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커다란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다

당신에게 현장은 무엇인가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서 노래하는 저 뮤지션들은 누구인가?’

한 뮤지션이 자신을 문화노동자라고 소개하고 멋진 노래와 함께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든 생각이다. 공연 기획에서 지출비용을 따지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고민하는 부분이 공연비 책정이다. 기획 초기부터 예산이 아주 적거나 아예 없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언제인가부터 뮤지션과 같은 이들이 투쟁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연대라는 단어로 이야기되며 그 가운데 이들의 노동은 묻혀버렸다. 자본과 정부의 고용 정책이 결국 적은 돈을 주고 말 잘 듣는 노동자들만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이, 자본이 인정하는 노동이 소수의 엘리트 노동이듯 투쟁 현장의 문화제에서 자본 또한 소수의 유명 인사에게로 집중되어 간다. 효과 대비 지출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문화제를 준비하는 당사자들에게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동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노동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문화노동자’라는 뮤지션의 소박한 자기소개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노동자라 이야기하기도 하고 비정규직 예술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일까? 왜 스스로 예술가라고 하지 않고 노동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예술도 노동이다. 예술 작업을 하는 것도 재화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노동인데 예술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모든 예술가는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다. 독립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은 더욱이나 영원히 비정규직에서 벗어날 수 없다.

2009년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문화예술인이 창작 활동을 통해 얻는 월평균 수입이 전혀 없는 경우가 37.4%에 달하며, 이들을 포함해 50만 원 이하인 경우가 49.4%에 달한다. 또한 정규직으로 취업한 문화예술인은 고작 22.9%에 지나지 않고, 비정규직을 포함한다고 해도 노동자의 지위를 갖는 문화예술 종사자는 33.3%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67%에 달하는 사람들은 최저임금, 시간외 수당, 휴일보장, 퇴직금 등 노동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으니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니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생계 걱정은 덜 수 있을지 몰라도 활동에 매달리지 못하니까 작업 능률이나 성과가 그만큼 높을 수 없다.

이 가난한 예술가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뭔가? 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이유는 뭔가? 이들이 자신의 재능으로 자신의 언어로 거리에서 외치는 이유는 뭔가?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오고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이면 속에 현실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보아야한다. 화려한 조명과 무대 뒤에 힘겨운 삶과의 투쟁이 있음을 말이다.

콜트콜텍, 하얀 종이 위를 덮은 검은색 크레파스

2008년 어느 날 한 시인의 제안으로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콜트·콜텍이라는 이름으로 기타를 만드는 회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해고는 참으로 어이없이 이루어졌다. 한창 정리해고가 유행이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문자 메시지 한 통으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경영 악화로 어려움이 있어 해고한다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순박한 노동자들도 정말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싸움 과정에서 밝혀졌듯 콜트·콜텍은 매년 당기순이익이 백억 원 이상 나던 ‘좋은’ 회사였다. 저렴한 노동력으로 더 많은 자본을 챙기겠다는 박영호 사장은 중국,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기면서 20여 년간 같이 일하던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의 5년여에 걸친 복직 투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은 치열했다. 세계 각지로의 원정투쟁과 한강 고수부지 철탑 위에서의 단식·고공 농성, 본사 점거, 천막농성 등 이들의 피로는 누적되어 바닥에 눌러 붙어버렸다. 성과가 전혀 없지도 않았다. 2009년 11월, 서울고법 행정1부(재판장 안영률)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다”며 콜트·콜텍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가 명백한 부당해고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2010년 4월 8일 검찰은 박영호 사장의 ‘근로기준법 위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고 벌금 500만 원을 물리기도 했다. 이렇게 법으로는 이겼지만 박영호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교섭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의 스케치북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들의 손에는 검은색 크레파스만이 쥐어져 있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이들에게 다양한 색깔의 크레파스를 전달하고자 했다.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기타를 사용하는 뮤지션들의 결합은 왠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만남이 서로에게 좋은 의미로 남기를 바라며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뮤지션들과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의 만남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사진작가들과 만화작가들이 모였다. 첫 공장견학을 간 사진작가들은 뿌연 먼지가 내린 공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카메라 플래시를 펑펑 터트렸다. 어둡고 추워보이던 공장 구석구석 화려한 조명들이 반짝거리며 숨죽여 지켜보던 기타 부품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느낌이었다. 이들의 모습이 세상에 나가면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잠시 즐거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

만화작가들은 이 사진들을 모아서 이미지로 재 작업하였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다시 뮤지션들과 소통을 위한 전시 작업으로 이어졌다.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신의 달란트로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을 이야기한다. 기타를 만드는 사람과 기타를 사용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뮤지션들이 많이 모이는 홍대 인근 작은 클럽에서 미술, 만화, 사진 등 다양한 영역의 작가들이 기타를 주제로 작업을 하고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기타를 사용하는 문화인들의 첫 만남이 있었다.

기타를 만드는 사람은 기타를 칠 줄 모르고, 기타를 사용하는 사람은 기타를 만들 줄 모른다. 이들은 서로에게 반응하며 교집합을 찾아낸다. 그것은 진정한 삶의 노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었다. 역시나 기타를 만드는 사람과 기타를 치는 사람의 만남은 달랐다. 서로를 교감하면서 서로의 노동을 감상하면서 소통을 하고 있었다. 이때만큼은 까만 노동의 스케치북에 스크래치가 가해지면서 무지개색의 화려함이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후 3년여 동안 우리들의 만남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르포집 준비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사이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다른 빛깔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기타를 사용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덧씌워진 검은 크레파스를 긁어내는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의 스케치북

언제나 그러하듯 노동자의 삶은, 약자의 삶은, 비주류의 삶은 기회의 불평등으로 넘쳐난다. 기회의 불평등은 권리마저도 빼앗아 가는 것이 현실이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는 가진 자의 전유가 되었으며,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건 의무만이 강요되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뿐이다. 노동자들의 문화적 조건은 특히 열악하다. 표현의 경험, 기회가 애초부터 불평등했던 이들의 현실은 자신의 문화를 생산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경험과 지원자를 필요로 한다. 문화연대와 문화예술인들은 삶을 위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현장에서 자신의 발언을 문화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권리 찾기를 위한 자율적인 문화행동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2011년 4월 초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100일이 다 되어갈 무렵 파견미술팀과 함께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85호크레인을 찾아갔다. 100일이 다 지나도록 35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외치는 정리해고의 문제를 문화적 표현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형 걸개그림을 크레인에 걸고, 조선소 공장 여기저기에 버려진 쇳조각들을 용접하여 85라는 이미지 작업을 하고, 해고는 살인이라는 그림 앞에서 사진 찍기 놀이도 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사진 이미지를 여기저기 뿌리며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문제와 김진숙의 이야기를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하얀 스케치북 위에 밑그림을 그린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수요문화제에 참가하려고 서울 홍대 쪽으로 나갔다. 마침 쌍용자동차 해고 투쟁으로 거리에서 자주 만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한 명이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라도 한 잔 해야겠다는 생각에 만나기로 했다. 우리의 차 한 잔은 현실의 이야기로 점점 어두워져갔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중 14명의 죽음 이야기, 콜트·콜텍, 재능, 발레오 등등 장기투쟁 사업장들의 절망적인 현장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은색 크레파스가 커피숍을 온통 휘집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여러 이야기 끝에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고공농성 129일째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는 것에 이르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2003년 당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 올랐다가 129일째 되는 날 해고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열사 이야기로 이어졌다. 85호 크레인은 모든 노동자와 민중의 절망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129일이 주는 압박감에 힘겨워할 김진숙을 위해 희망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모두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파견미술팀의 일원으로 현장에서 진행한 문화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연대라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놓고 다른 이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미술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소통의 도구로 삼아 현장을 찾아갔듯이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를 찾아가면 얼마나 좋은 그림이 되겠냐며 당사자 연대를 그려보았다. 그러나 일정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이번에는 또 다른 문화행동을 진행해보자 생각했다. 100이라는 숫자도 중요했지만 85호 크레인은 129가 주는 의미 또한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김주익 열사는 넘지 못했지만 김진숙은 살아 이 날짜를 넘게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마음으로 2011년 4월 말 미디어 팀과 함께 다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갔다. 처음 시작이 미술 행동이었다면 이번엔 미디어 행동이었다. 절망의 검은색을 벗겨내는 다양한 빛들의 출동이었다. 미디어 팀은 거대한 크레인에 레이저로 “해고는 살인이다”를 수십 번 써 내려 보기도 하고,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다는 뜻으로 예쁜 하트 모양을 그려주기도 했다. 지난번에 파견미술팀이 걸고 간 걸개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작업을 하고 영상으로 재편집하는 작업도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물을 한진중공업 공장 건물을 스크린으로 삼아 상영하기도 했다. 파견미술팀의 밑그림 위에 빨간 크레파스로 색을 입히고 온 기분이었다.

밑그림을 그리고 한 가지 색을 입히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다양한 무지개 색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연대가 연대를 만들어 내듯 소통은 또 다른 소통을 지향하는 모양이다. 드디어 2011년 5월 희망의 버스라는 이름으로 스케치북은 다양한 색들의 연대와 소통으로 이어졌다. 미술, 음악, 사진, 영상, 문학 등 문화예술이라 부르는 모든 예술노동이 한진중공업을 찾아갔다. 기타와 드럼으로 검은 공간을 노랗게 물들였고, 시인의 소박한 시 한 소절이 분홍색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사진작가들의 셔터가 보라색 이미지를 퍼트리고 있었다. 현장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었다. 다양한 방식의 스크래치가 검은색 크레파스를 여기저기 긁어대며 무지개 색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은 노동자들이 삶을 그려온 공간이며 현장은 본래 무지개 색이었다. 자본은 이 색들의 자유로운 만개와 조화를 탄압하기 위해 검은색 크레파스로 본래부터 검은색이었던 것처럼 사정없이 덧칠해 버렸다. 그러나 가려진 색들은 가려진 것이지 지워진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그 본래의 색을 찾을 것이다.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 길에 다양한 연대와 소통의 힘이 필요한 것이고, 이 힘 중의 하나로 문화예술가들의 역량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예술가들의 사회참여를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로 색칠할 필요도 없다. 불의에 저항하거나 진실의 빛을 찾아가는 것은 문화예술 본연의 자기 역할이기도 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도 비껴가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의 역량 역시 다양한 연대의 하나이고, 다양한 소통의 하나로 보았으면 좋겠다. 특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아닌 또 다른 노동자로, 또 다른 노동으로 그렇게 보았으면 좋겠다. 함께 그려나가는 그림처럼 말이다.

희망버스는 2011년 10월 현재 5차까지 진행되었으며, 정리해고와 불안정노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그 날까지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문화예술인들의 소통이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크레파스를 쥐어주는 역할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누구나가 자신 안에서 최선이며, 밝은 빛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세상의 검은빛을 뚫고 모든 이들이 아름다운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갖게 되는, 그런 세상을 향한 벅찬 꿈을 왜 덮어야 하겠는가. 웃으면서 즐겁게 끝까지 투쟁! 시대의 망루에서 김진숙이 늘 외치던 말이었다.



덧붙이는 말

* 스크래치(Scratch)는 미술용어에서 말 그대로 ‘긁어’ 표현하는 방법. 도화지에 (주로 크레파스 사용) 여러가지 색상을 사용해 밑색을 칠한다. 다 그린 그림 위에 검은 색을 완전히 덮은 후 송곳이나 못 등으로 원하는 그림을 그리면 밑색이 보이면서 바탕의 검정색과 조화를 이룬다. 칠했던 여러 색들이 드러나면서 이미지가 선으로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는 기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