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풀뿌리 정치를 통해 사람을 만나다

풀뿌리 정치는 권력을 잡아 그 힘으로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펴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의사결정의 주체로 만드는 기나긴 과정이다. 그래서 풀뿌리 정치에서는 사람들의 참여가 핵심이다.


나는 환경활동가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녹색정치를 꿈꾸다 과천시의원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정치는 환경을 위한 정치나 몇몇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주민들 스스로 지역에서 만드는 풀뿌리 정치였다. 인구 7만 명의 작은 도시 과천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이웃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지속가능하고 더불어 사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과천동 비닐하우스 마을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현장에서 주민들과 먹고 자며 일한 것이 환경활동가로서의 첫발이었듯, 2006년 풀뿌리 시의원으로서의 첫발은 과천동 비닐하우스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시의원이 되기 전에는, 얼핏 이야기는 들었지만, 비닐하우스 마을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곳을 돌아보게 된 것은 순전히 의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도시락을 배달해드리는 사업이 있는데 자원봉사자들로부터 한번 같이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이때 주로 들른 곳이 과천동 비닐하우스 마을이다. 혼자 사시는 어느 할아버지의 하우스는 냄새가 너무 심해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할아버지 자신도 잔뜩 취한 상태가 아니면 잘 들어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비슷한 처지지만 어느 할머니가 사는 하우스에는 도란도란 수다꽃이 피고 있었다. 동네 할머니 몇 분이 달달한 커피 한잔씩을 나누며 누구보다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이 무얼까? 그것은 밥, 경로당, 이동수단과 같은 복지정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회복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외톨이 할아버지와 벗이 되어 살아가는 할머니처럼 이웃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철거 때문에 불려가서도 이 집 저 집 들여다보며 사는 모습을 살펴보게 되었다. 집으로서는 불법인 이 비닐하우스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철거를 당하고 또 새로 짓는다. 어차피 다시 지어야 하니 너무 산산조각 내지만 말라고, 그렇게 당부할 뿐 별 힘이 되지 못한다. 허물고 다시 짓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전기 배선에 문제가 생긴다. 화재의 원인이 된다. 어느 설날, 순식간에 일어난 화재로 막 대학입학을 앞둔 여학생이 숨졌다.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정에야 들어온 이 학생은 다 타버리는 데 3분도 걸리지 않았을 이 화재 때 얼른 깨어나질 못했다. 혼자 살아남은 할머니의 자책을 듣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집집마다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를 비치하도록 요구했다. 이용법도 꼭 가르쳐드리라고 당부했다. 요즘 이 마을을 다니며 경보기 없는 집을 살피는 소방대원을 보곤 한다.


장애인단체에게도 부탁하여 저소득 장애인들을 인터뷰하러 다니곤 했는데 역시 이 마을에 많이들 사셨다. 그러다보니 이 마을에 친한 젊은이도 생겼고 혼자서도 일삼아 종종 들르게 되었다. 어느 날 이 친구에게 앞장을 서라고 해서 불편한 분들을 뵈러 다녔다. 고장 난 연탄보일러를 고치지 못한 채 겨울을 기다리는 분도 계시고, 휠체어 타이어에 구멍이 나서 두 달째 외출을 못하고 계신 분도 계셨다. 부끄러웠다. 내가 주민의 삶 가까이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만 원이면 고칠 타이어를 어쩌지 못해 집에만 계시게 했다고 자책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타이어 좀 고쳐달라고 왜 말씀하지 않으셨냐고 따지듯 여쭤봤다. 지난해에 동사무소에서 사준 휠체어인데 고쳐달라고까지 하기가 미안해서 가만있었단다. ‘미안해서’라는 말은 늘 가난하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하신다. 아파트 페인트칠을 다시 해달라는 소유자대표들이나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를 지원해달라는 관변단체들은 적지 않은 예산을 요구하는 일을 마땅한 권리로 여긴다. 그래서 지방자치, 혹은 대의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반영하는 외양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소수의 이기적인 욕구를 증폭해 대변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많다. 말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 내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풀뿌리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비닐하우스에 사시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도왔다는 것은 사태를 개선하는데 있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분들 스스로 주소 찾기 소송을 진행하고 승리하면서 마을에 자치조직이 생겼다.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을 몇 년간 살핀 나는 자연스레 이 분들의 동료가 되었다. 선거 때만 되면 보수정당에 당원 가입서를 모아주던 분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꿀벌마을이라는 어엿한 이름도 생겼다.


작년 두 번째 선거를 앞두고 열린 내 의정보고회에는 비닐하우스 주민들, 장애인들, 노점상들이 자리를 메우셨다. 과천의 풀뿌리운동이 이 분들과 연대하게 되었다. 선거는 그런 연대를 단단히 하는 기회로 삼았다. 첫날 연설회는 비닐하우스 마을 공터에서 촛불집회 형식으로 열렸다. 아파트 사는 사람, 단독주택가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으로 초청되었다. 처지가 다른 과천 사람들이 선거를 함께 치르고 함께 승리했다.


비닐하우스 마을에는 어린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기력이 약하신 할머니와 지내느라 하루 종일 집에만 머무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선거공약으로 작은 도서관 형식의 어린이 집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공약은 지킬 필요가 없었다. 함께 선거를 치른 주민들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힘을 모아 하우스 한 동을 어린이도서관으로 만들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그야말로 뚝딱뚝딱 만들었다. 함께 꾸미고 함께 돌보고 함께 운영하고 있다. ‘꿀벌마을 붕붕도서관’의 운영회의는 마을 일을 의논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장애인 편의시설 사전점검 조례


처음 시의원이 되었을 때 장애인 정책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문제는 계속 발생했다. 편의시설이 없거나 부적절하게 설치되어 문제제기가 끊이질 않았다. 과천시가 예산을 들여 시설을 개선한 개방화장실에 편의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여성이 이곳에서 큰 낭패를 당했다. 장애인단체가 주최하는 행사가 열리는 강당의 무대에는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그때 하나씩 지적하고 고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청소년수련관 개관을 계기로 공공건축물의 편의시설 실태를 꼼꼼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비장애인인 나의 눈으로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지체장애인단체 회원들, 장애인편의시설 전문가들과 함께 청소년수련관, 시립어린이집의 편의시설을 점검했다. 결과는 낯 뜨거울 정도였다. 장애인 화장실은 남녀구분이 되어 있지 않거나 잠금장치가 없고 용변기 옆 손잡이도 거꾸로 달려 있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버튼은 정해진 높이에 달려 있지 않았고 경사로는 휠체어가 올라가기엔 너무 급했다. 법에 따라 이제 막 설치했다는 편의시설들이 다시 또 돈을 들여 고쳐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마침 경기도 차원에서 장애인 등의 편의시설 사전점검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다. 이 조례에는 시군의 의무도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집행된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광역 차원의 입법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 이후 리모델링하여 개장한 시민회관 대극장, 소극장의 편의시설을 점검한 결과 또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빛이 반사되어 시각장애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점자블록, 부적절한 경사로, 휠체어 접근이 차단된 무대와 객석 계단, 쓰레기와 청소도구가 방치된 장애인 화장실 등등. 결국 장애인 당사자에 의한 사전점검과 지속적인 모니터링 없이는 문제를 개선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장애인들과 함께 과천시 편의시설 사전점검 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검토를 시작했다. 관련 논문을 통해 2004년 1월 목포시에서 전국 최초로 장애인 편의시설 조례를 제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포시의 조례를 효시로 여러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가 비슷한 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장애인 정책의 문제들은 대부분 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었다. 우리 조례는 장애인 당사자들과 함께 만들고 함께 집행하도록 해야 했다. 여러 지방의 조례를 살펴보니 당사자와 시민단체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조례에 비해 자치단체 집행부가 발의한 조례들은 매우 형식적인 입법에 그치고 있었다. 과천시 편의시설 조례의 기술적인 사항은 내가 다듬었지만 현장 점검, 조례의 내용에 대한 검토와 판단은 장애인단체와 편의시설 전문가들에게 맡겼다. 조례의 서두에 당사자주의 원칙을 명기했으며 장애인을 수혜자로 파악하는 대신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장애 없는 ‘무장애 공간’을 권리로 보장하는 관점을 채택했다. 편의시설 점검과정에서 장애 유형에 따라 적합한 당사자들이 참여하도록 보장했으며 당사자들이 편의시설의 설치 지도와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물이나 도로의 편의시설이 완공 후 손상되거나 방치되지 않도록 완공 후 2년 동안 당사자들이 그 실태를 모니터하도록 했다.


지방의원들은 조례 입법에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임기 중 조례 몇 건을 제정했다는 것이 가장 큰 업적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번듯하지만 실천되지 않는 조례들이 많다. 조례나 정책이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게 하려면 사람의 힘이 그 안에 담겨야 한다. 당사자가 만들고 모니터링하고 집행하는 조례만이 제대로 실천된다. 의원은 그 과정을 설계하고 조정하는 사람일 뿐이다.



풀뿌리 정치를 평가하는 기준


좋은 풀뿌리 정치란 무엇일까? 그 기준은 의회나 시청 건물 안에 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을 갖게 되었는가, 즉 자치역량이 얼마나 자라났느냐에 있다. 누군가를 당선시키고 권력을 잡는 일은 언뜻 중요해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라난 주민의 역량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방자치는 인권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한다. 이 글을 통해 비닐하우스 주민들과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많은 소수자들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비혼여성, 성소수자, 채식주의자, 병역거부자들은 지방자치에선 별난 사람들일 뿐 아직 이웃이 아니다. 이들 모두가 목소리를 가진 이웃이 될 때 인권도시라는 아직 낯선 말이 우리 자신의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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