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춤추는 별과 시 쓰는 하마

탈시설 장애인 김탄진, 장애경 씨

내리네
우리내 마음에
천사의 꽃이
내리네

그대여
우리가 그때 약속을 했지
천사꽃이 내리면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 김탄진 <천사의 꽃>


춤추는 별

별은 특별하다.

생이 주어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줄곧 춤을 춰왔다. 왼쪽 뒤편으로 살짝 기울어진 머리가 살랑댈 때, 그녀의 몸도 함께 들썩인다. 몸 안쪽으로 비틀린 오른 팔, 엄지와 검지가 연신 서로를 비벼댄다. 속살을 까집는 아픔에도 그들의 애무는 끝나지 않는다. W자로 앉은 다리, 비록 맘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만 그녀의 춤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뿌리임에는 틀림없다. 생의 배터리가 닳기 전까지 그녀의 춤은 멈추지 않는다. 자동인형처럼 경직과 이완을 반복하는 그녀의 몸은 고통을 달래줄 약을 필요로 하지만, 숙명처럼 주어진 이 모든 불편함과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사랑을 꿈꾼다.

1964년 가을 춤추는 별, 장애경 씨는 뇌병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4남매의 맏이인 그녀는 첫 아이에 대한 부모의 푸른 꿈을 한숨으로 바꿔버렸다. 부모는 아픈 아이를 안고 업고 병원이며 무당집이며 가리지 않고 거리를 헤맸다. 하지만, 아이의 젖살이 늘어갈수록 부모의 희망은 그만큼 옅어져 갔다.

“엄마가 임신해서 여름에 친구들과 골목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새댁, 뭘 좀 봐줄까?’ 물어보더래요. 이 할머니가 손금을 한 번 보더니 이 애가 아들이면 다행이고, 크게 해먹고. 딸이면 안 좋게 태어난다고 했대요. 어머니는 새댁이니까 모르지. 처음이니까.”

곧 동생들이 태어났고, 연탄공장에 다니던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를 사고로 잃게 된다. 동생들과 뒤섞여 뒹굴던 짧은 어린 시절이 지나자 동생들에게는 새 친구들이 생겼다. 그녀에겐 집 그늘 속에 혼자 앉아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아버지는 청소미화원이라는 고된 일로 늘 지쳐있었고, 어머니 역시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살가운 대화를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가족 외출에서 혼자 빠지는 것에 아파하지 않을 만큼, 아니 아픔에 무뎌질 만큼 어느새 몸도 마음도 커져버렸다. 집 안 깊숙이 파묻힌 낡고 오래된 가구처럼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그녀는 알았다.

1989년 그녀 나이 스물일곱, 그녀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시 쓰는 하마

하마는 특별하다.

하마는 열일곱에 시를 짓기 시작했다. 세상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한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시가 되었다. 하나의 시어가 글자의 형태를 갖기 위해선 온몸의 세포들이 긴장해야만 했다. 자판 하나를 치는 것이 그에게는 전신운동이나 마찬가지다. 한 자 한 자 모니터에 새겨둔 그의 시는 다른 이의 도움으로 노트에 옮겨진다. 그의 노트엔 인연에 따라 만난 각기 다른 사람들의 필체로 적혀진 시들로 가득하다.

남들은 말을 하네
내가 입이 있어도
노래를 못 한다고 그러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노래를 얼마나……
- 김탄진 <나의 노래>

1971년 하마 나이 아홉 살, 엄마와 함께 간 극장 나들이는 특별했다. 공장에서 옷을 짓던 엄마는 늘 바빴기에 그는 아버지와 할머니 손을 더 많이 탔다. 엄마 등에 얼굴을 기대고 시내를 구경하는 것은 눈깔사탕만큼이나 달콤했다. 극장 앞에 도착하자 엄마는 잠시 일을 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실, 기다리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린 아홉 살 하마는 이제 마흔셋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아픔은 여전히 가슴 깊숙이 쓴 뿌리가 되어 남아있다.

산 매장된 채 죽음을 기다리던 시설생활

스물일곱에 의정부에 위치한 재활원에 새 둥지를 튼 별은 10년만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집에서 못한 운동과 공부를 하면서 미래를 준비한다면 그녀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목사 부부가 운영하는 재활원은 처음 이야기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돼지축사를 개조해 만든 시설은 둘째 치고, 50명 식구들을 책임지는 사람은 목사 부부와 딸 그리고 아줌마 둘에 공익근무요원 둘이 전부였다. 시설에 묵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지적장애를 갖고 있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일 년에 단 한 번 소풍가듯 가는 기도원이 세상 구경의 전부일 만큼 시설은 그녀에게 산 매장된 채 죽음을 기다리는 무덤과도 같았다.

“토요일마다 성경공부 했어요. 다른 것도 배웠는데 그게 길게 못 가더라고. 길게 해야 되는데. (다른 애들이) 머리가 안 되니까 하다가 그만두고 하다가 그만두고. 만날 가르치다가 포기해 버리고. 그냥 ‘먹고 똥이나 싸라!’지. 내일도 오늘, 모레도 오늘. 매일(이) 오늘이니까. 발전이 있어야지.”

그녀가 재활원에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땐 그녀와 같은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열악한 재활원 생활에 그들은 다른 시설을 찾아 하나 둘 떠나갔다. 이야기 나눌 사람들이 있었을 때는 그나마 말 섞는 재미라도 있어 시설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2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봉사단이 와서 목욕도 시켜주고 했어요. 봉사단이 안 오면 지능이 낮은 애들이 우릴 도와주고. 뭐 이런 거죠. ‘내 몸 좀 들어라. 밥 가져달라.’ 근데 바가지 가지고 오라고 시키면 전화기 갖다 주고. 말도 안 통하니까 싸우기도 하고.”

몸은 성하지만 지능이 낮은 친구들은 그녀의 몸이 되어주었고 그녀는 그들의 머리가 되어주었다. 장애를 가진 이들을 돌봐 줄 전문적인 활동보조인 하나 없는 시설에서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신체 장애인들이 지적 장애인들을 부려먹는다고 타박을 주곤 했다. 시설장으로서 제대로 된 시설과 인력을 갖추지 못한 자신의 무능과 부도덕함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약을 먹잖아요. 그러면 머리가 없으니까 한 번에 한 통을 다 먹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 걸 옆에서 챙겨줘야 해요. 몸을 못 움직이니까,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죠.”

당시 재활원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 가족과 일하는 아줌마가 퇴근하면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밤에 일어날지 모를 사고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원장은 그녀에게 핸드폰을 주었다.

“재활원에서의 생활, 기억 남는 것도 없어. 거기서 고통을 너무 받고 살아서인지 남은 건 없어.”

몇 장 안 되는 사진은 그곳 생활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실용미가 전부인 짧은 커트머리, 버려진 옷들 속에서 찾아낸 옷가지들로 이뤄진 제멋대로 패션, 방바닥에 놓인 식판, 하지만 사진 속 그녀는 늘 웃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손님들이 원하면 그녀는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무덤 같은 일상 속에서 그나마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야 억지웃음이라도 웃을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난 좋았어. 재미있잖아. 얘기도 하고. 근데 탄진 오빠는 싫었대요.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고. 손님들 오면 원장이 옆에 지켜 서있어요. 우리가 시설에 대해 무슨 소리 할까봐. 평소 우리끼리 모여서 얘기할 때도, 니들 무슨 얘기냐며 괜히 참견하고.”

원생들에게 시설 얘기를 들은 방문객 중에는 원장을 찾아가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수록 원생들을 바라보는 원장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졌다. 어느 날, 원장은 원생들에게 일을 제안했다. 비닐 롤백 포장 하나에 10원.

“비닐 롤백 포장을 하면 하나에 10원씩 받는데, 그 돈도 주지 않았어요. 하나 포장하는데 2분? 6개월 하다 그만뒀어. 한 박스에 300원인데 집중을 하니까 마음은 안정되더라고. 없으니까 갈등이 오고.”

갈취당한 노동에 분한 마음이 더 클 것 같았지만 별은 오히려 일에 집중하느라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좋았다고 한다. 분노마저 잠재울 수 있는 그 절망의 크기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동생들 결혼식도 한 번 못 가봤어요. 나중에 들었을 뿐이지. 구정이나 추석이나 집 잔치는 데려갈 줄 알았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 거의 다 안 데려가더라고요. 부모님 돌아가셔도 안 데리고 가고. 그래도 내가 못 가니까. 처음에는 원하면 (재활원에서)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어. 기도원이나 단체로 한 번씩 가요. 나들이 겸 그나마.”

목사 부부는 원생들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기초수급비와 장애수당 전부를 자신들의 몫으로 챙겼다. 신앙을 팔아 제대로 장사하는 법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부모들이 원생에게 준 용돈을 2천 원짜리 시계를 사다가 4만 원에 파는 등 여러 구실과 명분을 내세워 뺏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시설에서 나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편찮으시기 전, 1년에 두어 번 시설을 찾았던 아버지는 집에 한 번만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면담 내내 옆에 지키고 앉아있는 원장 때문에 속내를 말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존재의 이유

별이 하마를 처음 만난 건, 짧은 사랑이 지나간 직후였다. 함께 시설에서 생활하던 한 남자에게서 그녀는 사랑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미처 싹눈도 틔워보기 전에 그 사랑은 끝나고 만다. 사랑고백을 받은 지 두 달 뒤 처음 맞는 설이었다. 명절을 쇠러 본가로 떠난 그를 별은 다시는 보지 못했다.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던 남자의 밝은 미소가 마지막 인사의 전부였다. 한참 뒤 교회 집사님이 그의 소식을 전해줬다. 그가 부모에게 별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고, 그 일로 그의 부모가 원장에게 항의전화를 했다고 한다. 장애인들끼리 연애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장애인에겐 사랑도 죄가 된다는 것을 별은 그때 처음 알았다. 1996년 서른셋, 그녀는 무덤 같은 시설생활에서 아무런 삶의 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하마, 김탄진 씨가 그곳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강원도 요양원에서 생활하던 하마가 별이 살고 있는 재활원에 왔다. 원장은 하마가 시를 잘 쓴다는 소개에 이어 별에게 하마의 입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하마는 그 제안이 싫었다. 그 역시 방금 막 사랑의 열병에서 헤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두 번의 사랑 끝에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그의 별, 장애경 씨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하마는 별과 같은 뇌병변장애로 혼자서는 밥조차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매우 예리하고 자신감이 묻어났다. 한 번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하고야마는 뚝심이 있었다. 하마는 무료한 시설생활에 활기를 가져왔다. 그는 보치아 대회(장애인올림픽 종목 중의 하나로, 선수들이 공을 경기장 안으로 굴리거나 발로 차서 보내 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던진 공에 대하여 1점이 주어지는 종목)에서 메달을 딴 경력을 갖고 있었다. 목사의 허락으로 지적 장애가 없는 친구 대 여섯 명이 모여 교회에서 매일 4시간씩 연습을 했다. 일차 목표는 1년 후 있을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와는 상관없이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행복했다.

“온 지 3개월 지났을까? 하루는 연습을 하다가, 날 갖다가 찍었는지 ‘친구가 돼줄 수 없냐?’고 묻더라고요. 관심이 있는지 몰랐는데 보치아를 하면서 매일 얘기하다 보니까. 기분이 그래서 ‘생각 좀 해보겠다.’ 그랬는데……. 거기는 한 집이니까 매일 보잖아요. 생각해봤냐고 계속 물어보니까, 3일 정도 있다가 ‘친구 해 주겠다. 가만히 좀 있어라.’ 그랬죠.”

별은 미처 말이 되지 못한 하마의 소리를 세상에 전해주는 입이 되었고, 하마는 별이 쏟아내는 이야기 중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정들어 갈 무렵, 경기도 삼육재활원에서 열린 보치아 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같은 하늘이건만 유독 그곳의 하늘은 빛났다. 3박 4일로 치러진 대회에서 그들은 예선 탈락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오랜 기간 훈련된 어린 친구들과는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았다. 결과에 큰 미련이 없었음에도 별은 그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표란 걸 가져봤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이란 걸 해보았다. 그 날 별의 울음 속엔 엄마의 자궁을 막 벗어난 아기의 울음처럼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깊게 묻어 있었다.

경기 마지막 날, 별과 하마는 대회에 참가한 친구들과 함께 외출의 마지막 밤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친구들은 목청껏 노래를 뽑아냈다. 이제 막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가 시작됐다. “…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

그 순간, 하마는 알았다. 별은 자신에게 존재의 이유 그 자체라는 것을. 하마는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별을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했다.

몰래한 사랑

모두가 잠든 새벽 한 시, 별과 하마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휠체어에 오른다. 부엌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교회가 그들이 즐기는 유일한 데이트 코스다. 목사 부부가 시설 내 연애를 못마땅해 했던 것을 알았던 그들이기에 몇몇 친구들의 묵인 속에서 몰래 사랑을 했다. 하마는 주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여자 원생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 주도면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교회였대요. (김탄진 씨에게 되물으며) 비가 왔어? 겨울인데 비가 왔대요. 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오빠는 다 기억하네. 첫 키스였어요, 전, 오빠는 세 번째고. 그때는 아무 생각 없었어요. 목사님이 가끔 밤에 안을 들여다보니까 겁도 났고.”

손을 섞고 혀를 섞고 이제는 몸을 섞을 일만 남았다.

“(수줍게 웃으며) 남자 방에서. 저녁 7시면 다들 텔레비전 보려고 거실로 나오니까. 남자 방에 컴퓨터가 있어요. 오빠가 컴퓨터를 잘 하니까, 컴퓨터 배우고 온다고 하고 가는 거죠. 가끔 낮에도 하고. (김탄진 씨에게 되물으며) 커피? 맞다. 다들 커피 좋아하니까. 자판기가 있어서, 200원인데, ‘커피 마실래?’ 꼬시기도 하고. 또 애들이 눈치는 빠르대요. 원장을 엄마라고 부르고 목사님을 아빠라고 하는데, ‘엄마, 나갔어. 아빠, 나갔어.’ 알려주기도 하고.”

그렇게 6년 세월이 지났고, 이들의 몰래 사랑은 어느새 모르는 몇 명만 빼고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하나님하고만 결혼하래요

2008년 겨울, 드디어 하마가 일을 치고 말았다. 하마가 원장에게 별과 결혼할 수 있게 허락만 해준다면 재활원에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별과 하마의 관계를 의심하고 집요하게 꼬투리를 잡아 괴롭혔던 교회 집사가 있었다. 그이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수시로 교회에 드나들며 별과 하마를 괴롭혔다. 집사의 우울증세가 좀 더 가벼웠다면 이런 사단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아니다. 올 때가 됐으니 오고야만 것이다. 하마는 용기를 내 원장을 찾아갔다.

하마의 당돌한 말에 원장은 기가 차는 눈치였다. 무조건 안 된다는 원장에게 하마는 그 이유를 되물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하고만 결혼할 수 있다.”

하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자식인 그녀 역시 사람과 결혼을 했고, 또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서둘러 짝을 찾으라고 종용하지 않았는가. 왜 장애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만 결혼해야 하는 거지? 하나님과 결혼하면 달콤한 입맞춤은 어떻게 할 수 있지? 결혼식은 하늘나라에서? 섹스는? 또 아기는 어떻게 낳지? 아기를 낳는다면 도대체 남자인 내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기의 이름은 ‘예수 2세’로 지어야 하나? 이 모든 질문에 하나님은 무슨 대답을 해주실 수 있을까?

“나도 답답해서 더는 못 있겠어요. 삶이 뭐가 있어야 하는데, 못하게 하니까. 나이는 먹어가지,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나가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둘이 못 나가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오빠부터 가라. 오빠부터 간 다음에, 그 뒤에 날 빼가라 그랬지요.”

감시가 시작됐다. 단체 생활을 하는 그들이기에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모든 것이 함께였다. 목사 부부는 한 순간도 별과 하마가 함께 있는 꼴을 볼 수가 없는지 이들을 들볶기 시작했다. 이 모든 시달림에 별과 하마도 자주 다투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말리다 못한 원장은 별의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부모님이 함께 시설을 찾았다.

“‘너도 몸이 그런데 똑같은 장애자면 어떡하냐? 한 사람이라도 걷던지 해야지, 이 사람은 안 되고 죽어도 반대다’ 그러시고. 또 오빠한테는 ‘애경이랑 같이 시설에서 나가면 가만히 안 놔둔다’고 그러셨죠. (김탄진 씨에게 되물으며) ‘애경이 건들면 죽인다’고 했다고?”

격분한 아버지와 하마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별이 그곳에서 죽기 전에는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엄포를 남기고 가버렸다. 이 문제로 시설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 지적장애가 있는 친구들은 아무 생각 없이 원장이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하며 시키는 대로 그들을 감시했다. 별의 부모님 반대로 함께 나오는 것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하마는 먼저 시설을 빠져나와 살 궁리를 하기로 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장애인 탈시설 운동을 하는 단체와 연결됐다. 하마는 가족 없는 무연고이기에 생각보다 쉽게 나올 수 있었다. 2009년 5월 14일, 하마는 광진구 아차산 근처 체험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을 총동원해 별을 빼올 방법을 강구하느라 하루하루 애가 탔다.

“갈 때, ‘널 도와주겠다’ 했어요. 기대 많이 했어요. 그래도 (오빠가) 가고 나니까 마음이 이상하더라고요.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걱정이 돼서 잠도 안 오고 그러더라고요. 간 지 한 달인가, 6월에 핸드폰을 사서 보냈어요. 몰래몰래 전화를 했어. 그때 마음이 안심이 되고. 나오기 직전 7월 27일 밤에 전화기를 뺏기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사랑하는 애경에게

애경아 안녕!
나도 잘 있어.
하지만 너가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내가 너한테 약속을 했지. 그래서 기다려.
나는 꼭 내년에는 너를 데리고 꼭 나올 거야.
그때까지만 나를 믿고 기다려 알았지?
500만원만 이…….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애경아 나는 니가 보고 싶고 그리고 너를 사랑해.

그리고 7월 20일 날에 꼭 기도원에 갈 거야.
그때 우리 만나자. 나는 너를 사랑해 너무나 보고 싶어.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해.

그리고 6월 14일 날 내 친구한테 핸드폰을 보내 줄게.
비밀번호는 5259.
하지만 애경아, 원장님하고 목사님하고 비밀이야.
- 너를 사랑하는 애인 탄진이가

2009년 7월 27일, 별의 가슴은 아침부터 요동쳤다. 하마가 재활원을 떠난 지 두 달, 몸 속 깊이 숨겨둔 핸드폰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하마와 단체 활동가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만나러 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별은 자신도 모르게 오늘 핸드폰을 뺏길 거라는 말을 그들에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연하게도 목사는 그녀의 핸드폰을 뺏어갔다. 그 순간, 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중히 모아놨던 편지며 사진들을 찢어버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날 죽으려고 했는데……. 어깨가 아파서 약을 먹어요. 그거 모아놓은 게 있었어.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죽으면 뭐해. 병원 데려가서 다시 살릴 것 같은데. 자기네가 책임져야 하니까 살리겠지. 나가서 죽나, 여기서 죽나 그게 그거다 싶어,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 거지.”

밤 10시.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 별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한 순간, 그녀는 바닥에 뉘여 있던 다리를 세웠다. 어둠을 받치듯 그녀의 발바닥이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무릎으로 기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 없는 길을 기었다. 머리는 백지처럼 텅 비어 무서움도 없었다. 반바지 아래 무른 살이 돌에 찢기는 것도 몰랐다. 두 팔을 뻗어 땅을 짚고, 무릎으로 엉덩이로 그 거리만큼 좁히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아픈 줄도 몰랐고. 탈출해야 한다는 것밖에.”

그러다 한 아줌마를 만나게 됐다. 차가 다니는 큰 길까지만 데려가 달라고, 아니면 택시라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아줌마는 차를 부를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릴 새도 없이 별은 다시 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차 안에서도 별은 서울까지만 데려다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경찰서에 도착한 시간이 밤 12시였다. 잠시 후 재활원 목사 부부를 포함해 네 명의 사람들이 별을 데리러 왔다. 그들을 본 순간, 별은 저승사자를 만난 사람처럼 울고 불며 가지 않겠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왜 여기 있냐,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묻고. ‘갈 때 가더라도 우선은 재활원에 가서 내일 아침에 보따리 싸서 보내주겠다.’고도 하고. 자꾸 옆에서 그러니까 경찰 아저씨가 ‘애가 싫어하는데 왜 옆에서 자꾸 그러냐?’고 하시더라고요.”

별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재활원 측은 누명이라도 벗겨 달라며 아버지에게 전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원장이) 네 아버지한테 누명이나 벗겨달라고. 누명이 뭐냐고? 아버지랑 통화를 했는데, ‘네 마음대로 해’라고 그런 거야. 내 마음 대로 한다고 했지. 내가 또 거기서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네 마음대로 해.” 비록 홧김에 뱉은 말이지만, 경찰관은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해 별을 재활원으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다. 재활원 식구들이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서울에서 온 장애인 탈시설 운동단체의 활동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 4시, 활동가를 따라 별이 도착한 곳은 서울 혜화동에 있는 ‘평원제’라는 곳이었다. 한 독지가가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돕기 위해 마련한 보금자리인 평원제, 넓고 깔끔한 그 공간에 그녀는 혼자였다. 그 순간, 세상에 온전히 혼자임을 느낀 바로 그 순간, 별의 가슴엔 들뜬 기쁨과 함께 두려움이 찾아왔다.

우리 결혼했어요, 하지만

별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둘러 혜화동 집을 나선다. 지하철이 붐비는 출근시간을 피해 9시만 되면 전동휠체어를 몰고 거리를 달린다. 하마가 머물고 있는 아차산까지 가려면, 휠체어 앞바퀴가 전동차 사이에 끼거나 리프트에서 나는 음악 소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받는 수고로움 정도는 참아주어야 한다. 때론 지하철 역사의 내부 공사로 한 번 갈아탈 거리를 두 번 세 번 갈아타기도 하고, 때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길을 막는다며 성내는 막무가내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순간 속상해도 그건 별에겐 순간일 뿐이다. 사실 그런 건 하마의 존재에 비하면 별스럽지 않은 문제에 불과하다. 지난 2월, 100년만의 폭설을 고스란히 머리에 이고 별은 하마를 만나러 매일같이 길을 나섰다. 두꺼운 양말 두 겹 껴 신고, 우산 대신 우의를 걸친 채 눈 속을 뚫고 달렸다. 별의 이런 행동은 때론 하마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원성을 사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보기 좋고 그럴 때도 있고. 누나가 힘들어 보일 때도(있고). 떨어져 있다가 서로 같이 있으니까 매일 있고, 보고 싶을 때 보면 되는……. 저도 그런 상황인데, 한 달 반 두 달에 한번 봐요. 여자 친구가 지방에 집이 있는데. 그래서 보고 싶을 때도 못 볼 때도 많고. 찾아가지도 못할 때가 많아요. 싸울 때 보면 진짜 복에 겨워서 놀고 있다! 탄진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 같이 옆에 있는데 뭐가 문제냐? 사소한 것 갖고 이 형이 고집을 세워서. 매일 안 봐도 될 걸. 안 보면 정이 새록새록(생길걸). 안 보면 죽겠다고 난리를 쳐요. 성질을 내더라고요.”

이들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동생은 부러운 마음을 실어 하마에게 타박을 놓는다. 복 많은 남자 하마는 이들의 장난어린 질투에 입을 한껏 크게 늘려 허허 웃고 만다. 속이 썩어 들어가도 웃는, 그래서 별은 그를 하마라고 한다. 사실 별과 하마는 2009년 9월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다. 수급비와 장애수당 합쳐 58만원 받는 돈 중 20만원씩 적금을 붓고는 있지만 알몸으로 시작한 시설 밖 생활이기에 모아둔 돈이 적다. 결혼식 역시 집장만 이후로 미루었지만 오랜 기간 이들을 지켜보았던 집사님의 도움으로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결혼사진을 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부케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무겁더라고요. 가벼운 줄 알았는데. 자리 잡으면 이것(액자)도 해놔야지. 화장하고 피곤해서 몸도 뻣뻣하고.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손이 부었는지 (반지가) 잘 안 들어가더라. 중간 마디까지 대충 끼고. 근육이 뭉치니까. 돈 때문에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집사님한테 맨날 졸랐나 봐.”

교회의 도움으로 치러진 결혼식에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별의 부모님은 하마가 재활원을 나간 후 이 둘의 관계가 끝난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별은 가족 없이 치룬 결혼식의 쓸쓸함을 하마의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달랬다. 하마는 지금 당장이라도 별의 부모님을 만나 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별은 선뜻 용기를 내지 못 한다.

“집이 되면, 살림 같은 것 해놓고 정리가 된다면 한 번 만나든지,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금 만나봤자 얘기가 부모님 귀에 안 들어가고. 남동생 둘 있잖아요. 걔네 둘이 힘이 있으니까, 때리기라도 할까봐 제일 걱정되더라고. 때리려고 들면 누워서 떡먹기잖아요. 그게 걱정이 되더라고요. (울먹이며) 우리보다 젊으니까. 맞으면 어떡하냐고 하니까 (오빠는) 맞아도 괜찮다고.”

둥지 없는 신혼부부

아차산 역에 도착한 별은 전동휠체어 속도를 올린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보고 싶은 마음은 더 커지기만 한다. 큰 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났다. 하마를 위해 별이 우유를 배달시킨 인연으로 알게 된 아줌마다. “오늘도 출근하셨네요.”라는 말로 아줌마가 인사를 대신한다.

별이 사는 평원제에 비해 하마가 사는 체험홈은 주거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건물 벽에 붙은 작은 현관을 들어서면 어둠 속에서 전동 휠체어 네 대가 먼저 그녀를 맞는다. 환한 거리를 뒤로하고 동굴 같은 어둠 속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네 명의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씩 인사를 전한다. 남정네들만 사는 곳에 여자가 들어서는 것이 불편할 터인데도 이제 안 보면 서운할 정도로 정이 든 한 식구다.

“애틋해요, 마음이. (애경 씨가) 날마다 아침에 여기를 와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폭설이 와도 다 왔어요.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주거공간이 없으니까. 많이 딱하더라고요. 지난주에 (애경 씨가) 와서는 눈물을 펑펑 흘리는 거예요. 너무 속상해서. 같이 사는 동생이 왜 남자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냐고 해서……. ‘그거 조금 이해 못하냐’고 눈물을 흘리는데 저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가정이라는 것, 집이라는 것, 살아야 되는데 여건이 안 되니까…, 저 그 부분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둥지 없는 이들 신혼부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던 활동보조인 김영길 씨의 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사무소 복지사라는 사람들, 정말 짜증나요. 앉아서 펜대만 굴리지, 장애인 입장에서 뭐 하나 생각하지 않아요. 집 때문에 서류가 필요하면, 적어 주던지. 말로 ‘뭐 뭐 뭐 뭐 가져와라’하고. 장애인들이 필기를 할 수 없으니까 금방 까먹게 되잖아요. 그러면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지 몰라요. 그런 것 하나 부터가 속상하고, 혐오감 느껴요.”

속 시원히 쏟아내는 그의 말에 방 안은 금새 웃음바다가 되었다. 심지어 그를 국회로 보내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김영길 씨처럼 진정성을 가진 사람이 국회에 가면 장애인 주거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감정인 사랑마저 장애인에겐 죄가 되는 현실에서, 아무런 사회적 노동을 하지 않는(정확히 사회적 노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장애인들의 주거문제는 사회적 낭비일 것이다. 그럼, 해답은?

“죽는 사람이 한 두 명은 나와야지.”

누군가의 말에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별과 하마는 3시면 혜화동에 있는 노들야학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얼마 전까지 야학과 가까운 평원제에서 저녁을 먹던 그들이지만 별과 함께 사는 동생이 불편함을 얘기한 뒤로 그들은 도시락을 싸서 곧장 학교로 간다. 방송통신대학교와 마로니에 공원 사이 길에 위치한 노들야학, 그들에게 세상을 향한 다양한 창문이 있음을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수업은 7시부터 시작해 10시에 끝난다. 주말과 수요일을 빼고는 매일 수업이 있지만 요즘은 검정고시 시험을 대비해 수요일도 나가 공부를 한다. 별은 중등검정고시, 하마는 고등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하마는 기회만 된다면 컴퓨터 프로그램 공부를 더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별과 하마의 긴 하루도 끝이 난다. 짧은 이별식을 거친 후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또 다시, 봄은 왔다

봄바람이 겨울바람보다 매섭게 느껴지는 건 절기에 앞서 사람 마음에 먼저 봄이 피기 때문일 거다. 마음 속 봄은 이미 새순을 트고 꽃망울을 터트린 지 오래지만, 애꿎은 날씨의 연속행진에 사람들은 봄의 기대를 이상기온에 대한 원망으로 바꾸었다. 찌뿌등한 하늘에 때때로 추적한 눈비를 뿌려대던 2010년 3월 25일, 별은 서둘러 아침을 챙긴 후 거리로 나섰다. 11시까지 모여 집회 장소를 지키라는 호출에 느린 몸을 몰아야 하는 마음이 더 바빴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봄바람에 거리의 사람들은 옷 껍질 속으로 잔뜩 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추위에 자라목을 하고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 틈으로 별은 전동휠체어를 몰았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주최가 된 이번 집회는 보건복지부가 자리한 안국동 현대사옥 앞에서 이루어졌다. 200명 남짓한 사람들 대부분이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는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활동보조 서비스임에도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명목으로 장애인복지예산을 날치기로 삭감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전장연 소속 회원들이 1박 2일 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별은 오늘로 일곱 번째 집회 참석이다. 몇 달 전만해도 세상을 향해 장애인이 자기 목소리 낸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사람들의 냉소와 내 안의 깊은 패배의식으로 흘려보낸 지난 40년 세월이 그랬다. 아직 낯도 설고 말도 설지만 별은 무대 위에서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 서로의 삶이 너무도 닮았기에, 그들의 말에 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정작 신이 난 건 하마였다. 주어진 삶만을 강요받던 장애인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투쟁은 불가피하다는 걸 삶을 통해 배워왔다. 집회는 육체적으로 피곤한 일이지만 정신적 위안은 크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다른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홀로 버려졌던 아홉 살 하마의 그 지독한 외로움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온기가 된다. 거센 바람에 눈이 시려 눈물이 흘러도, 그 눈물조차 자신의 손으로 씻어 내릴 수 없어도, 하마는 이런 집회가 좋다. 반면, 별은 젓가락처럼 마른 하마가 추위에 병이라도 날까 노심초사다. 집회 장소에서 멀지 않은 자신의 숙소에 가서 밤바람은 피해보자고 하마의 마음을 떠보지만 하마는 꿈쩍도 안한다.

밤이 깊고 깊어서야 별과 하마는 친구들의 체온을 이불삼아 잠이 들 수 있었다.


사진 | 박김형준



인터뷰 후기
인터뷰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장애경 김탄진 부부에게 신혼집이 생긴 것이다. 축하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장애경 씨가 먼저 걱정과 한숨을 토해낸다. 김포의 임대아파트는 교통이 불편해 이사하게 되면 그곳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익숙한 관계들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역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장애경 씨는 새로운 꼼수를 구상 중이다.
첫째, 김포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둘째, 혼인신고는 잠시 뒤로 미룬다. 셋째, 별의 주소지를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주소지로 이전한다. 넷째, 새로운 임대아파트에 발 빠르게 도전한다.
하지만 이도 쉽지만은 않다. 여기저기 주소지 이전을 부탁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알아보겠다는 말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 아차산에서 함께 생활하다 올해 4월에 김포로 이사한 동료의 안타까운 소식이 더욱 이들을 힘들게 한다. 중증장애인인 그는 턱 없이 부족한 활동보조 서비스 시간으로는 일상을 꾸려가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교통의 불편 때문에 활동보조인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애인 자립생활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약한 현실에서 이들에겐 매 순간이 시험이고 모험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중증 장애인의 삶을 엿본 나로서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유명한 노랫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당신은 시련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정말 장애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다. 장애라는 태생적 시련에 겹쳐 가족과 사회로부터 받는 시련까지 겹경사가 아닌 겹 시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강한 의지와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모든 장애인 분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