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박정희의 유산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1961년 봄.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 1950년대 서울 일대를 주름잡던 무소불위의 정치깡패 두목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깃발 아래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이들은 동대문시장 등 각종 상권을 둘러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정치권의 하수인으로서 정적에 대한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영화배우 성상납 등을 통해 권력의 비호를 받아왔다. 깡패들에게 법은 무의미했으며 그들의 활보는 일상의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생존권을 사치로 만들어 버렸다. 해방 이후 좌우익 테러와 한국전쟁 기간 학살의 공포를 경험한 인민들에게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전쟁의 폐허를 딛고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국가에 걸었던 기대를 포기하게끔 했다. 인민들은 며칠 전까지 자신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체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비아냥거림으로 만든 새로운 국가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1961년 5월의 봄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서울대를 비롯한 수많은 대학생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국가권력을 찬양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4월혁명의 기대와 달리 무능했던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을 뒤로 한 채, 한국전쟁 이후 가장 근대화된 조직인 군대가 국가를 장악한 것을 미완으로 그친 4월혁명의 종결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새로운 국가권력은 4월혁명 당시 이승만의 경호책임자이자 경무대 앞 발포명령을 내렸던 곽영주, 그리고 당시 내무부장관으로서 3.15부정선거의 주역이었던 최인규를 체포하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들은 정치깡패 임화수와 함께 그해 겨울 교수형에 처해졌다. 혁명의 적자였던 장면 정권도 하지 못했던 독재청산을 새로운 국가권력은 과감히 착수했던 것이다.



5.16 ‘혁명’, 조작된 신화가 아닌 받아들여진 사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흔히 아는 관변조직이나 보수 지식인의 쿠데타 찬양문이 아니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 최고의 지성교양지로 손꼽혔던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의 일부분이다. 박정희의 군사정변은 어느 누구에게도 반민주적 쿠데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1년 전 4월혁명의 열정과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제2공화국에 대한 처절한 실망에서부터 튀어나온 혁명적 과업으로 이해되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에 대한 당시 2천7백만 대한민국 인민들의 이해는 희망을 향한 용기와 확신에 찬 실천이었다. 그렇다면 2천7백만은 배고픔 속에서 똥과 된장을 구별하지 못한 우중(愚衆)이었을까? 박정희의 쿠데타는 그러한 어리석은 인민들 사이에서만 가능했던 한낱 신기루였을까? 쿠데타가 발발했던 그해 겨울, 남파 거물간첩 황태성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새로운 국가권력인 군사혁명위원회 수장 박정희와 접촉하면서 남북통일 협상을 모색하려 했던 북한의 전 무역부 부상을 역임한 황태성은 2년 수감 끝에 박정희가 민정이양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정희의 쿠데타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젊은 시절 박정희가 자신의 형, 남로당 지도자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던 황태성을 박정희와 접촉하기 위한 밀사로 쿠데타 발발 3개월 만에 남파한 것이다. 박정희의 군사정변을 쿠데타가 아닌 혁명의 종결로 이해했던 것은 비단 2천7백만 대한민국 국민들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줍잖은 교편생활 후 혈서로 황국신민 충성맹세를 하고 만주군 장교가 된 다카끼 마사오가 격변의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무혈 쿠데타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당시 대한민국 인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옷만 바꿔입으면서 민정이양을 후퇴시키고, 계엄령을 반복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 베트남 파병 등에 대한 사회적 저항에 무력탄압을 일삼는 독재자로 점차 변해가는 그였지만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은 오히려 전사회적 윤리로 전화되기 시작했다. 친미반공의 분명한 정치노선으로 혁명 후 정치적 혼돈을 안정화하면서 가장 먼저 박정희는 인민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했다. 당시 인민들의 공포의 대상은 거리의 불량배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장 커다란 공포는 자신과 가족을 쓰러뜨리는 반복되는 굶주림이었다.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민생고의 해결과 동시에 국가경제 재건을 쿠데타의 이유로 내건 박정희를 반대할 우중은 없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경험한 차별과 학대, 그리고 폭력의 공포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온 인민들에게 4월혁명은 하나의 희망이었으며 그 희망마저 사라진 인민들에게 구래의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자신들과 가깝다고 믿은 박정희의 출현은 절망 속 마지막 빛이었다. 집권 이후 경제의 비약적인 양적 성장과 강력한 전체주의적 사회통제는 인민들에게 충성만으로도 굶주림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결국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빈농 집안의 만주군 출신이자 동시에 좌익경력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박정희는 당시 영원한 어른이었던 윤보선을 1.5% 득표율 차이로 누르는 기적을 보여주었으며 4년이 지난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득표율의 차이는 10%이상으로 벌어졌다.



박정희의 유산-2천 7백만의 우중(愚衆)?


박정희는 한국 인권운동의 영원한 공공의 적이다. 그는 쿠데타 직후 반공법을 제정하여 반민주적 통치를 법제화했으며 전체주의적 동원 체제 속에서 이에 대항하는 모든 정치적 저항을 탄압했다. ‘동베를린 사건’, ‘1, 2차 인혁당 사건’ 등 연이은 간첩사건 조작은 수많은 양심세력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물론 사회를 ‘반공주의’라는 현대의 암흑기 속에 빠뜨렸다. 유신체제는 제도화된 국가폭력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또 다른 군사독재를 잉태하였다. 그의 억압체제 속에서 정경유착에 따른 독점자본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주의적 권위주의가 만들어낸 일상의 차별은 폭력에 대한 순응과 침묵이라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윤리구조를 제도화·관습화시켰다. 한국의 인권 수준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는 한 박정희는 인권운동의 영원한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평가는 오랫동안 반복되어왔다. 여전히 과거청산의 과제는 산재해있고 박정희 암흑기 속 피해자들의 통한은 위로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반복은 거대한 저항적 힘으로 전환되면서 한국 인권운동의 비약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평가의 반복 속에서 간과되어온 것이 있었다. 우중으로 쉽게 폄하되곤 했던 당시 2천7백만 인민들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은 때로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어머니 아버지의 위치에서 답답할 정도로 민주적 소통구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구우익의 세대로서 여전히 오늘날 대한민국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이념보다는 그들의 성실함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보고 자란 수많은 아랫세대들도 그들의 윤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그들은 굶주림을 해결해준 박정희 시대를 동경하면서 인권운동과 진보정치가 결정적인 시기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좌초되도록 하는 커다란 사회적 장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그들의 수구적 판단과 행동을 그저 박정희의 쿠데타에 박수를 친 어리석고 소통 불가능한 사람들의 행위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그들의 태어나서의 첫 경험은 굶주림과 차별이었다. 해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해방자 미군정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좌우익 사이의 테러, 미군정의 미곡정책에 따른 가난의 반복이었다. 형제는 적이 되었고 자매는 끼니를 걸러야 했다. 3년간의 기나긴 전쟁 속에서 그들이 지켜본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아니 어느 누구나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늑대인간의 잔악함 뿐이었다. 전쟁 후 처참한 삶 속에서 당시 모든 이들은 소설 『오발탄』 속 주인공 철호의 가족들처럼 좌절하거나, 몸을 팔거나, 흉기를 들거나, 미쳐버려야만 했다.


그렇게 살아온 그들에게 4월혁명은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선, 삶의 부패에 대한 저항의 순간이었다. 양아치, 부랑아, 구두닦이, 신문팔이, 잡화점 보조 등 가난 속 인민들은 교복 입은 학생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거리로 나와 격렬하게 시위했다. 공식적인 4월혁명 사상자 통계를 보더라도 60% 가까이가 무직이나 도시 빈민으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혁명 후 학생들은 농촌과 판문점을 향해 나갔고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4월혁명은 새로운 정치적 구심을 찾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경제정책을 제대로 펼칠 재정조차 구할 수 없었던 장면 정권의 무능력은 사회를 혁명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다시 법은 어리석은 자들의 상식이 되었고 폭력과 불안함이 세상을 지배했다.


그 속에서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들의 기억은 물론 유전자 속에 공포와 순응을 각인시키며 생존해왔다. 그분들에게 정치적 저항과 시위는 또 다른 불안이고, 또 다른 폭력이고, 또 다른 독재자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당시 교차학살 속에서 탈출한 그들에게 새로운 정치의 출현에 따른 또 다른 정치적 선택은 과거 인민군과 국군·미군 사이에서 영문도 모른 채 살육되어야 했던 교차학살의 재판일 수 있다. 지금 품고 있는 양식과 가족의 생명이 어떤 괴물로 돌변할지 모르는 ‘민주주의’라는 유령보다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이성적 판단 이전에 그들이 태어나서 그들이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잔인한 역사가 말하는 나름의 진실일 따름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경구들을 외치면서 민주화에 동참하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고통일 수 있다. 그들에게 변화는 오히려 차별받는 유색인들에게 피부색을 바꾸라고 하는 것만큼 커다란 폭력일 수 있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유산은 제도 이전에 그들의 기억과 유전자 속에 남아있으며,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들의 지지 속에서 몇몇 정당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렇게 아픔과 슬픔의 기억 속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윗세대들과 소통하지 않는 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포옹하지 않는 한, 이 사회 커다란 인권의 장벽은 제거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원치 않았던 시대에 태어나, 피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강제적으로 경험하면서 한 번의 일생을 긴장과 공포, 그리고 순응 속에서만 살아야 했던 그들의 삶을 비판이 아닌 소통의 첫 번째 대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박정희 시대 청산의 새로운 출발이 아닐까? 젊은이들의 광장문화에 찬물을 끼얹고, 보편적 무상급식을 빨갱이들의 만행으로 여기고, 대통령의 빈소를 새벽녘에 무너뜨리는 윗세대 몇몇을 보면 소통은커녕 눈과 귀를 막고 싶은 것이 젊은 세대의 솔직함일 것이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운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



소통을 통한 박정희 유산의 청산


정확히 50년 전 박정희의 쿠데타가 당시 인민들에게 혁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공포를 넘어서 윤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권위주의는 구래의 악습과 절대빈곤의 타파를 통해 충성을 전사회적 윤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랜 독재는 인민과의 윤리적 신뢰관계를 무너뜨렸으며, 유신이후 이어져온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항쟁과 함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윤리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켰다. 하지만 이 새로운 윤리조차 신자유주의의 빠른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그리고 긴장과 공포가 단지 야만적인 독재정권과 절대빈곤 속에서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근 잇닿는 사회적 자살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대안은 없다는 식으로 낡은 윤리를 복원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충돌하고, 갈등하고, 인권의 가치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근대 보편적 인권개념의 싹을 틔운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 그리고 그의 자유주의적 인간관과 사회계약론적 사상에 영향을 끼친 토마스 홉스. 이들은 모든 이가 자신들의 권리를 완전히(홉스) 혹은 일부(로크) 특정한 정치적 주체에게 양도하는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와 사회가 이성적으로 구성되고 작동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으며 보편적 인권투쟁의 서문이 되었다. 그렇다면 홉스와 로크에게서 자연상태의 인간 모두가 동시에 전쟁을 위한 무기를 버리고 평화를 위한 쟁기와 민주적 위임을 위한 투표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내가 무기를 버려도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모두에게 동시에 확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 말이다.


여러 권리들을 지키기 위한 집회와 시위 그리고 노동자의 생존권적 파업이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오래된 군복을 입은 노병들의 상식 밖의 언성이 과거는 반복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소중한 외침으로 바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서로를 사회의 적으로 판단하면서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지 않으려는 자들이 다시 그 무기를 내리고 서로의 권리를 승인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먼저 상대의 행동에 대한 원인파악이다. 상대가 무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들어줄 때, 그래서 그 이유가 자신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이유 없는 긴장과 공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서로의 소통이 시작되고 동시에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반세기가 지나도록 청산되지 않는 박정희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는 것은 바로 그 유산이 고스란히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온몸이 상처와 고통뿐인 저들과 신뢰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잠시라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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