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탈시설 자립생활인 정승배 씨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다가온 느낌은 ‘비장함’이었다. 내 주변 동료들은 이미 그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형’,‘승배야’라는 호칭을 쓰며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첫 만남에서 까만 얼굴을 한 그의 무표정 속에 묻어있는 삶의 고단함과 버거움을 느꼈다. ‘탈출’을 감행한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당참을 기대해서 더 그러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비쩍 마르고 말이 없었고, 그래서 하루하루 어떤 결의, 결단으로 사는 듯 했다. 서른한 살 젊은 청춘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그가 왜 그런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을까?


5살 때부터 31살이 되기까지 25년간을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전전하고 최근에는 노인치매요양원과 정신병원에서 갇힌 삶을 살다가, 스스로의 힘과 용기로 지금 여기 세상 속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다시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까?


정승배, 시설 밖으로 나오겠다는 용감한 결단을 내려 이제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려는 한 젊은이를 만나보자.



정승배 일대기


그는 2010년 4월 전남 장성의 한 치매노인병원에서 탈출한 젊은 청년이었다.


탈출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병원 측에 명확한 퇴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휘리릭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노인치매요양원은 병실 문을 잠가놓고 식사나 약을 줄 때만 밖에서 문을 여는,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시설이었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그가 치매노인들과 함께 있었으니, 대화가 통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고 온종일 가족 생각과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으로 보내야 했다.


서른한 살의 성인일뿐더러 언어장애가 좀 심하다 해도 인지력이 분명한데도 병원 측에서는 계속 보호자 운운하며 퇴원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잠시 석암비리재단 투쟁(2008년 당시 그는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 산하의 석암베데스다 요양원에서 살았다)에서 알게 되었던 장애인 단체 사람들에게 어렵게 연락을 했고, 몇 차례 전화통화를 한 끝에 요양원을 나가 살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는 무작정 면회를 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이 면회 왔을 때 그냥 차에 올라 도망치듯 요양원을 빠져 나왔다.


그가 그곳을 나올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도 병원도 나가서 살고 싶다는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수동 휠체어를 타고 있고 누군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100m 가는 것도 힘겨우니 도리가 없었다. 나가서 어떻게 살 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함께 있던 장애인단체 활동가들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가 임시로 거처할 곳은 알아 두었지만, 그 외 활동보조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활비는 어찌할지, 가족에게는 어떻게 얘기할지 뭐 하나 손에 잡히는 대책이란 없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하는데 안된다고, 뭔가 대책을 마련 할 때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또 하나의 절망적인 상황을 안겨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대책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진행해야 하는 상황, 그것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과정일 수 있다. 게다가 활동가들은 긴 3개월 동안 간간히 전화통화를 하며 병원에서 나오는 것을 늦춘 상태였기 때문에 ‘아니오’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못했다고 한다. 승배 씨가 믿을 구석은 그저 ‘나가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뿐이었고, 단체 활동가들 역시 ‘일단 나가자, 무슨 수가 생기겠지’싶은, 말하자면 깡다구뿐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가 벌인 행동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 면회 간 사람들의 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고 요양원 측에서는 그가 납치됐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함께 있었던 단체 활동가 3인은 졸지에 극악무도한 ‘납치범’으로 몰렸고, 멀리 전남 장성에서 형사들이 올라와 납치(?)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당사자인 승배 씨의 증언과 정황 등을 확인한 끝에 오해가 풀렸고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아 정리됐지만 말이다. 이 때문에 일명 ‘승배 씨 탈출 사건’은 자칫 ‘승배 씨 납치사건’으로 변질 될 뻔 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요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어떤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용기 있는 사람에게서 받을 좋은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



시설 밖으로, 부족해도 행복한 요즘


일단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요즘의 근황을 물었다.


“지난 4월에 노인치매요양원에서 나와 체험홈에서 살아요. 부모님 재산 때문에 수급권자 신청을 못했어요. 장애수당도 신청 못했어요. 그냥 쌀은 사람들이 갖다 주고 아침, 저녁은 집에서 먹는데 점심은 대체로 굶어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연결해 준 자원봉사자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와서 장을 봐-오고 반찬을 하면 저는 매일 전기밥솥에 밥을 하죠. 밥은 할 수 있는데 다른 것은 몸이 불편해 못해요. 청소도 혼자 못해요.”


하지만 불편해도 즐겁고 행복했다. 그의 나이 이제 31살인데, 1985년도인 5살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장애인시설에서 살았고 세상 밖으로 나온지 4개월 정도 됐으니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지겠는가.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고 했다.


그가 시설 안에서 보낸 25년의 세월은 어떠했을까? 시설에서 학교도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팔이 뒤틀려 바퀴를 굴릴 수 없지만, 수동휠체어밖에 없었고 그래서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키워왔을까? 시설에서 살다 나온 분들을 많이 만나온 나로서도 여전히 그 삶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25년의 삶, 시설에서 시설로


앞서 언급했지만 그는 5살 때 부모님에 의해 시설로 들어갔다. 현재 많은 장애인들의 경우가 그렇지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장애진단, 등급제의 폐단을 그도 고스란히 안게 됐다. 뇌병변장애로 몸이 심하게 뒤틀리고 언어장애가 심했는데 그의 의사표현 능력은 진단에서 ‘0(제로)’으로 나왔다. 너무 어린 시절에 받기도 했지만 한글을 모르고 의사표현을 해도 비장애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 인지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지적장애인으로 등록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 못지않게 현실 인식 혹은 자기 욕구 표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 이유를 살펴보자.


그는 시설 내에서 말썽을 부린다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같은 법인 내 시설에서 다른 중증장애인 시설로, 그리고 시설에서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24년만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되자 가족들은 그를 다시 어느 산골의 작은 미신고 장애인시설로 보냈다. 주변 환경이 너무 고립되어선지 그는 ‘평생 여기서 살다 죽을 것 같다’란 느낌을 받고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당에서 버팅기고 악을 써가며 시설 안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다른 미신고 장애인시설로 그를 보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그는 악으로 깡으로 발버둥 쳤다. 거주하는 곳이 2층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생각해 하루를 지내 봤지만 TV도 맘대로 못보고 새벽 5시부터 강제로 시작하는 예배시간을 견디기 어려워 그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차고 소리를 질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옆에 있던 화분을 다 깨고 사무실에 들어가 화분이며 집기류도 깼다고 한다. 시설원장은 “이런 아이 못 받겠다, 데려가라!”고 부모님에게 연락을 했고, 아버지는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전남 장성의 치매노인요양시설에 그를 내려놨다.


어머니 친구 분의 소개로 알게 된 치매병원에서는 그를 15명이 함께 있는 병실에 배정해 문을 잠가 두었다. 게다가 그 곳 요양사인 어머니 친구로부터 “아버지가 너 죽을 때까지 여기 있으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절망에 쌓여 일주일간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식사를 거부했다. “아무 생각 없었어요. 그냥 죽고 싶었어요.” 시설에서 나가 가족과 함께 집에서 살기를 꿈꿔 왔던 그에게 ‘평생, 거기서’라는 말은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가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된 것이다.



시설에서의 삶, 이미 지나간 추억?


2010년 7월 현재, 치매병원에서 탈출해 안정적인 생활을 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야학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인간관계 폭도 넓어졌다. 일단 임시로나마 체험홈에서 3년을 살 수 있고 우여곡절 끝에 장애연금도 신청해놓은 상태(그는 지금 한정치산자로 등록이 되어 있어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고 단체 도움을 받아 이곳저곳에서 생활비 후원을 받고 있다.


요즘은 장애등급제심사의 부당함을 알리는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동료모임 성격의 단체에서도 출석률 좋은 사람으로 이름 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일본 연극단체 주최로 신체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연극을 한국에서 공연하기 위한 배우 오디션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일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다양하고 활발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상도 바뀌는 것 같았다. 첫 인터뷰에서 느꼈던 비장함과 엄숙함 대신 밝고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런 모습이 살아나고, 술 담배를 자제한 끝에 얼굴에 살도 좀 붙었다. 며칠 전까지 그는 장애연금 신청에 문제도 생기고, 생활비 후원도 확정되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해 술과 담배를 좀 과하게 했다고 한다. 그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들(먼저 탈시설을 경험한 선배들)은 “집안은 치워지지 않아 엉망이었고, 밥도 잘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좌우되는가 보다. 밝고 맑아졌다. 그의 마음은 주변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로 환하게 넓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과거 시설에서만 살았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을 더듬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첫 번째 시설에서


“5살 때 시설에 갔어요. 그 때는 원장이 서너 명의 장애인을 데리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500만 원을 주고 저를 맡겼다고 해요. 평생 보호해 주겠다고 해서. 집에 원장 이름 앞으로 있는 은행 영수증도 많았는데, 25년간 전부 들어간 돈을 합치면 7천만 원 정도 될 거래요.”


법인 인가를 받은 후 부모님의 재산으로 실비 입소자가 되었던 그였기 때문에 매달 30만원 이상의 돈을 시설 측에 지불했던 것이다.


그가 있었던 김포 석암베데스다 요양원은 미인가 시설로 출발해 81년 법인을 인가받은 후 정부 보조금을 가로채 문제가 됐었다. 거주인에게 쓰라고 정부가 준 보조금으로 문어발식 시설 확장을 통해 더 많은 지원을 받아 시설 왕국을 만들었고 부당노동, 폭력, 보조금 가로채기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이다.


아들을 비롯해 가족이 이사로 등록되어 있는 등 족벌체제로 운영하면서 2008년에는 시설이 위치해 있는 김포시의 노른자 땅을 팔아 사회와 더 격리되어 있는 외진 곳으로 시설이전을 추진하면서 2008년 장애계 최대 이슈로 쟁점화 되었던 시설이기도 하다.


“법인 되면서 200명 정도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20명 정도가 있었고 한 방에 4~5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적장애인이 2명이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장애가 심했어요. 말이 안통해요. 하루 종일 마당에 있다가 잘 때만 방에 들어갔어요.”


그렇다면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일상적인 주제나 관심사는 뭐였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원장, 선생님(일하는 사람들), 자원봉사자 흉 봤죠.”라고 말한다.


“어떤 천주교 신부님이 보조기 사라고 후원금을 50만원 준 거로 알고 있었는데, 아주 형편없이 맞지 않는 보조기를 사다 주는 거예요. 그리고 먹는 거는 매일 허옇고 짜기만 한 김치에 새우젓만 나오고. 잘 모르긴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은 어린 애들인데 우리에게 말은 안 걸면서 우리 흉내를 내요. 나는 욕하고 그랬어요.”


시설장은 생활인들에게 필요한 서비스 향상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실비입소자라며 부모님에게 돈을 내라고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한 때 부모님은 월 몇 십만 원의 돈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면회도 안 가고 발길을 끊었다. 그 때 원장은 경찰서에 의뢰까지 해서 연락처를 찾아내 “돈 내라”고 닦달했다고 한다. 그는 시설장을 “도둑놈”이라고 말하며 ‘사람을 돈으로 봤다’고 했다. 보호의 명분으로 존재하는 시설이 오히려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셈이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신 것 같고, 어머니는 제가 태어날 무렵부터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병원을 왔다 갔다 하셨대요. 누나는 결혼을 했고 조카도 있어요. 고등학교 선생님인데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지는 몰라요.”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하니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아요.”라고 한다.



무기력, 고립, 분노, 폭력 그리고 죄책감


하지만 그 시설이 석암재단이란 사회복지법인이 되면서 가족면회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가족이 그 앞에 등장(?)한 것은 후원금 요구 문제가 해결되거나 승배 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일곱 살 때 칼로 손목을 그은 적이 있어요. 그리고 19살 때부터 이상하게 폭력적이 되었어요. 자살도 시도했어요. 2층 창문에서 그냥 뛰어내렸어요. 죽고 싶어서. 25년 동안 아마 20번은 넘게 자살하려고 했을 거예요. 화가 나면 나를 막 때렸어요. 자해했어요. 선생님 멱살도 잡고, 원장한테 대들기도 했어요. 물건도 닥치는 대로 던지고 차고. 사람들이 저를 피해 다녔어요. 폭력적이라고. 이상한 놈이라고. 왕따였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쓰거나 장애가 심해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냥 화가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이 폭력적으로 나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도 이해가 안되요. 왜 그랬는지.”


결국 시설 측에서는 아버지를 불렀고 “데리고 가든지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든지 하라”고 했다.


“아버지 얼굴을 그 때 처음 봤어요. 19살 때. 아버지가 원장한테 고개 숙이고 잘못했다고 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빌었어요. 나 때문에 원장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까 나도 미안했어요. 엄마는 오지 않았는데 왜 오시지 않았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때는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말썽부리지 말라고만 하시고 가셨어요. 무서워서 더 이상은 말도 못했어요.”


그 후 7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그를 만나러 시설에 찾아오셨다. 2006년,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여자 한 분이 오셔서 내가 네 엄마다, 그러셨어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엄마는 가시면서 계속 우셨대요. 저도 뒤돌아서 몰래 많이 울었어요.”


22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의 기억은 한 마디로 밝은 빛 그것이었다. 너무 밝아 그의 머리까지 하얗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때 받은 용돈 2만 원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최초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통장을 만들었어요. 엄마가 매달 4만 원씩 보내 주셨어요. 커피 사먹고, 과자 사먹고, 저축한 돈은 하나도 없어요.”


저축이라는 것도 앞날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뿌연 희망이라도 있어야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저축은 일종의 미래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해당사항 없음’ 이었다. 시설을 벗어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고 체념했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도 없었고, 쓸 돈마저 부족한 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그는 돈의 위력을 안 후 더 거칠어졌다.


“다 쓰고 없으면 남의 돈도 훔쳤어요. 몇 천 원씩 50번 정도? 그냥 돈이 갖고 싶었어요. 나한테 도둑놈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화를 냈어요. 그래, 나 도둑놈이다, 어쩔래! 하면서요. 그냥 배째라고 했죠. 누워있는 장애가 심한 형의 목을 조르기도 하고 TV나 보이는 물건은 다 집어던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나려고 해요. 왜 그랬는지 정말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시설에서의 결핍과 외로움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어졌거나 아니면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이기심이 본능적으로 작동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도덕심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어떤 고려의 대상도, 오순도순 살아가야 하는 친구도 이웃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 이를 부러뜨렸는데 엄마가 50만원 물어줬대요. 원장은 자꾸 말썽부리면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낸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1년 후에 정말 거기보다 백배 더 안 좋은 곳으로 보냈어요.”


한 복지법인이 여러 개의 시설을 소유하게 되면 서류상의 분류만 해놓을 뿐이지 시설 측 마음대로 거주 이전을 할 수 있다. -관할관청의 관리감독이나 감사라 해봤자 거주인 면담이 아닌 서류상의 검토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삶의 터전이 옮겨지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설이란 곳에 발을 딛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란 온전히 시설원장 혹은 관리자들에 의해 관리, 감독된다.


그의 시설 탈출은 그렇게 시작됐다.



퇴소가 아닌 퇴출, 그래도 탈시설!


그가 시설을 나갈 수 있었던 계기는 역설 자체였다. 우연찮게 예외적인 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설 측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력적인 저항이, 역설적이지만 일종의 ‘쫓겨남’ 형식으로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엄마가 주신 용돈 3만원으로 술을 샀다. 처음에는 아저씨들 5명이랑 3병을 마셨다. 역시 부족했다. 나이 들면서 술을 배우게 됐고 밥보다 술이 더 좋았다. 시설에 있는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가게에 가서 6병을 더 사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이미 사단이 나 있었다. 한 아저씨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들끼리 싸운 거죠. 시설 측에서는 술 먹고 싸웠다고 제가 사온 6병을 확 가지고 가 버렸어요. 그래서 내 술 내놓으라고 소리 질렀어요. 원장과 소리 지르며 싸웠어요.”


아무리 싸웠다고 표현하지만 그건 그냥 악다구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상하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시설 안에서 원장의 말은 곧 법이기 때문이다.


“저보고 반성문을 써서 내라고 했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술 뺏긴 것도 억울한데. 싫다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따졌죠.”


그런 승배 씨의 모습을 보자 원장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자기 말이 먹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장은 즉시 그를 봉고차에 태워 수원 집으로 갔다. 시설에서 나간다는 것은 분명 ‘퇴소’라 해야 마땅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퇴출’당한 것이다. 2009년 6월 4일이었다. 그는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너무 좋아서”라고 했다. 시설에서 나온 이유가 뭐가 됐든, 25년 만에 가족에게 돌아간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마음의 병, 다시 시설로


“어머니가 보시자마자 우셨어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는 상황이 그렇다 할지라도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뭐가 좋았냐고 하자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가족을 만난 것도 그렇지만 다시 시설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요!”라고.


하지만 낙관적인 그의 생각과 상황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누나는 시간이 좀 흐르자 힘겹지만 담담하게 “엄마가 많이 아프시니 다시 시설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싫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꼼짝없이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어도 다시 시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집에 와 알게 된 어머니의 정신병력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그를 휘감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정신적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지난 해 잠깐 4개월 간 수원 집에 갔을 때였다. 그 전에는 전혀 몰랐다고 했다.


“가족 누구도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고 그냥 너 때문이라고 그랬어요. 집에 있을 때도 나만 보면 우시고 화내고 소리 질렀어요. 아버지를 의심하기도 했고.”


그는 하루 종일 가족들의 눈치만 봤다. 시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대화도 없었다. 또다시 TV가 유일한 친구가 됐다.



25년 만에 집으로, 그러나 그에게 가족은


25년 만에 가족들과 수원 집으로 귀향(?)했지만 가족과의 서먹서먹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누나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지만 여동생이나 남동생을 본 건 처음이었다.


“여동생은 대학을 나와 인천공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요. 남동생은 고 3인데 사춘기라 그런지 제가 집에 있던 몇 개월 동안 뭘 물어봐도 대꾸도 안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함께 했던 기억이 없으니, 형제자매라 해도 어색함이 존재하는가 보다. 하지만 만약 그의 부모님이나 누나가 그를 밝게 살갑게 대하고 가족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 때도 동생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누나가 그러는데, 엄마가 저를 낳고 몸이 말랐대요. 어딜 가면 쓰러지고 하니까, 동네 아주머니가 그럼 이런 시설이 있다, 보내라, 그랬대요. 일단은 엄마가 살고 봐야 하니까.”


집에 온 내내 가족들로부터 “엄마가 너 때문에 저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해 9월 어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면회를 가고 싶지만 그러면 더 심해질 뿐이라며 다들 반대했다. 27살 때 어머니 얼굴을 처음 봤다는, 아니 처음으로 기억한다는 그는 어머니에 대해 안쓰러움과 죄송함, 연민, 감사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나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니까 속상하고 죄송하죠. 그리고 15년 동안은 시설원장이 자꾸 돈을 달라고 하니까 아예 찾아오시지 않았어요. 전화나 편지도 못했고, 그러니까 가족에 대한 생각을 못했어요.”


그는 가족이 “다시 시설로 가라”는 말에 목구멍까지 치솟았던 “아니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아프고 힘들게 한 죄인이라는 생각이 차마 지옥 같은 시설을 거부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다시 포천 나눔의 집인가 하는 곳으로 갔어요. 목사님이 지체 장애인이었고 30명 정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완전 산이었어요. 새 건물 달랑 하나 있고 마당에는 자갈이 깔려 있고.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수동 휠체어를 이용하는 그였기 때문에 자갈마당이라는 외부 조건이 자신에게 얼마나 활동의 제약을 가져올 것인지 뻔히 내다보였다. 또 산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탈출도 어렵고 외부와의 접촉도 어려워 꼼짝없이 감금 상태가 될 것을 직감했다. 비록 짧은 4개월간 집에서 살았지만 일단 ‘자유’라는 것을 맛보았던 그였기에 다시는 죽어도 시설에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땅바닥에 누워 버렸어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누나랑 아버지가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화를 냈어요. 그래도 전 버텼어요.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그런 승배 씨를 보자 이 시설원장도 상황을 대충 파악했는지, 감당하기 어렵겠다며 못 받겠다고 했다. 아버지와 누나는 시설 측이 받지 못하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는 화를 내시고 누나는 아무 말이 없고, 승배 씨도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누나가 또 다른 곳을 알아 봤어요. 남산 한국재활원인가 하는 곳인데, 원장이 목사고 집 2층에 8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대부분 지적장애인들이었어요. 하루 잤어요.”


그는 일단 사람 수가 적고 대부분 지적장애인이니까 자기 숨통은 틀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시설은 시설이었다.



25년의 단절이 가져온 절망


“아침 9시에 TV를 켰는데 못 보게 했어요. 기도해야 한다고. 난 안한다고 했는데 억지로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2층 올라오는 계단 옆에 놓인 화분이랑 사무실 화분이랑 다 깼어요. 내 말을 안 들어주니까.”


보통 깡다구가 아니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순된 일상을 지내다 보면 무기력함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땡깡(?)이라는 것을 부린 경험이 있고 그것이 먹히기도 한다는 것을 안 것일까? 그는 의도한 바가 아니라 정말 화가 나서라고 했지만, 이 정도의 용기와 고집이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탈시설’이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원장이 바로 부르더니 짐을 싸라고 했어요. 아버지랑 누나가 왔고 저에게 화를 냈어요. 그냥 듣기만 했어요. 누나는 울면서 원장에게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계속 빌었어요.”


그는 “마음이 안 좋았다.”라고만 표현했다. 당신을 자꾸 시설로 보내려는 가족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물음에도 그저 “원망 없어요. 미안하기만 해요.”라고만 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졌고 또 그 원망이 자신을 향해 강하게 꽂혀 오는 것을 느껴서일까? 차를 타고 또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에 탄 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누나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는 누나를 내려 주고 저녁을 사주면서 결심한 듯 “정신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이 과잉행동으로 잘못 읽혀진 게다. 그는 두려웠다. 집에 잠깐 들른 사이 아버지 눈을 피해 버스정류장까지 도망갔다. 지금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다니지만 당시만 해도 잘 쓸 수 없는 양팔을 날갯짓하듯 하며, 수동 휠체어를 자기 발로 끌며 겨우겨우 힘겹게 갔다. 그러나 막상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해보니, 그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25년 동안 있었던 곳은 시설뿐이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몰라도 그의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그 막막함, 고립감은 결국 스스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집, 시설 두 가지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설에서 치매노인병원으로, 정신병원으로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 친구 한 분이 아버지가 자신을 정신병원에 보내려는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 왜 그런 곳에 보내려고 하냐고, 차라리 자신이 일하고 있는 전남 장성의 노인치매요양원으로 승배 씨를 보내라고 했다. 어머니가 승배 씨를 정신병원에 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몰랐다. 어느 날 아버지가 차에 타라고 해서 탔고 그냥 한없이 낯선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딜 가냐고 물어도 아버지, 누나 모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장시간의 거리였을 텐데, 가는 내내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도착한 곳은 낯선 요양시설. 치매 할아버지, 할머니뿐이었다. 승배 씨가 들어간 병실은 3층에 15명이 있었고, 문을 밖에서 잠가 바람을 쐬러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밥, 주사, 약을 줄 때만 잠시 열어 줄 뿐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일주일 동안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절망에 몸서리쳐서 단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그곳’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 친구로부터, “네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라고 요양원 측에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놀라고 속상하고……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언어장애 때문에 워낙 말을 잘 안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말도 잃었다.


그러나 하루 세끼를 잘 챙겨 먹어야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인간이기에 일주일이 지나자 배가 너무 고팠고 이러다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원장이 몇 개월 후에는 1층 자유로운 병실로 옮겨 준다고 약속해서 어느 정도 맘도 풀렸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적응케 했다.


그 후, 그는 2009년 11월 9일부터 2010년 4월 18일까지 노인치매요양원에서 ‘요양’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걸로 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또 한 번 일을 냈다. 같은 병실에 있는 약한 치매에 걸린 한 할아버지를 때리고 TV도 엎어 버린 것이다.


“자꾸 나한테 병신 새끼 지랄하네, 라고 하잖아요. 단식을 했을 때는 병신 새끼, 개새끼야, 밥 쳐 먹어! 그러고요. 정말 참을 수 없었어요.”


치매병원에서는 그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근처 정신병원에 그를 강제로 보냈다. “독방에 있었어요. 복도만 왔다 갔다 했어요. 바깥에는 전혀 못나갔어요. 약만 먹고 잠만 잤어요. 상담치료를 받긴 했어요. 딱 한 달 있었어요. 누나가 그러는데 한 달에 70만 원 줬대요.”


그는 “그냥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말썽 안 부리고 약 잘 먹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한 달 만에 퇴원시켜 줬어요.”


그는 치매병원에 돌아와서도 얌전히 지내며 사회복지사들과 친분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 결과 사무실의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을 잠시나마 할 수 있었다. ‘인터넷’, 그가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정신병원에서의 탈출


그는 김포 석암 베데스다에 있을 때, 이사장의 비리 문제로 장애인 단체가 양천구청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하고 점거투쟁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깃발과 플래카드, 낯선 단체 이름도 가물가물하지만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그들과 함께 집회에 참여하면서 그 사람들이 외치고 요구한 내용이 대충 자신이 원하는 ‘탈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들장애인야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인터넷 검색에서 전화번호를 구할 수 있었다. 무작정 전화를 걸어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준 적이 있던 장애인단체 활동가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해, 다짜고짜 “OOO이라고 하는 사람 아냐? 전화번호 알려 달라, 정승배 라는 사람이 장성 치매병원에 있다고 말해주라”고 한 것이다.


그 후 그 활동가와 연락이 닿아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주로 오간 대화 내용은, 나가고 싶다, 도와 달라였고, 조금만 기다려라, 준비를 하자, 곧 가겠다, 등의 얘기였다. 그러다가 그가 머물 수 있는 체험홈이란 주거공간이 마련되면서 단체 활동가들은 혼자 애달파 하는 그를 만나고 계획을 말해주기 위해 멀리 장성까지 면회를 갔다.


그런데 병원 측에서는 “면회 자체도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차를 타고 외출하는 건 안 된다”며 통제만 하려 들었다. 전혀 당사자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오히려 면회 간 사람들을 자극했다.


‘납치범’이라는 우여곡절을 겪긴 했어도 승배 씨와 무작정 서울로 왔고, 3주일 동안 ‘평원재’라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자립홈에서 기거했다.


“서울 가서 살 걱정, 겁, 전혀 없었어요. 그냥 좋았어요. 신났어요. 앞날에 대한 고민도 별로 없었어요. 거기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았어요.”


석암 베데스다에서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근심 걱정보다 해방감이 먼저였다. 오로지 “탈출이다! 해방이다!”라는 기분만 느끼고 싶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선 듣는 나 역시 해방감에 휘말렸다.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숙취에서 깨어나 박카스 한 병 시원하게 마신 그런 기분이었다.


“환자복 입은 채로 나왔는데 사람들이 옷을 사줬어요. 그 때 정말 더 신났어요.”


서울로 올라와 처음 기거한 평원재에는 석암 베데스다에서 ‘탈시설’을 실천한 네 명의 아는 형님들이 먼저 생활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다보니 반갑고 마음도 편했고 적응도 빨랐다.


시설에서 나왔다는 게 드디어 현실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자유인’으로 살아가기


세상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 없냐고 묻자 “장애인 무시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다고 대번에 답이 나왔다.


“무시하는 눈빛, 시선을 보면 때려주고 싶어요. 지금은 참아요. 근데 나는 15살 때부터 느꼈어요. 자원봉사하러 온 학생들이 내 흉내를 내고 약 올렸어요. 그래서 멱살 잡고 싸우기도 했어요.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모르는 사람이 반말하고.”


그래서 그는 현재 선배들과 함께 탈시설 네트워크 <이음>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집회 나가면 좋아요. 내 목소리 낼 수 있으니까. 장애인 운동 계속 할 거예요. 평생. 지금은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에게 맞는 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천천히 알아봐야죠. 공부도 하고.”


나는 그를 세 차례 만나 인터뷰하고 집회현장에서도 만났고 그가 여러 차례 사무실에 찾아 와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얼마 전 우리 단체 일일호프 행사에 그가 왔을 때 같이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 날 행사 후 내 나이를 잊고 젊은 친구들과 뒷풀이를 하다 보니 아침 8시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는데, 저녁 쯤 일어나 보니 승배 씨에게서 열통이 넘는 전화가 아침부터 와 있었다. 무슨 급한 일인가 싶어 전화를 했더니 “수고하셨어요.” 단 한마디였다.


“승배 씨 그 얘기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요?”하니, 그렇다고 한다. 그 마음씀씀이가 전해져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어린 격려와 애정이었다.


그는 요즘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가족과의 관계가 남아있지만.


자유, 이 말이 참으로 필요한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니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말이라는 것이 이런 거였던가. 평소 담담하게 받아들이던 단어가 새삼 생소해지면서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게 되었다.


그는 오직 실천으로 자유인이 되었다. 시설 밖의 세상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그도 생활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일단 시설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자유’를 말한다. 그렇다면 ‘시설’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풀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