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99% 사람들과 평화를 일구며 산다

당신에게 현장은 무엇인가

나는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인가. 새만금, 대추리, 용산, 두리반 그리고 이젠 제주 강정마을. 어쩌자고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또 들어와 있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지금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제주말도 이젠 좀 알아듣고 마을 주민들의 얼굴도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함께 먹는 밥이 맛있어서 착근 과정이 순조롭다. 사람들이 묻는다, 왜 또 강정까지 갔냐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것이냐고. 나는 끝까지 있겠다고 대답한다. 끝이 언제가 될 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다.

행정대집행, 그 생생한 국가폭력

지난 7월 초 평화크루즈를 타고 강정마을에 처음 내려왔다. 당시 며칠 만에 서울로 돌아가면서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꼭 다시 오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올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언제 다시 내려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복잡했었다. 나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가는 희망의 버스를 조직하고, 공연을 기획하고, 잡년행진을 준비하고, 밴드 활동을 하고, 명동 마리에 다니면서 미뤄둔 글도 쓰고 ‘피자매연대’ 일도 해나가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순간, 강정마을에 행정대집행이 준비된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행/정/대/집/행. 2006년 황새울의 기억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다시 친구들이 잡혀가는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겨우겨우 도망을 치고 있었다. 현실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나 강정마을을 통째로 부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이곳을 잃는다는 것은 그냥 들려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완전한 박탈이고, 철저한 학살이다.

평택 대추리에 철조망이 쳐지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했던 그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2006년 5월 4일. 그날 황새울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한다. 전날 밤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하얗게 밤을 지새던 평택지킴이들과 이튿날 새벽 황새울을 시커멓게 메우던 2만 명의 군인과 경찰들. 그날 우리는 두들겨 맞고, 다치고, 부러지고, 피를 흘리고, 끌려가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펑펑 울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그날의 기억은 내게도 트라우마로 남았는가 보다. 내 무의식에 꼭꼭 눌러놓았던 그 기억이 제주 강정마을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을 보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작전명으로 진행됐던 평택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 대한 유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국가폭력이, 그 죽임이 구럼비 해안가에서 매일 같이 자행되고 있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지워버리고 싶다. 오늘도 마을에 비상 사이렌이 요란하다. 구럼비 바위에 발파작업을 한단다. 국회의원과 해군참모총장 등 거물들이 연이어 해군기지사업단을 방문한다. 제주도지사와 제주도의회가 기지건설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공사 중단을 요청함에도 해군은 요지부동이다. 마을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은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으로 발이 묶여 있다. 오늘은 천주교 신부님들이 레미콘 차량 위에 올라가 공사를 저지하고 끌려간다. 매일이 전쟁이고, 하루가 한 달 같다.

우리도 멸종 위기인 것은 아닌가

강정마을은 오래 전부터 와보고 싶었지만 두리반 철거농성이 마무리되기 전에는 다른 투쟁의 현장에 신경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두리반에 있으면서 시시각각 전해지는 85호 크레인과 강정마을의 소식을 들으며 발만 동동 굴렀다. 서울 홍대 부근 허름한 철거 건물 한 켠에서 마음만으로 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두리반이 승리로 마무리되자 나는 먼저 1차 희망버스를 탔다.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바위처럼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희망버스 안에서 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날라리들, 잉여들, 촛불, 다중, 잡년, 잡민, 지킴이, 99%, 외부세력, 또는 세상이 확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혁명을 바라고 있었다. 달팽이들이었고, 개미들이었고, 일벌들이었다. 자발적 시민들이었다. 모래처럼 흩날리다가도 모래처럼 주머니 속을 파고들고, 모래처럼 속수무책으로 준설되다가도 다시 모래처럼 거대한 산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바람은 너무나 소박하고 절실해서 하늘에까지 금방 닿을 것 같았다. 감동(感動)이라는 한자어로 설명할 수 없는 뜨거움으로 내 마음도 마구 요동쳤다.

강정마을에서도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거북손과 따개비들, 위태롭게 버티면서도 끝끝내 살아남는 아주 오래된 생명체들처럼, 그늘처럼 숨어 있다 나와서 어느 순간 한줄기 빛이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전직 요리사와 전직 특수교사와 전직 목수와 전직 회사원과 전직 전업주부와 전직 매니저와 전직 알바생들이었다. 실업수당을 받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꿈인 직장인, 자퇴생, 탈 학교생, 휴학생, 대학생, 아마추어들이었다. 또는 그저 농사를 짓던 웃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모여들어 숲을 이뤄가는 제각각의 나무들이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불복종 행동을 하다 경찰에 연행돼 48시간 동안 유치장에 있다가 조서를 쓰고 입건된 사람들이었다. 제각각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대안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평택 대추리의 뼈아픈 고통을 다시 겪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4.3학살과 광주학살과 용산학살이라는 잔인한 국가폭력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지금 누구와 혁명을 할 것인가. 어디에서 나는, 토건재벌들이 운전대를 잡고 금융 자본가들이 가속페달을 밟으며 전 사회의 군사화로 돌진하는 이 미친 자본주의에 구멍을 낼 수 있을 것인가.

평화를 위협하는 해군기지 건설을 온갖 불법, 위법, 탈법을 자행하며 강행하는 것도 모자라 이 자본가 정부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주민들을 가두고, 중덕 해안가 출입을 막은 채 이 모든 생명들을 매장시키고 있다. 이 구럼비 바위에 황새울을 유린해 간 폭력이 되풀이되어선 절대 안 된다는 마음으로 내 모든 힘을 끌어올려 이 살육을 막고자 했다. 9월 2일 구럼비 바위로 가는 중덕삼거리에 펜스가 쳐지기 전까지 중덕바다는 그 긴장감 속에서도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저 바다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가. 나는 그 경이로움에 감사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오후에 차근차근 구럼비 바위를 둘러보거나 날이 더우면 용천수가 솟아나는 바닷가에 그대로 뛰어들기도 했다. 겉으로 보이는 물살은 잔잔했는데 물속은 해류가 세찼고, 바다수영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바위에 부딪혀 피가 나기도 했다. 거기엔 온갖 물고기들과 성게와 보말과 해초와 말미잘이 가득했다. 나는 흠뻑 취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차올라왔다. 두리반 투쟁 막바지에 피기 시작한 독한 담배를 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노래 가사가 흘러나왔다. 서울에 있을 때는 단 한 줄도 써지지 않던 것들이 내 앞에 펼쳐진 저 아름다움 앞에서 그냥 말이 되어 나왔다. 나직하게 노래도 불러보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몇 시간 동안 축 늘어져 있었다. 그냥 평생 이대로 있어도 좋을 듯싶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누구나 한순간에 훅 가버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구럼비 해안에 발을 디뎠을 때 느꼈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라고. 바로 여기에 머무르고 싶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절절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내려오기 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던 구럼비 바위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혼란도, 우울도 말끔히 가셨다. 조각조각 나있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었다. 아홉 종의 멸종 위기 동식물들이 사는 곳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나 역시 멸종 위기까지 몰렸는지도 몰랐다. 붉은발말똥게를 지키고 싶었던 건 어쩌면 어떻게든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일 게다.

강정마을에서 지내고 싶었지만 제주도는 멀었다. 평택 대추리처럼 서울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낼 수 없었다. 아예 서울 삶을 당분간 정리하고 내려가 사는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살면서 놀라운 일들이 많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공권력의 무자비한 남용이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논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기서는 경찰과 해군의 명령만이 통한다. 어떤 항의에도 귀를 틀어막은 채 구럼비 바위를 깨고 콘크리트를 쏟아 붓는 공사는 주말도, 휴일도 없이 강행된다. 이명박 정권은 검찰과 경찰, 국정원과 기무사 등 거의 모든 억압적 국가기관을 총동원해 강정마을을 짓누르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군인들까지 동원해 평택을 억눌렀던 것처럼, 강정은 그저 계엄이다. 공사장을 넘어 갔다는 이유로 해군 특수부대원들이 대학생들을 폭행하는가 하면, 공권력이 민간인을 바닷물에 빠뜨려 생사의 위기에 몰아넣은 사건도 몇 차례나 발생했다. 경찰에 의한 폭행도 부지기수다. 상황이 발생하면 일단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채증을 일삼는다. 그리고 사진에 찍힌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출두요구서를 보낸다. 집회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공동정범으로 몰아세운다. 서귀포경찰서장이 직접 현장에 나와 검거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인권은 아예 없다. 공권력의 힘은 누가 저들에게 부여한 것인가? 필요한 경우에 한해 최소한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사라지고 저 독점된 무력은 명령권자의 기분에 따라 멋대로 날뛴다. 절실함만으로는 이런 현실을 바꿔낼 수 없다. 현장에서 끈질기고 꾸준하게 문제제기를 하며 이에 반하는 힘을 모아내야 한다.

누군가 우물을 파야 한다면 내가

솔직히 현장은 항상 힘들다. 사람은 언제나 부족하다. 활동가가 열 명만 더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내가 둘이었다면, 내 몸이 세 개였다면 바란다. 하나는 여기서 노래를 만들고, 촛불문화제 공연과 음반 제작, 밴드 연습 등을 하고, 또 하나는 중덕삼거리 다방 바리스타로 매일 커피 생두를 볶아 손수 내린 시큼달콤한 원두커피를 대접하며 트위터 등에 실시간으로 마을 돌아가는 소식을 올리고, 자주 찾아오는 국제 활동가들 통역을 하고, 마지막 나로 하여금 카약 타는 법이나 바다수영을 배워 펜스와 철조망으로 막힌 구럼비 바위에 해상으로 진입하거나 다른 여러 방법으로 공사 저지 직접행동에 매진하게 하고 싶다. 강정마을에 평화활동가가 백 명만 더 내려와 상주한다면 해군기지 공사도 당장 중단시킬 수 있겠고, 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해 예로부터 일강정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서 땅을 일구고 진짜 생명평화마을로 탈바꿈시킬 본격적인 프로젝트들을 착착 진행시킬 수 있겠다는 꿈을 꾼다.

허나 아쉽게도 현실은 빈곤하다. 그래서 목이 마르다. 누군가 우물을 파야 한다면 내가 파자. 아니, 이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해 희망이 콸콸 솟구쳐 흘러나올 커다란 오아시스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이다. 어쩌면 나는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조금씩이라도 바뀌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고 싶다. 내가 먼저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혁명의 에너지가 잠재된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가보고 싶다. 그 흐름에 온전히 날 맡기고 동참하고 싶다. 스스로 행동을 하고 싶다. 지난 시기 혁명가들이 지금 살아간다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것인가 물어본다. 제주도 남쪽 끝 인구 2천 명이 채 되지 않는 이 조그만 마을에서 시작된 평화의 메아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진심으로 보고 싶다. 그래야 이 미친 세상에서 소소한 행복이라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심정으로 나는 강정마을이라는 이 시대의 현장에 들어와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살아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2011년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으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꼽는다. 나는 둘의 공통점이 보였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이해할 수 없었던, 누구에게서도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뛰어든 사람들이 그 한 가운데 있다. 이들은 마음이 움직여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이다. 소셜 네트워크로 서로를 조직하고, 끊임없이 소식을 교환한다.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를 걱정하며 몸이 현장에서 잠시 멀어져도 마음은 항상 현장에 머문다. 그래야 마음이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중 기간을 정해 모이라고 하지 않아도 항상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때를 기다리며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고, 두려움과 분노가 공존하며, 용역깡패와 경찰과의 대치에서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평화를 찾는 이들이다. 각자의 소망들을 간직한 채 즐겁게 살고 싶어서 온갖 계획을 세우며 행복해하는 사람들, 삶을 싹 정리한 채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사람들, 자신만의 크레인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농성장에 찾아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 무료 진료를 하고, 쌀과 김치와 음료수와 커피 생두를 보내고, 후원금을 넣고, 뺏지를 사고, 시집을 읽고, 평화비행기를 타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고, 끝없이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들, 요리를 하고, 서명을 받고, 커피를 내리고, 일인시위를 하고, 손 피켓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고, ‘무한펌질’을 하는 99%의 사람들과 함께 나는 평화를 일구며 산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꿈을 이루며 사는 요즘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