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대자보를 붙이는 마음

몇 주 전부터 《사람》 사무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 서너 명이 찾아옵니다. 둘러앉아 회의를 합니다. ‘작은 음악회’라는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별로 음악적 조예가 깊어 보이거나 문화와 친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유서대필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20년을 맞아 하는 행사랍니다. 꽤나 시끌벅적 회의를 합니다만 그 모양새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 약간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1991년 5월 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죽음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김기설 씨의 유서를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였던 강기훈 씨가 대신 작성했으며 자살을 사주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로 한국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으며 큰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항간에 떠돌고 보수언론이 확대재생산하던 ‘죽음의 배후설’이 공안기관의 조작을 통해 ‘터무니없는 소리’에서 ‘그럴 법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기훈 씨는 자신의 무죄를 끊임없이 주장했고 유서의 필적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음에도 결국 그는 3년 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정한 발단은 김기설 씨의 죽음 이전, 1991년 4월 26일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촉발된 분신정국에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국면을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991년 그해 저는 대학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91년 5월’과의 인연은 대학생이 된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 우연찮게 시위에 참여하게 됐고, 바로 그날 성균관대생 김귀정 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 속에서 질식사를 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날 저는 거리로 쏟아져나온 무수한 대학생들과 함께 뛰어다니면서도 어쩐지 국외자가 된 듯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분신과 투신 소식,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란 김지하의 <조선일보> 칼럼,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씨의 시신을 빼돌리기 위해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오는 백골단의 사진, 저녁 9시 뉴스에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장면 등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20년, 팔팔했던 젊은이를 머리 희끗한 중년 사내로 변하게끔 한 그 세월을 떠올리자 저절로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되짚어지고 지금 선 자리를 둘러보게 됩니다. ‘91년 5월’로부터 서너 해가 지난 어느 날, 대학 학생회관 화장실. 아마도 ‘인권’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건 그때였을 겁니다. 소변기마다 붙어있던 A4 종이 한 장, 지금은 <인권오름>으로 바뀐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이었습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뭐, 이런 것도 있네.’하며 지나쳤던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십 수 년이 흐른 뒤 벌써 몇 년 째 인권잡지를 만들고 있으니 사람 사는 게 참 모를 일이지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이 2006년 1월, 《사람》이 생긴 지 반년이 지나서였으니 저로서는 이 잡지가 어떤 취지나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왜 하필 이름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했는지 그 속사정까지는 알 지 못합니다. 대학에서 브렌드 네이밍(Brand Naming)이라고 하는 상품 이름붙이기 수업을 들은 적도 있지만 이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저로서는 의견을 내봤자 묵살되었겠지만 아마도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냥 ‘인권잡지’라고 하자고 했을 겁니다. 잡지이름이 참 좋다는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하면 대개는 그게 무슨 잡지냐고 되물어옵니다. 그래서 “인권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권잡지’, 괜찮지 않나요? 다만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때문인지 간혹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다니는 줄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름까지 ‘인권잡지’면 더 헷갈릴 듯도 합니다.


《사람》을 창간하며 어떤 이는 인권현장을 취재하여 특종을 터뜨리는 시사지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깊이 있는 이론과 비평을 담은 전문지를 구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교양지가 됐으면 했을 수도 있지요. 월간으로 나오던 그 시절 《사람》에는 이러한 세 가지 지향이 그런대로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평택 대추리 싸움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인권활동가이자 재단 상임이사까지 겸직한 박래군 전 편집인과 달랑 저 하나뿐인 기자로 매달 거르지 않고 잡지를 내는 것만도 벅찼습니다. 원고를 청탁하고 취재하고, 취재한 내용을 기사로 만들다 짬을 내 다음호를 구상하고, 교정을 보는 와중에 기획회의를 준비하고. 그렇게 서른 세 권의 월간 《사람》을 낸 뒤 6개월의 휴식기를 거쳐 격월간 《사람》으로 개편한 데는 여기서 오는 피로감도 한몫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잡지를 만드니 여유가 생겨 좋기는 합니다만 격월간이라는 것이 참 어정쩡합니다. 휴간을 결정하고 나서 편집부에서는 아예 폐간을 하자는 안부터 인터넷 웹진으로 전환하자, 계간지로 만들자 등등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제작비용과 인력충원이 어려운 현실도 감안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권분야에서 정기적으로 나오는 종이 잡지 하나쯤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 현실가능하고 지속가능한 형태가 격월간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일간지에 인권담당 기자가 생길 정도로 제도언론에서 인권문제를 다루는 비중도 높아졌고 인권의 각 영역 별로 단체에서 발행하는 웹진이나 뉴스레터, 소식지도 많지만 좀 더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영역을 가로지르는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돌아보면 ‘사람에 주목하는 잡지’, ‘경계를 넘나들며 인권의 영역을 넓히는 잡지’, ‘다양한 시각과 상상력으로 인권운동과 만나는 잡지’라는 개편 당시 모토에 얼마나 부응하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말에 “뭇사람의 입은 쇠를 녹인다.”는 말이 있다. 고대 가락국이란 나라에서 군중들이 모여서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구지가’나 ‘해가’와 같은 고대가요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세상의 권력과 부와 언론 등을 장악하고 있음으로 세상에 하나 아쉬움이 없는 세력들로부터 외면당하고는 한다. ‘인권’이란 지팡이로 세상을 두드려 깨우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고 한 입으로 외치는 일에 《사람》은 모든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뭇사람의 입’이 되어 강철 같은 반인권의 현실을 녹여버리고 싶은 게 《사람》의 작지만은 않은 바램이다.



2005년 7월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서 뱉은 첫소리입니다. 바다 건너 나라의 어느 혁명가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말은 여러분의 무기인가요? 언제부터인가 “내가 쏜다.”는 말이 ‘한 턱 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총알이 돈의 은유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한편 섬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이 무기인 사람들과 말이 무기인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곳곳에서 점점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입니다.


잡지란 말은 근대 이후 서구에서 들어온 대다수의 단어들이 그렇듯 일본 사람들이 영어 매거진(magazine)을 옮기며 만든 것이지 싶습니다. 매거진의 어원은 창고를 뜻하는 네덜란드어의 ‘magazien’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편 영어 매거진은 잡지라는 뜻 외에 탄약고나 탄창이란 뜻으로도 쓰인답니다. 포토저널리즘에서는 사진을 찍는다는 뜻과 총을 쏜다는 뜻을 함께 가진 슈트(shoot)를 거론하며 포토저널리즘의 속성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잡지는 좀 더 넓고 긴 시공간을 향해 던져지는 그물 같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르는 물건을 이것저것 주워 담아 차곡차곡 제여 놓는 일 같기도 합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1894년 반유태주의의 광기를 등에 업고 무고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몰았던 프랑스에서 소설가 에밀 졸라가 신문에 기고한 「나는 고발한다!」의 한 대목입니다. 졸라는 이 글로 인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영국 망명길에 올랐야 했지만 그로부터 7년 뒤 드레퓌스는 재심을 거쳐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무수한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가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혹독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2007년에서야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으며 아직도 대법원에서 재심결정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화장실 소변기 위에 붙은 <인권하루소식>을 무심히 읽어가던 그 무렵 워낙 악필인데다 특히 매직글씨는 지독하게 못 쓰던 제게 주어진 일은 다른 이들이 밤새도록 써놓은 대자보를 새벽녘 교정 곳곳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임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자보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팩스로 들어온 <인권하루소식>을 복사해 화장실 칸칸마다 붙이던 이의 마음도 그랬을까요? 쉰 번째 《사람》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50이란 숫자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때의 심정, 그 마음만은 잃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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