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친구 하나 있음 소원이 없겠어”

탈시설 자립생활인 김선심 씨

전화로 알려준 4자리 숫자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보이지 않는 집주인을 향해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건네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방인이 안방까지 들어왔건만 침대에 누운 집주인 김선심(47)씨는 일어날 줄 모른다. 아니 일어날 수가 없다. 몸은 물론이고 머리조차 맘대로 가눌 수 없는 1급 뇌병변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150센티미터가 될까 싶은 작은 키에 깡마른 그의 몸은 천장을 바라보며 눕혀진 채 움직일 줄 모르고 대신 고개만 나를 향해 돌려세운다. 가슴과 배를 덮은 이불 위로 그의 가녀린 두 팔이 보인다. 허리 옆으로 가지런히 모아진 두 팔은 장애 때문에 뒤틀린 양쪽 손목과 주먹 쥔 손으로 이어진다. 두 다리는 이불이 덮이지 않은 채 큰 쿠션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혈액순환이 안 되다 보니 자주 붓고 저려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란다. 얇은 이불 무게도 때론 천근같아서 어지간히 춥지 않으면 이불을 덮지 않는다는 그의 두 다리의 끝에는 두 발이 八(팔)자 모양을 하고 있다.


아침에 활동보조인이 다녀간 후 5시간째 이 상태로 있었다는 그는 “좀 일으켜 드릴까요?”란 말에 하루의 2/3를 이렇게 지내다보면 이도 이력이 난다며 계면쩍은 웃음을 짓는다.


인터뷰가 시작됐지만 녹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조차 끔찍한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싫다고 했다. 몸을 휘감은 장애는 언어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말은 생각처럼 발화되지 못하고 입안의 웅얼거림으로 퍼져나가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로 튀어나오곤 했는데 그는 소통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잔뜩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탄력을 받은 건 그의 말들이 아닌, 목에 힘이 들어갈수록 고개에도 힘이 들어가면서 하나로 동여매어진 끈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머리카락들이었다.



가족, “어떻게든 집에서 살고 싶었제”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장애가 심하진 않았제. 어렸을 땐 혼자 앉기도 하고 내 손으로 밥도 먹고 방도 치울 수 있었제. 스물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무렵에 엄니가 교통사고가 나서 20일쯤 입원을 했어. 그러니까 밥을 먹을 수가 있어야지. 언니 오빠는 다들 시집, 장가가고 집엔 작은 오빠랑 큰 오빠 아그들만 있었제. 작은 오빠는 들여다볼 생각도 안했고, 조카들은 학교가기도 바쁜데, 어떻게 밥을 달라고 하겠어. 그냥 학교가라고 하고 저녁에 애들 오면 조금 먹고 그랬제. 그렇게 못 먹으니까 점점 기운이 딸리더라고. 앉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기운이 한 번 빠져버리고 나니까 찾아지지가 않더만. 그때부턴 혼자 밥도 못 먹었제.”


선심 씨는 1964년 전라도 한 시골 마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9살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떴으니 아버지의 정을 느껴볼 틈도 없었지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애초부터 그에게 주어질 아버지의 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빠 둘에, 언니 둘. 모두 4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의 동생으로 살지 못했다. 어찌 생각하면 똑같은 자식이고 형제건만 왜 그리 한평생을 구박덩어리로 살아야만 했던지. 사랑받은 기억보단 소외되고 냉대 받은 기억이, 따듯한 말보단 ‘쯧쯧’하는 혀 차는 소리가 더욱 익숙했던 날들이었다.


“태어나서 38년을 방안에서만 살았제. 엄니랑 형제들이랑 TV만 보고 산 겨. 바깥세상은 TV만 보고 ‘아 이렇구나!’ 하고 상상만 했제. 어려서 엄니가 장사를 다녔어. 남편도 없이 얘들 데리고 먹고 살아야했으니까. 엄니가 장에 다녀올 때 ‘집 잘 봐라’ 그러고, 장에 갔다 오면 ‘집 잘 봤니?’ 그러고 살았제. 집안의 개나 마찬가지였제.”


“바깥이 왜 안 궁금했겠어. 동네 애들 소리만 나도 미치겠는 거야. 그래도 나갈 수가 있어야지. 나가고 싶다고 해봤자 엄니가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나가고 싶단 말도 못했제. 부엌 나갈 때만 바득바득 기어서 나가고, 손님이라도 오면 방안에서 꼼짝없이 며칠이고 지냈어. 식구들이 내가 손님 앞에 나오는 게 창피하다고 나오지 말라고 해서 못 나갔제. 그게 너무 싫었어. 주로 엄니랑 오빠들이 그랬는데, 언니들도 그랬어.”


“언니들이 시집가서 가끔 친정이라고 한 번씩 왔다가면서 나한테 뭐라고 그랬는지 아남? ‘어째 안 죽냐, 왜 안 죽냐?’ 그럼 내가 말하제. ‘나도 죽을 수 있다면 죽을 건데, 혼자서도 못 죽네.’ 그럼 ‘오래도 살고 있다’ 그러제. 그냥 하는 말이라도 꼭 그렇게 말을 해. 자기네들은 생각 없이 하는 말인데, 내 맘은 굉장히 아프제. 어찌 안 아프단가.”


그래서였을까? 어릴 적부터 그는 크면 시설에 가서 살리라 마음먹었다. “형제간에 짐 되지 말고 나 죽기 전에 니가 죽어야한다”는 엄니의 푸념이 잦아질수록 ‘형제간 없이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있을 것인디, 왜 어린 나한테 고런 소릴 해서 아프게 할까’라며 눈물짓던 아이는 시설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믿으며 어른으로 성장해갔다.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작은 올케에게 시설을 알아봐달라고 했다. 엄니도, 올케도 가긴 어딜 가냐며 같이 살자고 했지만 늙은 엄니가 자신 때문에 눈도 못 감고 돌아가실까봐 시설에 가겠노라 우기고 또 우겼다. 자신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오빠랑은 도저히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올케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2001년 10월 20일. 깨끗이 목욕을 하고, 단정히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토록 고대하던 38년만의 외출이었건만 그 길이 시설에 가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두 눈 크게 뜨고 세상을 다 담으리라 벼르고 별렀던 첫 외출이건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보단 시설에 대한 불안감이,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설렘보단 낯선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상처와 좌절로 얼룩진 집을 벗어나고 있었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니가 그리웠다.


“내가 원해 시설에 들어가긴 했지만 내 맘이 억지 춘향으로 들어간 거였제. 누가 집에서 살제, 시설에서 살고 싶겄남.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 같으면 시설에 안 들어가고 싶제, 누가 들어가고 싶겄어. 생각해봐, 어떻게든 엄마 옆에 있고 싶제.”



시설, “3년이 3백년 같았어”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시설장을 포함해 일보는 사람 세 명과 15명의 정신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작은 시설이었다. 시설생활인 모두가 정신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마흔 살에 가까운 그를, 남의 도움 없이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는 그를 받아주겠다는 시설은 그곳 밖에 없었기에 앞뒤를 잴 틈이 없었다. 아니 구세주라도 만난 듯 고마웠다. 하지만 시설에서 산다는 건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고된 일이었다.


“어느 날은 인났는데 아침밥을 안줘. 왜 밥을 안줄까? 자기네들은 밥을 다 먹고, 다 치워도 안줘. 밥 주는 아줌마한테 물어봤어. 왜 나는 밥을 안주냐? 원장이 주지마라 했데. TV 늦게까지 봤다고 벌준다고, 벌이라고. 내가 시설에 들어갈 때 내 돈으로 TV랑 라디오를 사가지고 갔제. 밤에 잠이 안 오면 TV나 보려고 한 건데 9시가 되면 자야한다는 거야. 원장이 여기서는 자기 말을 꼭 들어야 한다면서리. 해서 끄고 잤는데, 어떤 아줌마가 거짓말을 친 거야, TV 안 끄고 봤다고. 그 사람이 거짓말한 거라고, 왜 내 말은 안 믿느냐고 했는데, 원장이 그 사람 말을 믿는다는 거야.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또 어디가 있겄냐. 자기들은 다 먹고 치우고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말 한 마디 없이 밥을 안줘. 하루 종일 굶어버렸제.”


“핸드폰을 원장 모르게 사가지고 전화하다가 들켜버렸어. 핸드폰을 열어봐, 원장이. ‘왜 남의 것을 열어보세요?’ 그렇게 내가 따지듯이 물었어. (원장이) 그 자리에서 한참을 앉았더니 TV 리모컨을 던져버려. 그러니까 리모컨이 박살이 나부렀어. 약은 약대로 따로따로 돌아다니고 두 동강이 나부렀어. 그래놓고 나보고 ‘나가라’고 하더라. ‘기분 나쁘면 나가시오. 나도 댁 같은 사람 못 데리고 살겠소.’ 그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고. 왜 우냐고 사람마다 다 그래. 언니가 운다고, 울고 있다고 그래. 긍께 선생들도 와갔고 왜 우냐고. 내가 ‘그냥요’, 내가 서러워서 운다고. 진짜로 살고 싶은 맘이 한 개도 없더라. 그때 당시에는 이렇코롬 내가 살아야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고, 진짜로 비참했어. 아니, 자기 돈으로 사준 것도 아니고 내가 돈 모아갔고 샀는데 왜 그것을 뺏어가 갔고 열흘 만에 주는 거야. 안 그러냐? 내가 아주 비참하게,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시설은 그런 곳이었다. 사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원장의 맘에 의해, 말 한마디에 의해 삶이, 마음이 처참히 짓밟히고 부서지고도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하소연은 고사하고 말 건넬 사람조차 없었다. 다른 시설생활자들은 모두 정신장애인이었고, 의사소통이 되는 사람은 모두 시설 관계자들이었다.


“속은 타 들어가는데 말은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미치겠는 거야. 방안에서 천장만 쳐다봐야 하고, 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제. 게다가 자다가 우는 사람도 있고, 웃는 사람도 있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내가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녀. 시간이, 하루해가 겁나게 길었제. 내가 미치는지 알았제. 같이 미쳐가는 기분 아남? 거서 3년을 살았는데 꼭 3백년 산 기분이었제. 유리병 안에 갇힌 느낌, 꼭 그런 기분이었제.”


하지만 시설에서 나올 생각은 못했다. 갈 곳도 오라 한 곳도 없었다. 밥 먹는 거 하나 씻는 거 하나 화장실 가는 거 하나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고 굶기면 굶고 방치하면 방치된 삶을 사는 게, 가슴에 사무치는 설움을 토해낼 상대 하나 없이 평생을 사는 게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원장의 무례함이 정도를 더해가면서, ‘보낼 수만 있다면 내보내겠다’, ‘가고 싶으면 가보라’며 자신의 처지를 비웃듯 내뱉는 말들이 잦아지면서, 그것이 벼랑 끝일지라도 더 이상 이곳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사람마냥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나갈라요.”


용감하게 내질렀다. 무슨 꿍꿍인지 원장은 “나가면 굶어 죽는다”며 만류했다. ‘나가겠다’, ‘내보낼 수 없다’는 지루한 공방이 계속됐다. 끈질긴 그의 선언에 결국 원장은 집에서 확인서를 써주면 내보내주겠다고 했다. 부리나케 올케에게 전화를 걸어 나갈란다고, 와서 확인서를 써달라고 했다. 하지만 몇날 며칠이 지나도 올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올케는 그가 집으로 오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망설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집에는 죽어도 안 간다고, 어떻게든 혼자 살 테니 걱정 말라고 수차례 전화를 하고난 후에야 올케가 왔다. 참을 수 없이 서럽고 분한 마음에 내지르긴 했지만 막막했다. ‘이렇게 나가면 또 어디 가서 우리 집만치로 구박이나 받는 건 아닐까, 더 나쁜 시설에 보내지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에 대책도 없이 나가겠다고 저질러버린 자신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을 주어 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집에만 가지 말자. 다른 시설에서 어떻게든 못 살 겄냐’며 마음을 다잡았다. 시설 조사를 왔던 장애인 단체에 전화를 걸었다. “나 좀 도와줘라. 나 나갈련다.” 다행히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이 달려와 주었고,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시설로 보내지지도 않았다. 그가 간 곳은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서울의 한 체험홈이었다. 단 한 번 상상조차 못한 삶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립, “친구가 필요했어”


체험홈엔 눈치봐야할 가족도, 무엇을 강요하는 원장도 없었다. 혼자만의 방이 있었고,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그가 원하는 때 식사를, 목욕을,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머리 자르고 묶는 것 하나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던 그에게, 의식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상을 모두 사치라 배웠던 그에게 시설을 벗어난 생활은 일상에서 자신의 의사가 존중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공부도, 사랑도, 내일을 꿈꾸어도 된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 얼마나 소망했던 삶이었던가. 더 이상 길이 없다 생각했던 절망의 끝에서 그는 기적처럼 자유와 만났다. 자유를 알아가면서 그는 처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이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친구를 갖는 것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친구가 없었제. 집이랑 시설에서만 살았는데 어째 친구가 있었겠남? 체험홈에 먼저 와있던 이랑 잘 지내봐야지 했는데 잘 지내지 못했어. 그이는 나이가 서른네 살인가 됐는데 직장에 다녔지. 입으로 컴퓨터를 할 수 있었거든. 그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기 물건에 손대는 걸 싫어했제. 어느 날 내가 밖에서 자고 들어왔더니 나한테 대뜸 왜 자기 물건에 손을 댔냐고 그러는 거야. 알다시피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꿈적도 할 수 없는데 내가 손을 댔다고 우기니까 기가 막히더라고. 억울하고 서러웠제. 그 일이 있은 후엔 서로 말도 안하고 어떻게든 거기서 나와야겠단 생각만 했제. 6개월인가 같이 살았는데 결국 그 친구가 먼저 독립해서 나갔어.”


“근데 사실은 말야, 난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어. 가끔씩 엄마가 와서 돌봐줬는데, 난 엄마가 있어도 들여다봐주지도 못하니 그게 그렇게 부러운 거야. 주말마다 엄마네 집 가는 것도 부러웠어. 나는 갈 데도 없잖어. 오라는 곳도 없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얄밉더만.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것도 미칠 듯이 부럽고.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부러워서 친구가 될 수 없었제. 친구해야지 하고 맘을 먹을 순 있었지만 마음을 털어놓는 진짜 친구는 될 수 없었제.”


또 다른 룸메이트가 생겼지만 그와도 친구가 되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어찌 다 좋은 사이로 발전하겠냐만 그의 마음과 달리 관계는 계속 어긋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삐걱거림은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마흔한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외톨이었다.


가족과 함께 산 38년 세월, 그는 가족의 일원이기보단 구박덩어리, 애물단지였고 대문 밖 사람들과 세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시설에서 지낸 3년이라고 무엇이 달랐을까. 다른 시설생활자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고 시설장이나 직원들과의 대화는 가능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사람의 자리를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나 후원자들 역시 그를 보살핌과 동정이 필요한 자의 위치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마흔이 넘도록 그는 대등한 관계에서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없었다.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상대를 만나본 기억도 없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동정과 연민에도 감사해야 하는 사람, 소외와 차별, 무시를 당연한 듯 감수해야 하는 사람, 그것이 사람들이 위치지어 준 그의 자리였고 그는 그곳에서 항상 초라하고 열등한 존재로, 무기력한 존재로 주어지는 관계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자유만큼이나 그에겐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절실했지만 그러하기에 그에겐 사람들과 사귀는 일이, 친구를 만들고 일상을 나누는 일이 낯설고 힘들기만 했다.


룸메이트와의 관계 맺기가 번번이 상처로만 남으면서 그는 독립을 하면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친한 친구도 함께 살면 의가 상한다지 않던가. 독립을 후원해줄 가족도, 직장도 없었기에 장애인수당, 노들야학 장학금, 개인후원금 등 들어오는 돈은 쓰지 않고 모았다. 사람들이 독하다고들 했다. 그 말에 설움이 복받쳐 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기에 밥상 위에 찌개 하나만 올리는 자린고비 생활을 하며 모으고 또 모았다.


체험홈에서의 1년 6개월의 시간이 흐른 2006년, 그는 온전히 제 힘으로, 자신만의 집을 구해 독립했다. 500만 원에 35만 원짜리 월세. 주머니 사정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그와 같은 중증 장애인에게 선뜻 집을 세놓겠단 주인은 없었다. 더욱이 턱없는 집,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서울 시내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선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집에서 3년을 살고 지난겨울 야학과 교회가 있는 대학로 근처로 이사를 했다. 독립을 하면서 그리고 이사를 오면서 또 다시 기대라는 걸 했다. 독립을 하면, 대학로로 이사를 가면 혹시 이 지독한 외로움의 끝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일주일에 4일은 노들야학에서 보내고 주일엔 교회를 가. 시설에서의 3백년과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지. 하지만 아직까징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대학로로 이사 오면 노들(야학) 사람들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이사 온 지 한 달 됐는데도 (아무도) 안 와봤제. 오려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는데 오지를 않아,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글쎄, 고런 걸 보면 나를 어떻게롬 생각하고 있을까 싶제. 내가 일찍 갈 때는 2시부터 가 있어. 활동보조가 없으니까 일찍부터 가서 있는 거지. 그럼 월화목금해서 하루에 대여섯 시간, 일주일에 서른 시간 정도 있는 거지. 선생들이 활동보조도 해주고 그래. 근데 그 사람들한테는 내 진심을 말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들하고는 함께 있는 시간은 많아도 말을 많이 못 나눠봐서 그런 것 같은데, 생각해봄 서운한 게 많제. 내가 그럴 주제는 아니지만. 다른 학생들하고도 안 친해. 노들(선생님들)에서는 혼자 놀지 말고 사람들하고 관계를 가져라, 친해지라고 그러는데, 나도 그렇지만 그 사람들도 나랑 친해지려고 안하는 것 같아. 그래서 혼자 놀제.”


월계동에서 대학로로 이사를 오면서 노들야학과 그의 집 사이 거리는 채 200미터도 안되게 가까워졌지만 그와 사람들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 듯 보였다. 탈시설을 도와준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과의 사이에도 서운함이 더해졌을 뿐이다. 왜 그리 관계는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지, 왜 그리 내 진심을 몰라주는지, 그는 꼬여만 가는 관계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조금 멀리 선 나는 그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어렴풋이나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남은 삶, “펑펑 한 번만 울어봤음 좋겠어”


“혼자 사는 게 참 좋은데, 때론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리 주체가 안 돼. 나 혼자선 아무 것도 못 하잖여. 급하게 아프면 어떻게 하제? 대변이라도 마려우면? 도둑이라도 들면? 이렇코롬 침대에 누워 TV 리모컨도 못 돌리고 전화도 못 거는데. 배고파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꼼짝할 수가 없제. 다리에 쥐가 나도 움직이지도 못하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제. 이렇코롬 있다 죽으면 누가 알기나 할까? 신문에 난 것 마냥 며칠이고 몇 달이고 있다 발견되는 건 아닐까도 싶제. 약속했던 시간에 활동보조가 안 오는 경우도 있어. 그럼 계속 기다리제.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었다 연락도 못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야. 혼자 살고 얼마쯤 지났나? 활동보조가 와서 문을 못 여는 거야. 어떻게 하라고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게 들리나. 전화를 할 수가 있나. 방안에서 나 혼자 펄쩍 뛰었지. 이이가 문을 못 열면 센터로 전화를 해야 하는데 그냥 가버렸어. 처음 오는 사람이었제.”


그날 그는 토요일 저녁 활동보조가 퇴근한 이후부터 일요일 저녁이 될 때까지 꼬박 하루를 혼자 있었다. 밥을 먹지 못한 것은 물론 화장실도 가지 못했으니 용변을 그저 침대에 지릴 수밖에 없었다. 비참했다. 하지만 비참함보다 앞선 건 두려움과 자괴감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있어야할지 모른다는, 혼자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다행히 일요일 저녁, 그가 교회에 오지 않은 걸 의아해하던 담임 목사가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길기만 했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1급 뇌병변 장애인이 자유와 독립이라는 불온한 꿈을 꾸는 이상 그날의 공포는 사는 내내 반복해 지불해야 하는 삯일지 모른다.


“활동보조가 없으면 나는 살 수가 없제. 내가 어떻코롬 살 수 있겠남? 내 몸의 일부분이제. 지금은 활동보조가 두 명인데 보통은 여덟 명이야. 낮과 밤이 다르고 주말이 다르제.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밤 10시부터 12시까지 해서 하루에 7시간 활동보조가 오제. 근데 한 번에 2~3시간이면 너무 바쁜 거야. 뭘 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고, 어디를 가려고 하면 시간이 너무 아까워. 나는 1분이 금이여, 금. 어디 다녀와서 밥을 먹고 보내야 쓰겠는데 활동보조들은 그 사정을 잘 몰라.”


1급 중증장애인이 정부보조를 받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활동보조 시간은 한 달에 230시간. 물론 그 이상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을 순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인들 스스로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에 비해 취업의 기회도, 임금도 제한적인 장애인들, 돌봐주는 가족도 도와줄 이도 없는 장애인들에겐 그럴 돈이 없다. 하루 이틀이라면 모를까, 아니 1년이라면 모를까, 사는 내내 활동보조가 필요한 이들에겐 정부보조 시간을 초과해 활동보조를 요청할 여력이 없다. 하여 24시간 하루를 중증장애인들은 7~8시간만, 720시간인 한 달을 230시간만 살아간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장애인들은 일상을 보내는데도, 외출을 하는데도,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장애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비장애인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활동보조인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일상이 고역인 것은 물론 자유는 더욱 위축된다. 와서 시간만 때우고 가려는 이도 있고, 장애인 주제에 술을 마신다고 술병으로 때리는 이도 있다. 긴 머리가 보기 싫다고 머리를 감겨주면서 쥐어뜯는 이도 있고, 숫제 머리를 안 감겨주는 이도 있다. 몸은 가족과 시설의 직접적인 폭력과 차별에서 벗어났건만 장애에 대한 편견과 형식적인 정책이 위세를 떨치는 사회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을 그가, 그리고 그와 같은 중증장애인들이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오랫동안 머릿속을 괴롭혔던 생각들이 안식을 찾았다. 그와 인터뷰 약속을 처음 잡던 때 그는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재차 확인했다. 왜 그리 일정을 꼼꼼히 확인했는지 그의 집을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그는 나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내가 온다는 이유로 오후 활동보조인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무섭게 그는 참았던 소변을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화장실에서 소변기를 챙겨와 그의 하체를 들고 소변을 받아냈다. 인사는 그 뒤에나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누군지 보다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급했다. 배가 고프다며 식사준비를 부탁했다. 그를 들어 휠체어에 앉히고 시킨 대로 부엌에서 찌개와 밥을 챙겼다. 그는 찌개에 말은 밥을 단숨에 해치웠다. 그때가 오후 4시. 그제야 그는 한숨 돌렸는지 그게 오늘의 첫 식사였다고 오전 활동보조인이 왔다간 10시부터 혼자였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활동보조인은 밤 10시나 되어야 온다고 했다. 겉으로는 별일 아닌 척했지만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


두 번째 만남 때도 활동보조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심했다. 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인터뷰어일까? 아님 활동보조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는 만만한 비장애인일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난 묻지 못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이어지면서, 그의 삶을 보다 가깝게 접하면서 알게 됐다. 나와의 인터뷰 시간만큼 저축된 활동보조 시간으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지. 그는 코앞으로 다가온 명절 연휴동안 언니네 집에, 그를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언니네 집에 가지 않기 위해 활동보조 시간을 어떻게든 저축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진실 앞에서 나는 그를 질타하던 마음을 조금씩 떠나보냈다. 그건 사람대하는 예의가 아니라고 항변하던 불만을 떠나보냈다.


제대로 230시간의 삶을 고민해보지 못한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신체의 비밀스러운 곳을 노출해야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나는, 부끄러움이, 수치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활동보조가 보장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단지 ‘살아가기’ 위해 비장애인을 만나면 도움부터 요청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어보지 않는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곳에서 보았다. 왜 그의 관계는 그렇게 꼬여만 가고 있는지를. 왜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과 외로움을 맛봐야하는지를.


그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 역시 알고 있다. 안부전화에도 혹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를 걱정해야하는 관계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잠깐 얼굴이라도 보게 왔다가’라는 그 한 마디를 내뱉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그러다보니 먼저 다가서기 어렵고 때론 먼저 다가와주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헤아려 보살펴 주지 않는 사람들이 참 야속하기만 하다는 것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을. 자신은 그들이 아플 때 간호해줄 수 없기에, 홀로 남겨졌을 때 달려가 줄 수 없기에, 아프다고, 외롭다고, 혼자라고 내 손을 잡아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다. 서운하다고 말하기가 미안하고 싫었다. 타고난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무능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의 낙인이 열악한 장애인 활동보조 제도와 만나 그를 더욱 초라한 존재로, 외로운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생각하곤 한다. 만약 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장애가 이렇게 심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좋은 친구 하나 만들지 않았을까?


“내가 장애만 없으면 어쨌을까? 아님 혼자 전동휠체어라도 타고 다닐 수만 있었더라면 이렇코롬 외롭진 않을 텐데. 내 몸이 이런데 어딜 다닐 수가 있어, 사람들이 날 찾아오길 혀. 그러니까 내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좋은 친구 한 명 있음 좋겠는데, 그러려면 내가 적극적으로 나가야하는데, 그게 잘 안 돼. 남들은 내가 활발하다고 하는데 나는 소극적인 것 같아. 속으로 삼키고, 아픈 것도 삼키고, 이런 것도 삼키고, 내 속에 담아져서 있지. 외로워도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나 혼자 달래. 혼자 가만히 얘기를 해. 넌 왜 그렇게 했냐? 심심하지 않냐? 고렇코롬 나 혼자 말을 혀. 그렇게 살다보니 속이 쓰려. 화병은 진작 나서 있는 것 같은디, 어쩌겄어, 그냥 외롭고 서운해도 혼자 견디고 가자 이렇게 생각하는 거제. 그냥 이렇게롬 살다 가는 거지. 근데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사람을 붙잡고 펑펑 한 번 울어봤으면 좋겠어. 내 속을 확 뒤집어 놓고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어.”


마음이 많이 아팠는지, 아니면 맥주 한 병에 얼큰히 취했는지 참아왔던 말들이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온다. 서러움이, 외로움이 잔뜩 배인 말들은 이내 눈물이 되어 베개를 적신다. 그리고 그 눈물이 나에게 묻는다. 만약 너였더라면 너는 어떻게 살아냈을 거냐고.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우정을 나눴을 거냐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겠느냐고. 눈물이 장애를 모르는 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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