 이루지 못한 상태였는데 강화도 애인 집을 시설로 만들 요량이었다.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 장애인은 인기 씨뿐이었다. 집은 작았지만 편의시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고 성재의 애인은 밥이며 빨래며 인기 씨를 돌봐주었다.


“내가 있으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나와서도 거의 혼자 있다가 태호(가명) 형이 들어왔어요. 산에서 사고를 당해 가슴 아래로는 못 쓰는 분이었죠. 강화도에 있은 지 5~6개월 만에 성재 형과 애인이 크게 싸웠어요. 돈 때문이었겠죠. 성재 형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 애인이 돈을 안 내놓으니까 성질이 나서 한 대 쳤나 봐요, 몽키로 무릎을 때렸어요. 경찰이 오고 나도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썼어요. 그땐 성재 형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아니 다 해줬어요. 내가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성재 씨와 애인은 그 사건 이후로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 사건이 있기 전부터 성재 씨는 부천에 또 다른 애인을 만들었다. 강화도 애인이 돈을 안 내놓으니 부천에서 다른 돈 많은 애인을 만들었던 거 같다는 게 인기 씨의 해석이다. 강화도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부천으로 왔다 갔다 원정 경기를 한 것이다. 아무튼, 강화도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인기 씨와 태호 씨에게 성재 씨는 갑자기 부천으로 옮긴다고 통보를 한다. 앞뒤 설명이나 여타의 동의 절차는 없었다. 부천으로 간다, 이게 전부다. 인기 씨는 갑자기 옮기는 바람에 몸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부천으로 옮기고 강화도 짐을 갖다달라고 몇 번씩 말을 했지만 성재 씨는 무시했다. 나중에 듣고 보니 강화도의 인기 씨 짐을 그가 모두 불태워버렸다. 거기엔 어머니 사진과 어릴 적 사진, 인생에 추억될 만한 것들 모두 다 있었다. 당해보지 않으면 얼마나 치 떨리는 일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겪다가 아, 이 사람 정말 안 되겠구나 깨달음이 올 때가 있다면, 성재라는 사람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인기 씨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추억을 무참히 불태워버리고 입 다물고 있는 사람, 인기 씨는 성재 씨를 마음에서 멀리 밀어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인기 씨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사람이기에 같이 갈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나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물론 부질없는 미련일 뿐이지만.


부천으로 옮기고 새로운 애인과 성재 씨는 돌아다니기 바빴다. 원래 경기도 어디에 살았던 새 애인은 세 아이들을 데리고 부천으로 옮겨서 성재 씨와 함께 시설을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기 씨는 그곳이 시설일 수 없다고 돌이킨다. 강화도보다 여건은 더 안 좋아졌다.


“부천으로 오면서 설거지를 하래요. 그땐 장애가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 하면 할 수는 있었어요. 아이들까지 6명이 먹은 설거지를 하면 한 세 시간 걸려요. 점심, 저녁 설거지를 다 했어요. 성재 형이랑 애인은 돌아다니기 바빴고. 그러다 또 강화도에 가 있으라고 했어요. 그땐 강화도로 가는 게 좋았어요.”


그렇게 부천과 강화를 3번 정도 오갔다. 강화도에 함께 살았던 태호 형은 함께 가거나 강화도에 있거나 했다. 2000년 겨울 어느 날 성재 씨가 강화도에 갑자기 나타났다. 강화도 원장(성재의 옛 애인)이 집에 없는 날이었다. 가자는 말 한 마디에 인기 씨는 또 떠나야 했다. 밤이었다. 짐이야 다 태워버린 후였으니 쌀 것도 없었다.


“원장님한테 인사도 못하고, 말도 안하고 그냥 데리고 갔던 거에요. 부천으로 가는 거 같지는 않았는데 묻지 않았어요. 원래 그런 건 묻지도, 말해주지도 않아요. 16인승 승합차에 나랑 태호 형, 그리고 아이들 3명에 성재 형과 그 부인(부천의 애인) 이렇게 탔어요. 간이 침대며 이삿짐도 좀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분위기는 굉장히 얼어붙었어요. 가기 싫었는데 또 다짜고짜 데리고 가니까. 목적지에 도착하니 새벽 2시에요. 1, 2층이 상가인 3층 집이었어요. 15살 큰애가 업어서 우리 둘을 3층으로 옮겨줬어요. 그날 밤은 아무 말 없이,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피곤해서 그냥 잤어요. 다음날 일어나니 성재 형이 그래요. 여긴 무안이다, 무안에서 다시 시작해보겠다, 지금은 너희 둘뿐이지만 앞으로 더 들어올 거다, 비장하게 얘길 해요. 무안까지 내려온 줄 그때야 알았죠. 서울 근교에서는 이제 평판이 너무 나빠져서 얼굴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나 봐요. 내려올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안은 부인의 고향이래요.”


무안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성재 씨는 3층 옥상에 컨테이너를 올렸다. 방이 두 개였다. 하나는 성재의 식구들이 쓰고 나머지는 인기 씨와 태호 씨가 함께 기거했다. 또다시 시작한 미신고 시설이었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난 겨울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게 힘들었다고 한다. 날이 가도 시설은 더 이상 규모 있게 만들어지지 않고 컨테이너 박스 그대로였다. 들어온 사람은 노인 한 분이었는데 6개월 있다가 집으로 다시 모셔 갔다. 2년 동안 단 세 번 외출할 수 있었다. 성재 씨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차단했다. 동사무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오긴 왔지만 우르르 몰려왔다 몰려갈 뿐 인기 씨가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명휘원에 있을 때 저축한 돈을 아버지에게 맡겼는데 그중 70만 원을 홍천에서 나올 때 주셨다. 성재는 인기 씨에게 그 돈을 빌려갔고 무안에서 매달 3만5천 원씩 주었다. 인기 씨는 그 돈이 수급비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끔 자장면도 먹고 싶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 아이들까지 다 내 돈으로 사줘야 해요. 매달 받는 3만5천 원을 그렇게 다 썼어요. 무안에서 성재 형이 때리거나 그런 학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먹는 걸로 힘들게 했어요. 그것도 학대라고 생각해요. 많이 먹는다고 먹을 걸 제한했어요. 저녁 6시에 밥을 먹으면 배가 많이 고파요. 그러니 밥을 더 달라고 했죠. 살찐다고 안 줘요. 부인한테 더 달라고 해도, 성재 형이 못 주게 해요. 그렇게 바깥에도 나가지 못하고 2년을 살았어요. 같이 살던 태호 형은 내가 씻겨주고 대변 누면 치워주고, 소변 빼달라고 하면 해주고 그것도 하고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소변을 통에다 누는 걸 보고 성질을 있는 대로 내요. 전에도 계속 소변통에 소변을 봤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무안으로 내려와서 아버지가 한 번씩 다녀가셨어요. 아버지도 안 되겠다 판단을 했던지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있던 태호 형도 지금 나가지 않으면 못 나간다고 빨리 나가라고 하고요. 그래도 그땐 바로 나가겠다는 말 못 했어요. 마지막으로 성재 형을 믿어보고 싶었어요. 신의란 게 있잖아요.”


대전 기숙학교로 분리될 때부터 아무도 인기 씨에게 선택과 결정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인기 씨도 그건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막상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인기 씨는 망설이고 지연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제가 있는 동안 성재 형 부인이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을 때까지 우린 몰랐어요. 하루는 부인이랑 어딜 갔다 오겠대요. 다음날 아이를 안고 와요. 의아했죠. 임신했다는 말도 없이 열 달을 있다가 애기 낳으러 가는 날 애기 낳으러 갔다 올게, 그 한 마디만 던져놓고 하루만인가 왔어요. 사람이 사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말을 하면 축해해 줄 수도 있고 둘이 돈을 모아서 선물도 해줄 수 있는 거고……. 결국 성재 형한테 그 여자도 나중에 버림을 받았대요.”


사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인생이란 상처 받는 과정이니 너그럽게 상처를 지고 가야 한다는 ‘말씀’도 있지만 인기 씨가 바라는 사람 사는 세상은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는 것이다. 인기 씨가 대전 기숙학교에 다닐 때였다. 어머니는 그때 담배를 피우셨다.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 당하던 인기 씨 어머니는 가슴앓이를 달래기 위해 담배를 태우셨다.


“눈치가, 엄마가 돈이 없어서 담배를 못 사 피우시는 것 같아요. 나도 그땐 집에서 용돈을 받아서 쓰던 때인데 누굴 시켜서 솔을 한 갑 사와서 드렸어요. 나쁜 놈이죠, 좋은 것도 아닌 걸 사다드리고. 어머니가 돈도 없을 텐데 이런 걸 사다주냐고 고맙게 피우시겠다고 했어요. 어머니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참 한결 같았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꼬깃꼬깃 아껴두었던 7만 원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인기 씨 기숙사비로 쓰라는 것. 유언 같은 그 이야기를 인기 씨는 잊을 수 없다. 입관 때 보았던 어머니의 시퍼런 멍과 함께. 죽기 직전까지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한 거 같다고 힘들게 말하는 인기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땐 울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렇게 살게 해 주신 은혜는(아버지는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마련해 주셨다) 감사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학대는 용서할 수 없다면서.


인기 씨가 나간다고 하자 성재 씨는 2003년 봄까지 있어 달라고 했다. 이미 인기 씨는 체험홈으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다려주고 싶지 않았다. 재차 이야길 하자 각서를 가져오라고 했고 각서를 주고받은 후 인기 씨는 성재 씨와 악연을 끝냈다. 인기 씨는 2009년 KBS 시사프로그램 <추적 60분>에서 성재 씨를 보았다. 한 목사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지적장애인을 학대하는 종사자로 TV에 출연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시설장이 되지 못하고 인권침해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인기 씨는 무안을 떠나 체험홈으로 갔다. 아버지가 우연히 길에서 인기 씨의 대전 기숙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가 체험홈이란 게 있고, 인기도 거기 갈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온다. 체험홈에서 살 때부터 주택청약저축을 들기 시작했다. 체험홈에서 만난 지인으로부터 청약저축을 2년 동안 들면 임대아파트 1순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3년에 한번 떨어지고 2004년에 당첨되었다.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이라고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홍천 시설에서 나와서 7년 만에 인기 씨는 서울시 중계동 14평 임대아파트의 세대주로 독.립.하게 되었다.


집을 줄까? 결혼할 배우자를 줄까? 만약 하느님이 인기 씨에게 단 하나의 행운을 준다면 뭘 택하겠어요? 인기 씨는 지금처럼 장애인이고 시설에서 막 나온 상태에요, 질문을 해봤다. “당연히 집이죠. 집이 있어야 결혼도 하잖아요!” 인기 씨는 서슴없이 집이라고 대답한다. 저소득 비혼 여성인 나에게 하느님이 묻는다 해도 인기 씨와 같은 대답이다. 인기 씨가 임대아파트를 얻은 2004년, 서울에서 10평 정도의 아파트를 2~3천만 원 전세로 10년 동안 살 수 있는 기회는 ‘억세게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전부터 서울시민에게 임대아파트를 제공하는 SH공사가 중형 장기전세주택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서울시 소형임대아파트 당첨은 ‘억세게 좋은 운’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기적’이다. 살만한 집에서 사는 것이 인권이라면, 국가가 인기 씨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소형임대주택을 보장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며 뒤로 미룰 일도 아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에 의하면 정부는 2009년 3조 원을 들여 아파트 미분양 물량을 매입하고 대형건설업체에 자금을 공급했다고 한다. 대부분 분양용, 매매용, 투기용일 뿐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주택이 아니다. 이 거대한 공적자금이 부동산 거품 경기를 살리지도 못하고 있으니 더욱 한심한 노릇이다. 팔리지 않는 빈 집이 늘어날수록 기업과 가계, 국가의 부채는 늘어나고 거리에 천막을 치는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늘어난다. 10평의 인권을 외면하는 국가의 나쁜 정책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참혹하게 희생되고 있다.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설에서도 낭만이 없었고 시설을 나와서도 낭만은 없는 거 같아요. 이러다 시설로 다시 가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놓친 몇 번의 경험이 그를 많이 외롭게 했다. 게다가 몸은 갈수록 굳어져(뇌병변 장애인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밥도 혼자 먹을 수 없다. 탈시설 자립생활에 성공한 장애인 활동가 신인기, 이제 다른 이들의 자립생활을 돕는 멘토 역할도 거뜬히 해내고 있는 그가 이 무슨 불경스러운 생각일까. 듣기조차 거북한 푸념이지만 이것이 그의 현실이다. 억세게 좋은 운도 10년이면 끝나고 그땐 갈 곳이 없다. 제 몸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장애인 자립을 보장하는 복지시스템의 정착은 더디기만 하다. 자립생활자의 나이는 복지를 기다려주지 않고 쉼 없이 흘러간다. 누구나 미래(노후)를 준비하는 것처럼 인기 씨의 ‘다시 시설’일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해 보인다. 자기결정권은 시설 장애인들을 자립으로 일으켜 세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자립한 지 7년, 다시 시설인가를 고민하는 그에게서 자기결정권의 우울한 현주소를 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고민은 시설 밖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1863년 미국 노예해방선언 이후 흑인들에게 자유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암살과 린치, 착취와 차별은 도처에서 지속되었고 극악무도한 짓도 많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은 노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투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상계동 임대아파트 20층.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흔 여섯의 한 남자가 베란다를 훑고 들어오는 선선한 봄바람 속에 앉아 있다. 풀을 누이기도 하고 일으켜 세우기도 하는 바람. 자유의 다른 이름. 신인기 씨는 외로워 보였고 자유로워 보였다.


사진 | 박김형준


<취재후기>
누구나 자기만의 방을 꿈꾼다. 예닐곱 살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가정이 그랬듯이 우리 집도 단칸방에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복닥거리는 생활을 했다. 작은 요 하나라도 잠자리를 구분해주면 그나마 다행. 나는 그 조그만 요때기에 누워서 하늘거리는 망사 커튼이 드리운 공주의 침대, 자기만의 방을 꿈꿨다. 상상이 너무 그럴 듯해 때로 잠을 설쳤다. 아마 그때부터 불면증이 시작되었나 보다. 자기만의 방은 비밀이었다. 어렸지만 그 꿈이 너무 철딱서니 없는 사치로 여겨져 누구에게도 선뜻 말할 수 없었다. 어린 몸에 스며든 세파가 꿈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게 했다. 서른 무렵, 꿈이 아닌 현실로 자기만의 방이 나를 독려했다.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 독립해야 한다, 독립이 자존이다. 삼십대를 통과해 사십대를 버티는 힘이 되었다. 잭 니콜슨이 그랬다,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신인기 씨가 인터뷰 말미에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건 다 관두고, 배필 될 사람 광고 좀 해주세요.”


사랑하는 사람까지 곁에 두면 인기 씨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까? 자족의 눈높이가 조금 더 올라간 모양이다. 아무렴 어떤가, 외로움에 끙끙거리는 것도 자유로운 자의 자유로운 번민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