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청소년 활동가들의 운동 안팎을 향한 투쟁

청소년, 그들의 저항 그리고 정치 - 청소년 활동가로 살아가기, 살아남기

기록과 정리 한낱 |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사회 배경내 |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날짜와 장소 2011년 12월 17일, 인권재단 사람


2011년 12월 16일, 주민발의를 통해 제출한 서울학생인권조례안이 시의회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었으나 심의가 미뤄졌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조차 시기상조를 운운하며 조례 통과에 부정적 견해를 내비쳤다. 추운 겨울부터 한 여름에 이르기까지 서울 시민 10만 명의 서명을 받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던 청소년 활동가들은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1)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날, 좌담을 위해 다섯 명의 청소년 활동가들을 만났다.

2010년 지방선거를 통해 총 6개 권역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됐다. 이에 힘입어 교육청 차원에서 학생인권조례 혹은 유사 조례를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번져 나갔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학생인권조례가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 그동안 청소년 활동가들이 인권운동의 의제로 꾸준히 학생인권을 주장해왔던 역사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전국적인 흐름이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청소년 인권운동에서 학생인권이라는 의제는 각별하다. 두발자유, 체벌금지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학생인권운동은 말 그대로 “학생도 인간이다.”라는 당연한 명제를 학교 안에 등교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렇다고 청소년 활동가의 인권활동이 모두 학생인권으로만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를 지나 꾸준히 성장한 청소년 인권운동은 이제 사각지대에 놓인 학교 밖 청소년 혹은 청소년 노동자들의 권리를 고민하는 데까지 그 의제가 확장되었고 여성청소년과 청소년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새로운 모임들 역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2008년 촛불 정국 이후 청소년 인권으로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고 투쟁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이 증가했다. 특히 홍대 두리반, 명동 마리와 같은 철거 투쟁 현장에서 청소년 활동가들의 얼굴을 쉽사리 마주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어른들’과 함께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이 ‘어린 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무얼 먹고 사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하는가? 살기 위하여 활동하지만 일단은 살아남기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활동을 펼치고 있는 분들을 섭외해 모셨다.

[참석자]
공기 1993년생. 17세에 탈학교. 2008년 촛불 집회에 참여하면서 청소년 인권활동을 만남. 두리반, 마리 등 재개발 반대 농성 투쟁에 함께함. 사회당 청소년 위원회 준비모임,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참여.
따이루 1993년생. 16세, 18세 두 번의 탈학교. 학생들에게 시비 거는 강남 출신 영어교사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온라인 카페 발견, 활동 시작. 2007년, 인권활동을 반대하는 집과의 투쟁으로 가출/독립 감행하여 3년간 지속. 청소년 알바 노동의 실태를 알리는 활동도 함.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참여.
아리데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2008년, ‘입진보’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소개로 청소년 인권운동 알게 됨. 이곳저곳 찾아보다 아수나로 알게 됨. 아수나로 인천지부에서 주로 활동하며, 인천 인권영화제 자원 활동도 함.
한민성 1993년생. 15세에 탈학교 후 고등학교 다시 진학. 운동의 시작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 모호함. 사회에 불만 많은 불온세력. 2007년, 제도권 밖 교육을 고민하는 민들레 사랑방(現 공간 민들레)을 잠시 다니기도. 명동 마리 투쟁을 하며 청소년 활동가들을 만남.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를 구성해 활동 중.
혜원 1993년생. 18세에 탈학교. 아수나로 남양주 지부 활동가. 2009년 일제고사 반대 투쟁 때 전교조 간부인 엄마 손잡고 집회에 참여했다가 아수나로 활동가들 만남.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 가운고 무더기 강제자퇴 사건해결 대책위원회 등 참여. 경기학생인권조례 정착화 사업에도 열중. 2012년 대학 입학 예정.

길지 않은 인생, 짧지 않은 활동의 역사

배경내 본인이 청소년 활동, 청소년으로 운동하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본인이 해왔던 무수한 활동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 마음이 많이 쓰이는 활동이 있다면 그것을 중심으로 소개해주셨으면 한다.

공기 2008년도에 부산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왔다. 그 시기가 딱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집이 서울과 가까워져서 집회에 나가기 좋았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매일같이 집회에 참여했다. 집회의 연속인 생활을 하다가 촛불이 사그라지는 시점에 일제고사 반대 투쟁을 알게 되었다. 아수나로가 촛불 청소년 모임에 연락을 취해 왔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당시 일제고사 반대 투쟁의 한 방식으로 등교 거부를 했다. 시험이 이틀간 이어졌는데 하루는 등교 거부를 했고, 하루는 OMR 답안카드에 ‘Say No’(2)라는 글자를 새겨 답안 마킹을 했다. 학교 선생님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담임선생님이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을 바꾸려면 그런 짓 하면 안 된다, 성공해서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바꾸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게 가장 애틋한 활동은 일제고사 반대 투쟁과 최근에 했던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투명 가방끈 활동이다.

배경내 촛불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공기 촛불의 처음 화두가 미국산 쇠고기 문제였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데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부자들처럼 한우를 사먹을 수 없고, 그러면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야 하니까 그게 싫어서 나갔다. 그리고 전경들이 사람들 때리고 물대포 쏘는 것을 보면서 같은 국민들에게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2007년 대선 때도 할머니한테 정동영, 민주당을 뽑으라고 말했다. 정동영 공약 중에 집을 준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웃음) 그런데 투표소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자신은 이명박을 뽑았다고 하더라. 왜 뽑았냐고 물어보니까 거기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이명박 뽑으라고 했다고. 선거, 정치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 후 안티 이명박 온라인 카페에 가입했다.

배경내 일제고사 투쟁이 각별한 이유를 좀 더 말해준다면?

공기 촛불과는 다르게 내 현실에 대해 자세히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반대하고 투쟁하면 일제고사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교육청 앞 기자회견을 하고, 집회를 하고, 농성을 해도 안 바뀌더라. 열심히 해도 세상이 잘 안 바뀐다는 걸 크게 느끼니 오히려 애착이 갔다. 밤늦게까지 무언가를 준비하고, 피곤에 쩔어 있고. 결국 이런 고생이 추억으로만 남는 것이 짜증날 때도 있지만 그때가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실패의 경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가 두리반이나 마리, 현대차 사내하청 성폭력 사건 해결과정에 함께 하면서 승리의 맛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활동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배경내 혜원도 일제고사 반대 투쟁을 통해 활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아니었나?

혜원 공기가 많은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첫 행동을 하는 계기였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엄마가 시험 안 볼래?”해서 좋다고 집회에 따라갔다. 거기서 처음 만났던 사람이 공기와 따이루였다.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 건 학교 탓이 컸다. 중학교는 구미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 때 남양주로 이사를 왔다. 사립 미션 스쿨이었는데 입학식 날 학교를 갔더니 선생님 얼굴도 보기 전에 신입생들에게 학교에서 찬송가를 부르게 시켰다. 종교와 상관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대강당에 모아놓고 예배를 보게 했다. 평일에 등교하면 수업 시작 전에 반별로 기도회를 했다. 자기 반성하는 일기를 쓰라고 하고, 성경을 읽으라고 하고. 정말 적응이 안됐다. 전학 가서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친구랑 밥도 같이 먹고 등하교도 같이 하기로 약속했었다. 근데 그 친구랑 1년 동안 딱 한 번 집에 같이 가봤다. 선생님이 오셔서 그 친구를 데리고 가더니 뭔가 얘기를 했다더라.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성적이 좋아서 심화반이 되어 자율학습을 밤 10시까지 해야 했다. 그러면서 유일한 친구와 친해질 수 없었다. 학교에 불만은 쌓이고, 견딜 수가 없고, 활동 할수록 아는 것은 많아지니 더 괴로웠다. 학교에서 성가 대회를 하는데 기독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학교에서 그날은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 그래서 학교를 안 나간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보니 청소년인권운동에 더 매진하게 되었다. 올해는 운동할 때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가운고 투쟁(3)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루 단위로 상황이 바뀌니 잠도 못자고 글 쓰고, 면담을 가고 그랬다. 그 때 엄마가 “너는 학교 싫어서 때려 치워놓고 걔네들은 왜 학교로 돌려보내려고 하냐”고 물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학교라는 공간이 계속해서 자기의 기준, 사회의 기준에 맞지 않는 학생들을 추방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학교를 나오길 선택한 거고, 그 친구들은 학교로 돌아가길 선택한 것이다. 내 모습과 그 친구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화장을 했다고 혼내고, 파마했다고 모욕을 주고.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다. 나도 머리 파마한 날은 (교사에게 안 잡히려고) 아침 6시 반에 등교하고 그랬으니까. 그 친구들이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뭐라도 바꿔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못한 걸 그 친구들은 선택을 한 것이니까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학교와 교육청과 싸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배경내 일제고사 집회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것에 끌렸나?

혜원 막연히 시험을 보기 싫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농땡이 부리는 거라고. 그런데 집회에서 만난 청소년 활동가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견고한 의견을 만들고 있었고,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학교에서는 절대 그런 친구들 못 찾아 봤으니까. ‘나랑 동갑인데 쟤는 왜 교수 같고, 선생님 같지?’하고 생각했다. (따이루, “공기, 역시 우리한테 끌린 거지?” 웃음) 내가 주장하는 것들이 단순히 내 치기만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민성 나는 여기 와있는 것이 좀 그렇다. 내 자신을 청소년 활동가라고 칭할 만큼 이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사회에 불만 많은 불온세력이었고, 그런 애들끼리 학교에서 아웃사이더처럼 모여 있고, 같이 책을 읽었다. 중학교 때 포이동에 살았다. 어중간한 크기의 전셋집에 살았는데 대치동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한 교실에 완전히 분리된 두 계층의 아이들이 있었다. 포이동 쪽 애들과 포이동이 아닌 애들 성적 차이가 20점 정도 났다. 그런 곳에 있으면서 나는 어디에 속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나는 그 중간이었고, 두 부류와 다 친했다. 도서실에 처박혀서 ‘왜 쟤들은 저렇게 다른 세계를 만들까’ 궁금해 했다. 이 생각이 확장되어서 계급론 같은 것도 공부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학교가 더 마음에 안 들었다. 학교가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계급사회를 유지시키고 재생산만 부추기는 곳이더라. 교사들도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학교를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나왔다. 책 읽고, 시민단체 활동가인 엄마 일도 돕고, 민들레 사랑방도 잠시 다니다가 검정고시를 치렀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줄 알았는데 검정고시 성적이 잘 나왔다. 계속 공부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이사를 해서 군포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바로 두발 검사하고 학생들을 잡더라. 그 전에는 내가 청소년 계급 혹은 계층이라는 자각을 못했는데 이때 확 와 닿았다. 교복 입고, 머리 깎이는 것에 불만 있는 아웃사이더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함께 학내에서 피켓 들고 다니고, 도서실에서 책 읽고, 학교에 문제제기 하고 그랬다.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같이 활동하고 있다. 아수나로라는 단체가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결합은 안하고 학내에서만 싸웠다. 그러다 학교에서 엄마를 소환했었는데, 우리 엄마도 보통이 아니다. (웃음)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나만 머리를 안 깎고, 파마도 했다. 어떻게 보면 나만의 승리였다. 구조는 바꾸지 못했고. 일제고사 때도 그냥 잤고, 답안지에 장난으로 ‘김일성 만세’라고 낙서했다. 2학년, 3학년 올라가면서 마음이 불안해지고, 그러면서 공부를 잘 안했다. 싸우는 것도 귀찮고. 이에 대한 회피로 명동 마리와 같은 투쟁에 합류했던 것 같다. 공부가 싫으니까.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으로 당을 옮기고, 마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안에서 보니 우연히 진보신당 청소년 당원이 8명이 있더라. 왜 우리가 그동안 아무런 목소리를 안냈었지? 의문을 품으며 진보신당 청소년 위원회를 만들었다. 많은 친구들을 입당시켰다. 학내에서 같이 싸웠던 친구들이 입당해서 우리 학교 6명이 진보신당 당원이었다. (웃음)

배경내 가장 애착이 가는 활동을 말씀해주신다면?

한민성 당에서 활동하며 논의했던 여러 가지 청소년 관련 의제들이 떠오른다. 민주노동당이랑 통합 논의가 있었는데 통합 진보당 강령 초안을 보니까 청소년 관련 내용이 쏙 빠져있었다. 진짜 노력해서 진보신당 강령 29조(4)를 만들었었는데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 정치적 자립의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아예 강령에 청소년 한 글자도 없더라. 학생이라는 언급은 나오지만. 이걸 가지고 당 대회 때 피케팅도 하고 논쟁도 했다. 꼰대 아저씨들 만나면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진보라는 이름을 달고 있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계속 설득했다. 이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배경내 파란만장한 삶이다. 아리데 님은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셨나?

아리데 우리 아버지가 지금은 아수나로를 고소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진보적이셨다. (웃음) 실제로 예전에 청와대 앞에서 점거도 하고, 시위하다 끌려가기도 했다더라. 아버지가 전교조 교사시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앉혀놓고 노동자나 계급에 관한 이야기 들려주셨다. 너는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학교에서 벌어졌다. 첫날부터 교문에서 애들을 잡고, 머리를 자르고. 왜 이렇게 해야 하냐고 선생님에게 물으니 규제를 안 하면 술 사고 담배 살 수도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대셨다. 뭔가 아닌 것 같더라.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물어보니 쭉 설명을 하시면서 결론은 나쁜 거라고 알려주셨다. 학교에서는 당연하다고 하는 걸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던 거다. 중학교 1학년 때 촛불 집회가 있었고, 가족들이 단체로 참여했다. 혼자서 집회를 가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어린이 혼자 있으면 슬프다, 위험하다, 집에 가라”는 말을 많이 했다. 왜 그럴까. 나는 지하철도 혼자서 잘 타는데. 짜증이 났다. 그러다 아수나로를 알게 되어 가입했다. 예전에 『열정세대』라는 책을 읽었다. 다른 삶을 사는 청소년들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인데 거기에 실린 따이루가 실제로 있더라. (웃음) 아버지도 처음에는 활동을 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처음 회의에 갔는데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활동 시간이 점점 늘어나니까 아버지가 슬슬 공부해야 하지 않냐고, 무슨 얘기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어보셨다. 대학 평준화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버지가 내 의견을 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말에 반박을 못하고 계속 울고만 있었다.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도 공부를 해서 저 나쁜 아버지를 이겨보고 싶다! 그 때부터 열심히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나도 일제고사 투쟁이다. 학교에 빠진 걸 아버지가 알고 전화를 하셨다. 이야기를 쭉 하니까 아버지가 열심히 해라, 지지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날 신나서 집에 들어갔는데 또 앉혀 놓고 반론을 펴시기 시작했다. [공기, “아버지 밀땅(밀고 당기기) 장난 아니다.”] 하지만 그날은 드디어 내가 이겼다. 다음날도 학교에 빠졌고.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와의 투쟁에서 성공한 것도 있지만 내가 처음으로 학교를 빠진 날이기도 해서 많이 기억에 남는다.

공기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유를 갖고 학교 빠진 날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아리데 계속 개근상을 받아왔다. 학교 안가고 싶은 날은 감기 들었다고 핑계 대고 그랬다.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따이루 초등학교 때까지는 삼성 CEO를 목표로 성균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웃음)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내 앞에 수백 마리의 (교복 입은) 검은 무리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징그러웠다. 막상 들어가서는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했는데 그러다 영어 교사와 싸우기 시작했다. 강남 출신인데 너희가 불쌍해서 구로구에 와줬다 등등 애들한테 모욕을 주고, 교과서 안 가져오면 페이지 수만큼 머리를 때렸다. 어떻게 하면 저 교사를 괴롭힐 수 있을지 검색하다 아수나로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다. (웃음)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것 같아 열심히 개조시키겠다는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두발 자유 시위, 학생인권법 제정 활동 등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학생인권법 제정 촉구 서명을 학교 안에서 받기도 했는데, 우리학교 1학년 총 400명 중 200명에게 받았다. 서명 받다가 선생님한테 걸려 이미 다 받은 서명지를 빼앗길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잘 넘겼다. 그 이후로는 활동하면서 학생부 선생님에게도 끌려가고, 학생인권 뺏지 달았다고 혼나고. 중학교 내내 싸웠다. 중학교 3학년 때 촛불 집회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촛불 분위기도 싫고 재미도 별로 없었다. 청소년들도 얼마 없어보였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르게 폭발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그냥 앉아 있기 지루하니까 참여할 방법을 연구했다. 다른 청소년 활동가들과 거리에 낙서도 하고,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학교에 있는 것보다 훨씬 재밌다보니 학교를 자주 빠지게 되고, 결국 출석일수 부족으로 제적 위기가 왔다. 결국 중3 말에 자퇴를 하게 되었다.

배경내 자퇴 후에 활동 방식이 달라졌나?

따이루 인생의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학내 운동이 아닌 학교 밖 운동이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다른 애들이 일을 많이 시켜서 실무 능력이 완전 증대됐다. (웃음) 기자회견 준비정도는 하루 전에 뚝딱 가능할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 그렇게 살다가 다시 학내 운동, 학생회 운동, 교육 운동 하고 싶다는 고민이 많아졌다. 자퇴 7-8개월 만에 위장 취업 느낌으로 고등학교 1학년으로 복학했다. (웃음) 너는 아무리 봐도 학생이 될 수 없다는 우려를 들으며 갔는데 결국 몇 달 만에 다시 자퇴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살이 되었고 말로만 하던 대학입시거부 운동을 했다. 어차피 대학에 안 갈 것이지만 내가 대학에 안 가는 이유를 사회에 대고 목소리 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배경내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독립해 살았던 이야기도 해주시라.

따이루 2007년 11월 11일. 제 2의 생일이다. 2007년 민중 총궐기 집회에 가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뉴스마다 시청 광장이 봉쇄되고 경찰이 투입된다고 방송이 나왔다. 엄마아빠가 집회에 가지 말라고 협박을 했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편지 한 통을 쓰고 나왔다. 편지 써놓고 통금 시간되기 전에 들어왔는데 집에서 쫓겨났다. 공현 활동가의 집에 얹혀살면서 가출과 독립의 어정쩡한 위치에서 3년을 살았다. 엄마는 보험 하나 들어준 것 말고는 별다른 교류 없었다. 학교와 가정이 사라지니 실무 능력이 다시 급상승했다. 일만 생기면 다들 따이루를 찾고. (웃음) 토론회에서 청소년 패널이 필요하면 나를 부르고. 그 놈의 생생토크! (배경내, “너의 생계지원비를 마련해주려고 그런 거야.”) 나름 재미있었다.

배경내 제일 애착이 갔던 활동은?

따이루 학생인권 운동을 하고, 2007년에 이랜드 비정규 투쟁을 겪으면서 학교의 경쟁 교육이 못된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뉴스에서 월드컵 경기장 홈에버 점거 상황을 보여줬는데, 내게는 혁명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어떤 공간을 점거한 걸 리얼하게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뜻에 동의하는 수많은 노동자와 사람들이 몰려들고. 문화 충격이었다. 다음 날 교회에 안가고 화사한 옷 입고, 놀러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점거 농성장에 갔는데 인권운동 사랑방 사람들을 만났다. 벽보도 같이 그렸다. 그냥 결합하는 것보다 청소년 활동가로서 함께 하면 좋겠다 싶어서 ‘비정규직 저주를 푸는 청소년 119명 선언’을 준비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서 118명을 모았다. 내가 주도해서 성사시킨 첫 번째 일이었다. 용역들이 와서 기자회견 현수막도 뺏어가고 난리를 피워서 얼마나 서럽던지. 이랜드 투쟁으로 용역의 문제점부터 비정규직 문제, 학교 교육과 사회의 연관 문제, 기독교의 문제까지 내 삶의 문제를 전부 다 건드렸다.

청소년 활동, 어디까지 성장했나

배경내 참여하신 분들의 활동사를 들어보니 청소년 인권 현장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바깥의 사회운동과의 관련성도 느껴진다. 여러분이 활동해온 만큼 이 자리에 없는 다른 청소년들의 활동만큼 예전보다는 청소년들의 정치활동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청소년 활동이 대세라는 농담도 했는데, 청소년 인권활동이 어디까지 변화해 오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견을 들려 달라.

공기 대세라는 말은 취소한다. (웃음) 그렇지만 다른 운동 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은 든다.

배경내 운동 사회 안에서 예전보다는 청소년의 목소리가 고려되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느낌인지?

혜원 그러기 위해서 정말 많이 ‘지랄’해야 했다. 회의 때마다 부딪히고.

배경내 예전의 청소년 단체들은 주로 어른들의 지원 하에 보여주기 식 운동을 많이 했다. 청소년들 스스로 만든 조직은 1년을 못 버티고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비해 아수나로는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전국 지부까지 건설하면서, 물론 내부 한계는 있을 수 있겠지만 다양한 활동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 같다. 진보신당, 사회당과 같은 기존의 정당 안에 청소년위원회가 꾸려지고 있기도 하다.

따이루 꼭 진보적인 색깔을 띤 모임이 아니더라도 예전보다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활동하는 조직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 청소년 미래리더 연합(한청미련)을 보더라도 그렇다. 뉴라이트 계열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준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의존도가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 기존에 있었던 보수 성향의 청소년 모임은 청소년들이 만들지도 않았고, 청소년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할 의욕도 없었고, 서포터즈 정도의 이벤트성 모임이었다. 내용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청소년들의 주체적인 운동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래서 한청미련을 내 운동의 소중한 결과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웃음)

한민성 한청미련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회원들 프로필을 보니까 정치적 스펙트럼이 엄청 다양하다.

따이루 한청미련이 강령이나 대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안보 이런 걸 중시한다고 표방하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 다양하다. 스펙 쌓기도 되니까. 그럼에도 주목할 지점은 스카우트 같은 동원수준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한민성 청소년 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은 된다.

따이루 그래서 청소년 활동의 2라운드인 것 같다. 학교 안에 불만 있는 애들이 인권운동하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전부였고, 그래서 조직을 하긴 쉬웠다. 분노하는 지점도 단순했고. 그런데 지금은 분노하는 지점도 다양해지고 있고, 그 방식도 다양하다. 인권,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아수나로와 같은 흐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수 운동도 등장했다.

한민성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도 청소년 분회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배경내 왜 이런 현상들이 발생하는 걸까?

한민성 2008년 촛불 집회의 영향도 있고, 명동 마리 투쟁처럼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트위터. 자신이 청소년이라는 자각이 뚜렷하기보다는 이런데 관심 많은 한 명의 어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청소년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사건들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도 그렇고. 청소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들을 만난 것이 아닐까.

따이루 생각해보면 그렇게 폭발적이지도 않다. 다양한 모임의 형태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람들이 플러스 되는 것은 적다. 사노위도 청소년 활동가가 2명인가? 다른 모임들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10명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까지의 운동이 양적으로 팽창하기보다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다양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배경내 가운고 투쟁의 예처럼 자신들을 청소년 활동가로 정체화하거나 지속적으로 활동하진 않지만 사건으로써 청소년 활동을 경험하게 되는 저변이 확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슈가 있을 때 지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좀 더 탄탄하게 생겼고. 여기 계신 활동가들도 몇 년씩 활동하신 분들이고. 이런 게 변화된 지점인 것 같다.

공기 어떻게 보면 기존의 운동이 청소년 활동 혹은 청소년 활동가들을 놓치기 싫어한다는 느낌도 받는다. 미래의 활동자원? 재생산? 미래 정식 당원? 활동가 배가 투쟁? 이런 것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배경내 기존 운동이 어려움을 겪다보니 청소년 활동가들이 더 소중해 보이는?

따이루 현실에서 답이 안 나오다 보니……. 내가 노동 운동이나 다른 운동을 해도 그럴 것 같다. 지금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의 방식으로 새로운 운동을 지원하고, 같이하고, 소통하는 움직임 자체는 필요하다고 본다.

배경내 진보네트워크센터의 바리 활동가도 주민등록증 지문날인 반대 운동하는데 청소년 활동가들 없으면 못할 거라고. 지금 누가 이 운동에 관심이 있냐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한민성 전형적인 투쟁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 민중가요만 부르던 문화에서 벗어나 인디 음악을 만나는 등 문화적으로 다양해진 것도 청소년들의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지속할 수 있는데 힘이 되는 것 같다. 일본 서브컬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사회당 덕후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었고. 유쾌하고, 즐기면서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중요하다.

공기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양한 운동 경로를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음악가 나름의 운동이 있고, 그 음악으로 집회 현장이나 투쟁의 현장에 나온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지금 1,000회까지 집회를 이어 왔는데도 사회적 관심 없다가 이번 1,000회 때 1,000명 넘는 사람들 집회에 몰리는 것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따이루 청소년운동은 기존 운동과 다르게 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틀을 깨고 성장하는 것을 즐긴다. 애초의 운동은 학생인권 의제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훨씬 영역이 넓어졌고, 그러다보니 10명으로 시작해 20명이 되고. 더 넓어지고, 알을 까고, 틀을 깨고. 다양성과 말랑말랑함이 청소년운동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주는 구조다. 청소년운동은 자기 안착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아직은.

운동 사회 안에서 정치하기: 보호주의, 나이주의와의 투쟁

배경내 청소년 활동이 성장했다 혹은 폭풍 성장의 잠재력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사회 안에서 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보호주의, 나이주의, ‘꼰대’와의 투쟁 등 우여곡절이 많다.

혜원 지금도 그렇다. 어제부터 트위터로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심의 보류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보류된 것 자체도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주고받는 말을 보면서도 상처를 받았다. 농성에 참여했던 분이 “청소년 활동가들이 우는데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우리가 지켜줄 수 없는 상황이 싫다, 불쌍하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트위터에 남긴 걸 봤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그 사람들이 느끼기에 ‘청소년 활동가들이 어른들도 안하는데 애써서 서명 받았다’ 이거에만 방점이 찍히니까 동정의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동등한 투쟁의 주체로 보지 않는 것 같아 우울했다.

따이루 주민발의 서명운동 할 때 특히 그랬다. 사람들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청소년의 주체성을 베이스로 깔고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연민,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을 위한 거라고. 기성세대들에게 말 걸기 할 때 항상 고민이 됐다. 내 양심을 파는 느낌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발언할 때 우는 것 보고 누가 ‘우리 아이들이 웁니다’라고 하면 그것 가지고도 뭐라고 했었는데, 서명 받을 때는 맨날 ‘도와주세요’ 느낌으로 활동했다.

공기 두리반 투쟁할 때 초기부터 끝날 때까지 거기서 생활하면서 연대했다. 그럼에도 가장 걸렸던 것은 연대의 주체로 나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를 그저 놀러온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때 물론 놀기도 했지만 내가 아무리 진지하게 연대를 해도 이곳에서는 나를 그렇게 봐주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패배감에 젖었다. 그럼에도 친한 친구들이 있고, 이곳에서 해온 활동들에 애착이 가 계속 발걸음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청소년으로서 동등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두리반 안에서 혹은 운동사회 안에서도 싸워야 할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싸워보자는 친구가 있어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 상근을 시작하게 되었다. 투쟁 주체들과 대화하기 위해 청소도 열심히 하고, 아침에 빨리 일어나 커피도 같이 마시고, 아침밥도 차리고. 투쟁 농성장이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더 챙기면서 내가 가진 문제의식도 전달했다. 가장 많이 싸운 것은 나이 많은 사람이 청소년 활동가에게 바로 반말하는 것, 그리고 담배 문제였다. 농성장을 함께 지켰던 분에게 왜 담배 문제를 계속 지적하냐고, 내가 여성이고 어리기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내가 아들만 키워봐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날 엄청 울었다. 그만큼 예민하고, 당당하지 못했다. 또 다른 경우 농성장에 방문한 50대 남성이 “내가 네 아빠뻘인데 내 앞에서 담배 피우냐?”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아빠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니 아빠가 없어서 네가 버릇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더라. 운동하지 않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면 욕하고 따질 수도 있지만 당시 철거 투쟁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막 말하기 쉽지 않았다. 확실히 청소년 인권운동이란 모두를 상대로 해야 하는 운동인 것 같고, 적이 정해져 있지 않은, 누구나 적이 될 수 있는 운동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성소수자 운동과 비슷한 점이 있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거나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시선이 있을 때 누구나 적이 될 수 있고 싸워야 하는 상대가 되는 것처럼. 두리반 투쟁 이후 명동 마리 투쟁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그 때 기조가 반차별, 반폭력, 누군가에게 노동을 전가하지 않는 것이었다. 청소년 활동가들을 배제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두리반 투쟁의 경험 속에서 변화가 있었다. 좀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도들을 할 수 있었다.

한민성 마리 같은 경우는 청소년 활동가들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당장 용역들에 끌려 나갈 수도 있는데. 마리 투쟁은 숫자상으로 청소년이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인원이 역량이니까. 꼰대 아저씨들 입장에서도 ‘쟤네들 잘못 건드리면 나가는 거 아니냐’는 걱정이 있었을 것이다.

따이루 아수나로가 존재감이 별로 없던 시절, 내가 연대 담당자로 교육운동 단체들이 모인 회의에 들어갔는데 대뜸 “뒤에 있는 학생은 누구 따라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혼자서 왔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한 거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나아져서 다른 단체 회의실 빌리는 것도 더 쉬워지고, 논의할 때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손을 뻗치고 있는 운동 영역에 있어서는 청소년들의 위치가 점점 동등해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개인적인 노력과 용기만으로는 벅차다. 공기처럼 청소 열심히 하고, 눈치를 봐야 겨우 문제제기할 수 있는 건가? 무슨 자격 검증도 아니고.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해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리 투쟁 때처럼 청소년들의 운동의 힘 자체가 커지는 것이 중요하다.

혜원 계속해서 운동의 힘을 키워나가고 있긴 하지만 운동하는 청소년들 안에서의 조직력은 약화되기도 한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는 조건이다. 대학이나 성적 경쟁, 집과 학교의 태클 등. 그것이 심해질수록 조직력은 약해진다.

아리데 청소년 활동가의 문제제기를 비아냥거리듯 비꼬는 경우도 있다. 인천에서 학교인권을 위한 시민 연대활동을 하는데 내가 존댓말 해달라고 요구하자 “아, 아수나로 분들은 반말하는 거 싫어하신댔지?” 이러면서 깨알같이 웃더라. 회의 중간에 뛰쳐나가고 싶었다.

따이루 서울 같은 경우도 처음에 문제제기하면 많이 비웃는다. 아, 네, 뭐, 이런 분위기. 회의 중간에 “아니 학생이!” 이러면서 다시 반말하고. 19살 넘은 어른들을 기득권층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논리적이거나 감정적으로 호소해야 할 때도 있지만 힘의 논리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저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서 무시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시할 수 없게끔 상황을 만드는 것. 청소년운동이 이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만큼의 질적, 양적 성장을 했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여전히 지역, 인천만 가도 그런 기반이 없으니 쉽지 않다.

배경내 당 안에서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

한민성 정말 퇴장하고 싶을 때가 많다. 꼰대 아저씨들하고 한 시간만 있으면 진짜. 전선이 두 종류다. 당내, 당외. 1990년대 초반에 여성주의자들이 운동사회 내부에 하던 이야기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다. 우리가 게임 셧다운제 반대 시위 할 때도 당에 지원을 요청하려고 중앙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중앙당 관계자들이 게임은 진짜 나쁜 건데 왜 그렇게 시위를 하느냐, 청소년 자기 결정권이 중요하니 지원은 해주겠지만 문화 향유권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하라고. 결과적으로는 정작 재정 지원 하나도 안 해줬고, 자동차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자동차 지원 안 해줬고, 발전기 하나 지원해줬는데 발전기는 고장 나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발전기 운반을 우리 돈 내고 했고, 그것만 십만 원 깨졌다. 진짜 화가 난다. 당내 투쟁이라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 받고 짜증난다. 어차피 밖과의 싸움은 각오한 일이고, 계획된 선에서 하는 것인데. 당 내부에서의 일은 급작스레 태클이 걸린다. 우리가 먼저 장비를 빌려 놓아도 우선순위가 늦은 다른 데 먼저 장비를 빌려주기도 한다.

배경내 정말 서럽다.

혜원 나는 주로 연대 활동할 때 전교조와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 엄마가 전교조 간부라는 특수성이 있다. 가운고 투쟁을 할 때 전교조 활동가에게 연락을 했는데 다짜고짜 나한테 “너 왜 지금 전화해. 수업시간 아니야?” 이러더라. 그래서 자기 제자로 착각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탈학교 청소년이고, 아수나로 활동하는데 반말 좀 자제해 달라, 청소년이라고 다 학교 다니는 건 아니라고 문제제기했다. 나중에 내가 이런 정황을 교육 잡지에 투고한 적이 있는데 그걸 읽고 나서 나에게 “네가 우리 엄마 딸인 거 알고 그랬다.”라고 연락해왔다. 나는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겪는다. 전교조 본부에 가도 나는 얼굴도 모르는데, 왔냐고, 엄마 잘 있냐고 반말로 묻는다. 어딜 가나 엄마 딸이라는 것이 분명하니 나를 아수나로 활동가로 봐주질 않는다. 누구 선생님의 딸로만 규정한다. 여기에 대놓고 문제제기하기도 내 입장에서는 어렵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면 까놓고 말하는데 엄마가 끼여 있으니까. 나의 모순이자 좌절이다. 최근에는 전교조 사무실에 갔다가 성희롱을 당하기도 했다. 다른 활동가와 이야기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교조 간부 한 명이 옆자리에 앉더니 “너 이쁘다, 안 보이는데 가서 뽀뽀할까?”라고 묻더라. (좌담 참여자 모두 경악)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저는 늙은이 싫어하는데요.” 이러면서 대충 빠져나오는데 손까지 잡아 당겼다. 엄마한테 나중에 이 사건은 이야기 했는데 엄마도 열 받아 하더라.

배경내 청소년이면서 동시에 여성인 혜원과 공기는 이중적인 차별을 겪게 되는 것 같다. ‘청소년은 담배 피우면 안 된다’가 ‘여성은 더더욱 안 된다’로 이어지고, 그 훈계에 가족주의 정서가 이용된다. 2008년 촛불 집회 때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공기 그때도 보호주의, 나이주의 문제가 심각했다. 촛불 청소년 모임의 경우 촛불 어른 단체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차비나 밥값 등을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보니 반말하거나 커피 심부름 시키는 일들이 많았다. 묘한 가족주의가 있어서 ‘아빠라고 불러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면서 성폭력 사건도 많았다. 내가 왜 이런 걸 보고도 침묵해야 하나, 왜 우리는 어른 남성들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나, 어른에게 보호/통제받는 것이 당연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왜 주눅 들어야 하나 등 내 안에 수많은 물음들이 고개를 들었다.

따이루 문제의식을 느낀 청소년들이 함께 항의 및 대응을 준비하는데 중간에 이야기가 새나갔다. 씁쓸하게도 같이 활동했던 다른 청소년 단체를 통해 새나간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른들이 지원을 딱 끊더라. 자본가처럼. 앞으로 깃대 안 빌려준다, 밥 안 사준다, 농성 물품 돌려줘라. 엄청 찌질하게 굴었다. (웃음) 그 어른들과 친했던 청소년들이 너희 때문에 지원 못 받는다며 우리 대응을 막기 시작했다. 결국 그 싸움이 어른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청소년들끼리의 싸움으로 끝났다.

공기 그 친구들이 우리에게 아빠 같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하냐고. 내가 살아온 배경이 부모님이 없어서,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생각도 들면서 당시에는 많이 흔들렸다. 또 오랫동안 같이 농성했던 친구들과 싸우고 멀어진다는 것이 속상했다. 지금도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마주치면 인사는 하지만.

배경내 보호의 이면에는 무시와 차별이 있다. 상대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호와 차별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다. 보호로 둔갑한 폭력을 활동 안에서 많이 마주하기 때문에 늘 긴장상태에 있는 것 같다. 이의제기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보니 주변에서 ‘청소년 활동가들은 왜 이리 까칠하냐’는 평을 많이 듣게 된다.

공기 내가 아수나로도 아닌데 (웃음) 청년 단체 사람 한 명이 내게 와서 아수나로 활동가들 까칠하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반말로 말거는 것이 먼저 문제 아니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문제 삼아야 하고 거기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때로는 “청소년 활동가들 다른 운동 판에서 인정투쟁 좀 안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내가 청소년 노동 관련 토론회에서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반응을 꽤 접했다.

따이루 애들이 떼쓴다는 식의 반응이랄까? 아마 대학생 운동을 하는 사람은 다른 단체 사람 만나면 등록금 문제를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운동은 여러 운동과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 속에서 자기 투쟁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여성 활동가들이 성차별 발언을 지적할 때 예전보다는 훨씬 정당한 분위기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청소년 활동가들이 반말, 호칭 문제를 지적하면 여성운동 초창기 때처럼 너무 까칠하고, 예민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기득권층이 갖지 못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요즘은 스킬이 늘어서 웃으면서 욕하기도 한다. (웃음)

한민성 예전에 마리에 정동영 씨가 왔었는데 청소년들을 보자마자 반말을 하더라. “너 몇 살이니? 몇 학년이니?” 몇몇이 문제제기했더니 그 다음에 방문할 때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쓰더라. (웃음)

배경내 매 순간 항의 하는 것이 쉽지 않고, 짜증나고, 용기가 필요할 텐데 그럼에도 왜 문제제기를 하나?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잃을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싸가지 없다는 비난, 그들에게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재 청소년운동의 상황과 연관될 것 같다.

따이루 예를 들어, 우리는 물건 하나 가진 것이 없다. 그 사람들은 공간, 사무실을 가지고 있고. 회의를 하려고 해도 특히 지역은 눈치보고 빌려야 한다. 공간을 마련할 수가 없으니 너무 어렵다. 그래서 가끔 줄타기를 하게 된다.

‘정상적’ 궤도에서 벗어나다: 삶을 던지는 직접행동

배경내 청소년 활동은 다른 운동들과 달리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투쟁 방식을 많이 택한다. 가출도 직접행동일 수 있고, 탈학교 후 활동에 전념하는 경우도 많고, 입시 문제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대학입시를 거부한다. 탈(脫), 거부라는 방식이 왜 많이 쓰일까? 두리반이나 마리 투쟁의 경우도 집을 나와 농성장에서 생활하면서 연대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

따이루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청소년들은 시민으로도 인정을 못 받는다. 그러니 ‘품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우리들의 고민을 사회에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직접행동으로 부딪혀서 이슈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행동이 그렇듯 100퍼센트 자발성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이기도 하다.

한민성 간단하다. 돈이 없으니까. 품위 있게 이야기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초대장 인쇄하고, 현수막 달고, 기자회견 하고 등등. 기획을 해서 세련되게 뭘 할 수가 없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뭐지? 그러면 직접행동이다. 마리 같은 경우도 그 곳에 가면 잘 곳, 먹을 것이 있었다. 나는 돈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를 존재만으로도 필요로 한다. 점거 농성장에서는 사람이 많다는 것만 해도 중요하니까. 그래서 두리반, 마리와 같은 철거 농성장에 청소년들이 많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경내 기존 사회 운동가들에게 이런 방식의 활동이 어떻게 비춰질까? 가출 청소년 합숙소 아니냐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이런 시선을 정면 돌파할 수 있는 대답이 있을까?

공기 집에 원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출을 하기도 하지만 투쟁을 하고 싶어 일시적인 가출을 하기도 한다. 두리반 투쟁할 때 잠입해있던 부모에게 딱 걸려서 잡혀간 친구들도 있었다. 끌려갈 때 폭언, 폭력은 기본이다. 남성 청소년이냐, 여성 청소년이냐에 따라서 반응도 달라진다. 투쟁 장소 안에서 가출은 친권과의 부딪힘이다. 만약에 친권자들(부모들)이 경찰에 신고하면 투쟁 현장에 결함이 생길 수도 있으니 투쟁 주체들이 청소년들의 가출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어렵다. 나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고. 그래도 부모들이 다 아는 친구 집보다는 농성장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투쟁이란 게 좀 경건한 느낌이 있다 보니 투쟁 장소에서 식량을 축내고 자는 것이 농성장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죄책감도 들었다.

한민성 그래서 그런지 마리의 경우 가출 청소년들이 조직 내부에서 일을 열심히 했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껴질 정도로. 내가 농성장을 축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부담감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농성이 안전하지는 않다. 용역이 있는데? 마리에서 한 친구는 용역에게 맞아서 팔이 부러졌다. 가출한 상태였는데 집도 멀었다. 두리반과 마리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마리의 경우 언제 무슨 일이 터질 줄 모르고, 청소년들의 숫자가 많았다.

배경내 마리에 많이 모였던 청소년들은 왜 마리에 있었나? 그 현장을 지키는 것이 가출 상태와 결합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민성 먹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다. 농성장이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지만 가출한 친구들에게는 가장 안락한 공간이기도 했다. 마리는 물리력이 필요한데 청소년 활동가들의 경우 물리력이 되는 남성 청소년들도 있었다. 돌발 상황도 많았고.

혜원 기존의 운동판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어서 외부 사람들이 갑자기 끼어들기 어려운데 철거 투쟁은 급작스럽게 모이고 촘촘히 짜여있지 않은 상태에서 싸움을 시작하니 청소년들이 자존감을 갖고 위치 잡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공기 그래도 아쉬웠던 점은 있다. 청소년 활동가들, 가출하고 연대했던 청소년들과 명동 해방전선을 만들어 한 명씩 대책위 회의에 들어갔었다. 협상 상황을 공유하고 의견도 제시했었다. 그런데 막상 협상 분위기가 무르익은 최종회의 때는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 협상된 금액을 공유해주지도 않았고. 같이 싸워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중요한 자리에 우리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허탈하고, 솔직히 이용당한 느낌도 들었다. 갑작스레 마리를 비워줘야 한다고 들었고, 농성 물품들을 챙겨 가져가야 했고, 누군가에게 나눠줘야 했다.

따이루 꼭 철거 농성장이 아니어도 청소년 활동가들 가출 꽤 많이 한다. 나도 가출을 했었고, 청소년들이 가출하는 것 반대 안하는데 솔직히 도와주고 싶은 가출이 있고, 내가 왜 이걸 감당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가출도 있다. (웃음) 부모 대신 내가 챙겨줘야 되는 느낌이랄까? 알바를 편히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경제적 보장이 없다보니 지금까지 가정에서 책임져 왔던 것들을 다른 개인 활동가들이 책임져야 할 때가 있다.

공기 주변에 굳이 청소년 활동가들 아니어도 최근에 만났던 청소년들 중에 가출한 사람들 보면 며칠 못가는 게 현실이다. 돈도 없을뿐더러 찜질방 가거나 친구 집 가는 것도 곧 바닥이 난다. 청소년 활동가들 주변에는 그나마 자취하는 대학생 친구들이 꽤 있고, 그래서 기댈 수 있는 약간의 토대가 있다. 물론 그것이 언제까지 가지는 않고 쫓겨날 수도 있다. 가출/독립을 유지하려면 돈도 좀 벌고, 알바를 해야 하는데. 현실 감각 없는 청소년들을 많이 봤다. 근데 이걸 지적하고 말해주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집에 가면 또 잘 살더라.(웃음)

따이루 가끔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웃음) 근데 가출에 관한 건 정말 복잡한 이야기다. 활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와야 하는 순간이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예전에는 부모님이 활동에 대해 격려했었다. 밖에 돌아다니며 사회 경험 하라고. 그러다 활동을 점점 더 많이 하자 통금시간이 생겼다. 9시 뉴스 보기 전까지 들어오기. 몇 번 어기자 용돈이 2만 원정도 있었는데 그것마저 끊겼다. 결국 활동 자체를 막으려 해서 집을 나오게 되었다. 자기 신념과 활동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와야 하는 상황이 많긴 하다.

기가 막힌 타이밍. 아리데의 집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이날은 마침 아리데의 기말고사가 끝난 날이었다. 친구들과 하루만 놀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타협이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참여했을 것이라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좌담을 잠시 중단하고 아리데의 통화가 ‘긍정적’으로 마무리되길 기다렸다. 이것도 약간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귀가 시간 협상을 마친 아리데가 다시 돌아왔고, 좌담을 이어갔다.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나: 청소년 활동의 지속 가능성

배경내 청소년 활동가들 보면 유랑하는, 유동하는, 정처 없는, 뿌리 없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유지나 앞으로의 운동의 비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기도 한다. 청소년운동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한민성 “뭐먹고 살 건데?” 라고 누가 물었을 때 솔직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만둘까 생각중이다. 그만두면 재수를 할 생각이다. 이번에 대학 정시에 붙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아무 일도 안하고 청소년운동을 유지할 수 없다. 당 청소년 위원회 활동도 내 돈 박고 한 거니까. 청소년운동 판은 정말 돈이 하나도 없다. 후원을 받긴 하지만 행사가 있을 때나 그렇고. 개인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운동만 하는 것은 무리다. 학교나 회사에 소속되는 게 필요해서 직장도 알아봤는데 취직이 안 되더라. 그래서 나는 두 가지다. 대학에 들어가거나, 직업 훈련 과정으로 기술 배워서 병역을 대신할 수 있는 곳에 취직하거나. 그런데 이것도 경쟁률이 세서 쉽지 않다. 게다가 나는 병역을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해서 복잡하다.

따이루 대학 입시 거부 활동을 할 때 대안이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 대학을 가고, 활동을 안 해도 답이 없는 현실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질문이다. “요즘 청소년 활동하면 대학도 가고 좋다면서요?” 이 질문도 마찬가지다. 질문의 초점을 어떻게 현실을 바꿀 것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현실에 잘 따라갈 수 있을지에 둔다.

배경내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하고, 학교를 다니는 것이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미래를 바꿀 수는 없지만 사회인으로서의 미래는 끊임없이 유예시킬 수 있긴 하다. 그래서 거짓된 희망인 줄 알면서도 유예를 지속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미래의 불안이 아닌 현재의 불안에 뛰어든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공기 대기업은커녕 정규직 직장을 갖는 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 좋은 직장에 가려면 더 좋은 대학에 가야하고, 한 단계씩 올라가기 위해 재수학원에 몇 천씩 갖다 바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대학에 대한 기대가 있는 친구들은 좀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 수준의 전문성 있는 교육은 주변에도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지금 현재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대학 졸업 후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별개로 지금 현실 자체가 급박하다. 등록금도 없고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 대학에 가면 좀 더 편한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마저도 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이루 대학을 거부한다는 건 불안한 현실에 직면하는 거 맞다. 미래에 불안을 유보시키지 않고, 지금 만나는 거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무모하고 위험해 보일 수 있지만 현실을 마주보는 것 자체가 대안의 시작이다. 마주보고, 현실에 맞서서 해결해야 한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누구나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 활동의 최종 목표다. 인간다운 최소한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한민성 당 활동 시작할 때 운동판은 그래도 학력 차별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당에 있는 어른들 대학입시 거부 내켜하지 않는다. 일단 대학에는 들어가라고 말한다. 솔직히 진보적인 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 고학력자다. 70-80년대에도 대학 거부 운동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분들 지금은 다 가난하게 살고, 활동 그만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사회의 편견이나 제도가 바뀌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

따이루 그건 대학거부 운동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고등학교 운동 세대들의 개인적 결단이었다고 들었다.

배경내 대학이나 학력 차별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노동현장으로 바로 가겠다, 현장에서 미래를 찾겠다는 고민의 맥락에서 선택한 길이었다고 알고 있다.

한민성 어쨌든 그 사람들 지금 얼마나 남아있나. 소위 명망가로는 대부분 대학 나온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나는 대학입시거부 운동에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지지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이 너무 개 같다. 너무 무섭다. 내 안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이월하고, 유예하는 것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학을 가지 않았을 때 운동판 안에서도 분명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아주 심하게 존재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대학거부를 차마 선택하지 못하겠다. 그 엄청난 돈을 퍼붓지 않고도 원하는 공부를 대학 밖에서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배경내 중학교를 그만둘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나?

한민성 지금처럼 비관적이지는 않았다. 왜 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배경내 인권운동판은 학력 차별을 뛰어 넘어보려는 틈새가 열리고 있기는 하다. (웃음)

따이루 없으면 찢어서라도 만들어야지. (웃음) 투명 가방끈 모임 만들 때 처음에 후보로 등장한 이름이 ‘학벌 파괴자’였다. 지금 사회의 견고한 틀을 깨뜨리는 것이 필요하고, 학벌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직접 맞서 싸우는 건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본다.

배경내 여기서 대학에 가게 된 혜원의 생각이 궁금하다.

혜원 대학 이야기만 나오면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입시 문제, 경쟁 문제 끊임없이 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공유했는데. 결국 내 동료들이 대학을 선택하지 않았을 때 나는 이 체제를 유지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가는 대학이 그 서열의 정점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스스로 가졌던 마음이나 신념에도 상처가 남았다. 대학을 가고 싶어서라기보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고, 집과의 사정상 갈 수밖에 없었고. 한창 고민할 때 투명가방끈 활동하는 친구들을 만나질 못하겠더라. 한 번은 친구랑 술을 먹는데 나에게 “너를 보면 내가 불안해진다. 네가 미운 것이 아니라 너를 보기가 힘들다.”라고 말하더라.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했다. 내가 활동 경력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간 특수한 케이스여서 대학 안에서도 속하지 못하는 부류다. 신입생 환영회를 가봤는데 부모들이 다 빠방하다. 정치하는 사람도 많고, 그 학교 출신도 많고. 민사고 출신이나 좋은 사립학교 학생이 대다수였고. 그 안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러웠다. 내 개인의 잘못은 아닌데 아직도 마음이 복잡하고 대학 입학일이 사형 선고일 같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깝다. 대학가서 시험보고, 과제 처리하고, 토플 공부하면서 내가 지금의 마음을 지키며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요즘엔 1년만 더 10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하고 싶은 활동이 많다.

배경내 “학생인권까지는 동의하지만 학교를 그만두는 건 문제가 있다. 아수나로 애들은 다 자퇴했더라.” 하시며 활동을 반대하는 부모들도 많다. 아수나로에서 대학입시거부 활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고. 이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는 고1 아리데 님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아리데 학교를 다니면서 활동을 한다는 것이 계속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중간에 끼어있는 느낌이다. 주위에서 대학 못가면 안 된다, 사람 취급 못 받는다,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있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한다. 내가 지금 260명 중에 70-80등을 한다. 학교에 입학할 때는 13등으로 들어갔다. (웃음) 점점 성적이 떨어진다. 성적이 떨어질수록 아수나로 온라인 카페에 들어가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웃음) 나 혼자 답답하다. 주위에서는 너 왜 그러냐고 걱정한다. 미래의 불안이 현재의 불안으로 넘어오는 느낌이다. 내가 지금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데 자퇴도 생각해봤다. 그런데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자퇴를 하고 활동을 하면 정말 내가 앞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였다. 가출했을 때도 아는 단체 사무실 몇 군데를 전전했다. 그것도 민폐를 끼치면서. 집에 들어가기 싫었지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에 가지 않고 활동가로 남았을 때 계속 이런 상황이 닥치는 것은 아닐까. 이 불안감 때문에 계속 공부를 한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의미 없고, 성적을 유지해야 하고, 친구들을 밟아야 하는 것이 너무 싫지만.

따이루 나도 활동 시작할 때 똑같은 고민을 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도 가고, 활동 열심히 해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성공에 대한 기대와 욕망도 있었다. 그런데 한 번뿐인 인생 좀 더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 데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활동하면서 깨달았다. 풍요롭게 사는 건 어렵겠지만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런 풍요를 버리고 행복하고 재밌게 사는 걸 택하고 싶다.

공기 1년 정도 죽도록 알바 뛰면 보증금 1000만 원 모은다. 지금도 알바를 하면서 활동을 하는데 솔직히 나는 대학을 안가기보다 못가는 것에 가깝다. 못가기 전에 안가겠다고 거부한 거다. (웃음) 주변에 대학생들이나 대학 가는 친구들 보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속으로 짜증이 난다. 내 열등감 같기도 하더라. 맞아, 내가 못나서, 공부를 못하고, 돈이 없으니까 내 선택이 될 수 없다고 인정해버리면 되는 건데 그게 잘 안 된다. 주변에 대학에 다니는 운동권들에게 최근에 한탄을 했다. 같이 살 고민을 왜 하지 않는 거냐고. 물론 그 친구들도 먹고 살 것 걱정하긴 하지만, 나 같은 대학 거부생 앞에 두고 명문대 애들이 어려운 이야기 쏟고 있으면 화가 난다. 나도 주거만 안정된다면 따이루처럼 다른 풍요는 놓을 수 있다고 본다.

따이루 그래서 ‘활기’(5)를 하는 건데. 활기 모임을 다시 활성화 시키려 한다. 내 삶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활동의 안정성을 보장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스무 살이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배경내 좌담에 참여하신 분들 대부분이 19살이다. 이제 곧 스무 살이 된다. 좌담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스무 살이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이야기해주셨으면 한다.

아리데 나는 지금하고 있는 고민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고, 만약 대학을 가더라도 계속 될 것 같다. 미래를 이유로 활동을 포기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도 다 포기하게 될 것 같다. 나중에 직업을 택할 때에도 선택의 기준이 월급이 되고. 하고 싶은 것을 쉽게 포기하는 삶을 살게 될까 걱정된다.

한민성 운동 포기선언? (웃음) 청소년 활동가가 다 그렇겠지만, 스무 살이 오면 특히 남성들은 군대 문제도 걸리면서 결정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이 운동에 남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운동으로 넘어갈 것이냐’도 고민이다. 청소년운동은 스무 살이 넘어도 그 일을 계속 할 여건이 잘 안 된다. 진보신당에도 93년생이 되게 많은데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조직에서 계속 잡아당기고, 방향 제시해주고,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 또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는 청소년운동에 대한 자각이 적어서 걱정이다.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당사자인 청소년의 위치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다른 운동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지속가능한 운동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그래서 내년에는 내 살길 모색하며 이기적으로 살려고 한다.(웃음)

따이루 청소년운동이 꼭 청소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의제를 갖고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19살이든 스무 살이든 스물네 살이든 같이할 수 있다고 본다. 교육운동이 학교 다니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듯이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어도 더 많이 청소년운동에 참여하고 지원할 스스로의 이유를 찾을 것이다.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위치겠지만. 내년에 열심히 활기 모임을 할 것이다. 운동적 관점에서 먹고 사는 문제 해결하고, 모두가 함께 공감하는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고 싶다.

혜원 나도 내년에도 활동 열심히 할 거다. 청소년운동이 제기하는 의제가 청소년 개인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학 가서도 계속 할 것이다. 대학 운동은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

공기 힘든 일은 올해 다 헤쳐 나갔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지금 하고 있는 사회당 청소년위원회. 망하겠지만, 잘 망하기 위해서 (웃음) 계속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청소년위원회 안에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있는데 자신들도 대학입시 거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운동이 꾸준히 간다면 잘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 문제가 엄청 막막하지는 않다. 경제적인 압박이 들어왔을 때 스스로 잘 해결해 왔다. 어떻게 나를 책임져야 하나 했을 때 어느새 보증금을 모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림 그리는 일 계속하고 싶어서 일러스트레이션 배울 생각도 있고. 운동권 웹디자인 대행 회사를 차리자는 이야기도 했었다.(웃음) 다른 활동가들도 투잡 많은데 계속 활동할 거라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좌담을 정리하며
나 역시 현재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이십대 중반을 훌쩍 넘겨 이 운동을 처음 만났을 때의 문화충격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나이와 상관없이 상호협의 아래 존댓말이나 반말을 쓰고 ‘오빠, 언니, 선배, 선생님’ 등의 호칭을 쓰지 않고 서로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린다. 한동안 어색했던 이 수평적인 문화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렇지 않은 집단과 함께 있을 때 숨이 턱턱 막힌다. 나조차 이러할진데, 대부분의 일상을 나이에 따른 위계로 조직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청소년 활동가들의 삶은 얼마나 텁텁할까. 그래서 나는 청소년 활동가들을 ‘권위주의 속의 카나리아’라고 부른다. 유독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가 갱도를 지나다 노래를 멈추면 그 이상은 사람이 더 발걸음 할 수 없는 곳이라 광부들이 여겼던 것처럼. 청소년 활동가들의 생기발랄한 활력이 떨어지는 공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곳을 필히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탁한 권위주의의 공기가 그 안을 꽉 메우고 있다는 반증이므로. 이 친구들의 문제제기가 때로 유려한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성숙한’ 어른이라면 이들의 ‘다잉 메시지’를 잘 읽어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평등한 파트너십을 형성하기 위한 첫 단추라고 나는 생각한다.
15살에 처음 만난 따이루가, 16살에 처음 만난 공기가 이제 스무 살이 된단다. 내 코가 석자인 관계로 가끔 밥값이나 술값을 더 지불했을 뿐 이들의 생활에 내가 기여한 부분은 거의 없다.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쭈뼛거리며 1000원, 2000원을 빌리는 청소년 활동가들도 많다. 나는 이들의 팍팍한 생활을 볼 때 동정이 아닌 책임감을 느낀다. 자유롭지 않은 누군가와의 비교우위 속에서 인간은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했다. 대학을 나온 성인 활동가인 내가 누리고 있는 상대적인 자유가 청소년 활동가들의 부자유에 빚지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걱정만 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올해만 해도 대학입시 거부선언을 통해 18명의 청소년들이 학벌 없는 삶을 택했다. 미래의 불안을 현재로 앞당긴, 현재의 불안을 미래로 유예하지 않은 이 친구들의 용기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지원체계가 시급히 필요하다. 생활의 안정을 위해 긴급 지원 기금을 마련하는 것에서부터 청소년 활동에 대한 정당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인정을 고민하는 것까지. 길고, 넓게, 끈질기게 품고 가야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이 좌담 기록을 연결고리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길 고대한다.

덧붙이는 말

(1) 다행히 2011년 12월 19일 재상정된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이 원안에 가깝게 교육상임위,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 기쁨도 찰나 교과부는 서울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자마자 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시교육청에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재심의를 요구하라고 압력을 넣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 \'Say No\'는 2008년 당시 무한경쟁ㆍ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청소년 모임의 이름이었다. 1%만을 위한 경쟁 교육에 당당히 No를 외치자는 의미. (3) 2011년 개교한 가운고등학교에서 올해 입학한 학생 18명이 한 학기도 다니지 못한 채 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자퇴를 강요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조사 결과 벌점이 80점 이상 누적된 학생은 퇴학이라는 조항과 흡연하다 4번 이상 적발될 땐 퇴학시킬 수 있도록 하는 ‘흡연 특별 규정’을 두고 있었다. 다산인권센터, 아수나로, 전교조 구리남양주지회 등이 꾸린 ‘가운고 무더기 강제 자퇴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노력으로 복귀를 원하는 학생들이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사건을 혜원은 ‘문제아 홀로코스트’라 칭하기도 했다. (4) 진보신당 강령 본문 29조 ‘각종 정치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다양한 권리를 보장하여 당당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수 있게 한다.\' (5) 2010년에 꾸려진 청소년 활동가 활동기반 마련 프로젝트 모임. 경제적 안정성을 위한 기금 조성 팀, 지속적인 공부를 위한 교육 체계 팀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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