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아버지의 ‘착한’ 유산

국민교육헌장 vs 학생인권조례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은 게 있다.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걷기 시작했을 때, 아이가 밥을 흘리지 않고 꼭꼭 씹어 먹을 때, 그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착해라.” 착해, 참 착해. 40도가 넘는 열이 가라앉았을 때도 칭얼대지 않고 잠이 들었을 때도 그건 모두 착한 일이었다. 알고 보면 그 사건들은 대부분 순리에 맞았기에 대견하거나 고마운 일이었고 예쁜 짓이었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대사는 ‘착하다’였다. 당연한 모든 일들이 ‘착하다’고 치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칭찬과 대가로 분류되지 않고 ‘착하다’는 칭송으로 ‘퉁’쳐 버리는 버릇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혹시 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암송의 시절, 국민교육헌장


알고 보면 내 어린 시절이 그랬었다.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 말썽 부리지 않고 공부 잘하고 성실하게 사는 아이들이 착한 아이였다. 나는 대부분 눈치껏 말썽 부려서 큰 사고를 치지 않았고 적당히 공부해 반 성적을 깎아먹지 않을 정도로 대충 착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늘 문제였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툭하면 사고치고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들만 골라했다. 못된 것들. 그런 애들이랑 놀면 착한 우리 애들 인생 망친다는 부모 등쌀에 친구도 몰래 사귀어야 했다. 그런 애들이랑 노는 순간, 선생님들의 걱정에 동반 ‘등업’되고 엄마 귀까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적당히 처신해야 했다. 그렇게 되돌아보게 된 순간. 시나브로 발견한 내 모습을 보면서 착한 일상에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 아이의 일상 행동에 ‘착하다’는 따위의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다만,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이 꿈틀대는 모습을 볼 때,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 “착하다.” 그리고 네 마음이 인류에게 참 고맙다, 라고.


착한 시절에 외웠던 두 개의 문서가 있다. 하나는 주기도문이고, 하나는 국민교육헌장이다. 무의식까지 침투한 두 문서의 위력은 대단하다. 잠 안 오는 밤. 두 눈을 껌뻑거리면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다보면 어느새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오며…… 중얼중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중얼중얼”을 하고 있다. 이것들이 양 한 마리 셀 자리에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로 등장하고 양 두 마리 셀 자리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대단한 암기의 힘이다.


두 문서의 공통점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외웠다는 것이고, 둘째 왜 외워야하는지 모르고 외웠다는 것이고, 셋째 안 외우면 체제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에 외웠다는 것이다. 두 개의 차이는 하나는 교회에서 외우라고 했고, 하나는 학교에서 외우라고 했다는 것뿐이다. 물론 주기도문 못 외워 맞은 기억은 없지만 국민교육헌장 못 외워 맞은 기억은 있다. 그런데 그 뜻도 모르고 외웠던 것들이 사고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의식이라는 놀라운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것들은 대부분 두 개의 문서였고 특히 강제적으로 꼭 외워야만 했던 국민교육헌장이었다. 두 문서 모두 다 아버지들이 만들어 준 것만은 분명했으며 바야흐로 해석하건데, 내 착한 역사의 시작은 거기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기억하는 동년배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혼식 검사’라는 게 있었다. 혼식 검사 노트에는 간식 칸과 혼식 칸이 있어서 간식을 싸오지 않거나 보리밥과 쌀밥을 혼식하지 않는 아이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그런 규칙이 얼마나 부당한지 단 한 번도 토 달아 보지 못한 착했던 나는, 그것이 국민의 도리인 줄 알고 자랐다. ‘왜 우리 엄마는 감자를 삶아도 따로 삶지 않고 밥 위에 삶아서 간식 검사하는 줄반장 놈이 감자에 묻은 밥알을 보고 실실 웃게 하는가 말이다.’라는 원망을 하며 살지라도 이러한 규정과 검사자체가 부당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할 정도로 착했다. 유신을 계승한 또 다른 각하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어머나! 세상에 그런 일이’하실 분들 있겠지만, 박정희 시대가 세상의 처음이고 끝인 줄 알고 자랐던 내 앞 세대는 이보다 더한 규율 속에서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반공’과 ‘민족중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조국 내에서 실현하고 그도 모자라 인류공영에 이바지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반공하고 민족중흥해야하는 역사적 임무 앞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따지고 들면 불량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학습하지 않았나. 불량선인, 조센징. 어디서 독립운동 따위를 하다니. 착하지 못한 것들.


혼식이 몸에 좋다고 철저히 믿고 컸는데, 보리쌀이 쌀보다 훨씬 영양가가 높다고 믿고 자랐는데 알고 보니 각하의 진정한 의도는 보리쌀 소비를 늘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하니 그 배신감을 무엇으로 다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내 목구멍에 들어가는 쌀, 보리조차 통제 당했던 몹쓸 기억이 착하게 살아온 세월 모두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니 이건 모두 각하 아버지들 탓이다. 그래서 나는 여지껏 보리쌀을 각하 보듯 하고 있다. 몸에 좋든 말든 상관없다. 각하에 치를 떨듯 보리쌀에도 치를 떨고 있다. 국가의 과거가 국민의 식습관에 관여할 수 있다는 놀라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국가에 대한 불신도 거기에서 유래했다고 하면 과장일까.


어쨌든 국민교육헌장이 지배했던 시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잊지 못할 기억을 또 하나 갖고 있다. 여중, 여고 주야간 반을 모두 보유한 거대한 학교 교정의 월요일 아침은 장관이었다. 6천 명의 딸들을 둔 교장선생님 각하는 6천 명의 아이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높디높은 구령대에서 굽어 살피시며 일주일을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의 딸들아~” 그런 어느 날. 떨어지는 뙤약볕. 뭐라고 하는 말씀인지 하품밖에 나오지 않는 대사를 들으며 열중 쉬어 자세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와중에 어디선가 육중한 몸 하나가 눈앞을 가로질러 날아 왔다. 그 육중한 체구는 내 앞줄 어딘가에 서 있던 친구의 몸 위로 날아가 보기 좋게 6천분의 1명 딸의 몸을 강타했고 딸아이는 볼링 핀 쓰러지듯 퍽하고 쓰러졌다.


이유인즉, 아침 조회 시간에 그것도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실내화를 신고 나왔다는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단옆차기를 날린 학생주임 선생에 맞아 쓰러진 친구는 나처럼 착한 옆 반 딸아이였다. 착한 나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왜냐면, 온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간을 감내한 내 착한 순종과 묵인이 견딜 수 없는 자괴감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했던 친구들 수천 명 역시 잘 참아내고 있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의 처사에 도전해서는 안 되는 착한 딸들이기 때문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이 사라지기 전인 1993년까지 25년 동안 ‘국민 위에 군림한 국가’를 암송한 우리 착한 아이들의 무의식은 그렇게 한 시대를 살아냈다.



학생인권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독제체제와 함께 물러났어야할 국민교육헌장은 무의식의 놀라운 위력을 통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자신의 시대를 강요하고 있다. 부당한 순간마다 찾아왔던, ‘욱’하며 올라왔던 정의로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착하게 살아온 자신들. 그 열패감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못했던 과거는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타인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중이다.


그래도 자신들은 체제로써의 ‘민주주의’마저 싹을 죽였던 독재자들의 강압에 의해 봇물처럼 터져버린 민주화의 시대를 통과한 기억이 있다. 그것은 국민 다수에게 삶으로써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해방의 학습공간을 열어 주었다. 반독재 투쟁 전선은 몸에 묻은 국민교육헌장을 떨어내는 데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낸 박정희는 자체가 청산해야할 과거였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는 초등교육에서 헌장을 외우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석면보다, 방사성 물질보다 더 잘게 내면으로 쏟아져 들어온 국민교육헌장을 결론적으로 떨어내지는 못했다. 학습효과는 반복되고 있다. 부모가 되거나 교사가 된 국민교육헌장 세대는 그들을 지배한 세대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딴 생각 말고 공부나 해, 이것들아. 머리털은 그게 뭐야. 단정하지 못하게. 학생답지 못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대신에 ‘먹고 살려면 죽도록 경쟁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으로 사명의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여전히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대세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명은 훨씬 간교하고 치밀하게 삶을 파고들어 아이들에게 이걸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절박함까지 강요하고 있다.


독재정권에 의해 침묵이 강요되었던 시대에는 그나마 피해자라는 동질감이 있었지만, 지금 아이들에게는 서로가 모두 경쟁상대이기 때문에 어깨동무조차 할 수 없다. 경제체제가 사회체제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경험한 민주주의는 체제로써 묻어두고, 내면 깊숙이 도전했던 삶으로써의 민주주의는 아직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미래에 있으니까 그때 가서 경험해도 늦지 않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이 스무 살에 찾아올 턱이 없다. 투표권이 생긴다고 사회에 대한 책임이 나의 것이 될 턱이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버텨온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이 사회는 너희들이 책임져야 할 공동의 것이라고 해봐야 듣도 보도 못한 민주주의가 얼마나 불편하고 성가시기만 할까. 청소년기를 가둬두고 있는 먹고사는 문제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실질적인 청소년기를 서른 살 너머로 유예시키는 상황에서 인생에 있어 민주주의의 도래는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조례가 들어선 학교들이 그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공부 잘 시켜서 미래의 착한 시민을 만들어야 하는데 턱도 없이 끼어든 학생인권은 매사에 성가시다. 때려서라도 가르쳐야하는데 때리지도 못하게 하지, 학생다운 머리에 일렬종대로 훈육해야하는데 개성실현의 자유라는 규정이 아이들 머리를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지. 이러다 공부는 언제하고 소는 누가 키우나 말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근대적 규정은 아직 학교 정문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종교의 자유, 신체의 자유, 자신이 속한 것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이미 중세를 넘는 시대에 셈을 끝낸 듯 하지만 대한민국 교정에서는 현재진행형의 논쟁거리다.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은 국민교육헌장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어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무서운 것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랜저로 대답하는 시대, 자신이 사는 곳이 품격을 말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패배자로 낙인찍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말 안 듣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 아이 수업 방해하는 시끄러운 놈들은 교실에서 추방해야 한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체벌이 금지된 교실에 등장한 상벌점제도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때리지 말라니 상과 벌을 주어서 여전히 징벌적 효과를 누리겠다는 것이다.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벼랑에서 떠밀리는 생존의 정글이 교실 안으로 법적 자격을 가지고 입장했다. 이곳에 교육이 있을 턱이 없다. 친구를 때려서 받은 벌점 20점을 쓰레기를 주워 받은 상점 5점 네 번으로 탕감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래서야 차라리 몇 대 맞고 끝내자는 학생들의 자구책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가.


이토록 눈에 뻔히 보이는 배신들이 교육 현실이라는 포장에 똘똘 싸여있다. 치졸하다. 등급제로 나뉜 학벌 사회에서 제대로 안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패배자들을 양산하는데 학교가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묵인하고 있다. 예전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순응했던 과거대로 약육강식의 현실에 우리 모두는 너무 잘 순응하고 있다. 착한 국민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학생인권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강고한 프로그램을 뚫고 인간이 되겠다는 불온한 바이러스가 시스템의 오류를 넘어 정상 작동 체계가 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학생인권조례는 주체의 열망으로부터 만들어진 아래로부터의 체계는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학교 운동장에 쓰러져 있던 내 친구. 그 아이를 짓밟던 선생님의 분노에 손을 대고, 그만하라고 제발 좀 그만하라고 울부짖는 내 모습을. 보리쌀보다 초라했던 우리의 과거를 향해 난 착하지 않아요, 나 가지고 장난하지 말아요, 절규하는 내 모습을. 국민교육헌장의 시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꿈이라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의 반역으로 만들기 위해 학생인권조례는, 그래서 또 하나 나의 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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