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기억하는 자의 슬픔

하지만 그것은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 베른하르크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에서

몇 년 전 오월, 화물연대 소속 노동자 한 명이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로 시작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그의 죽음은 택배비 30원 인상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철회한 데서 비롯된 싸움 끝에 조합원 전원 해고라는 파국을 맞으며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얼마 뒤 인권변호사였던 전직 대통령도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유서에는 “미안해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두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직 대통령의 재임 시절,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위원이 올랐던 바로 그 85호 크레인에서 생을 마쳐야 했던 노동자이자 세 아이의 아빠였던 이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죽음이 투쟁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의 죽음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내 틀린 말로 증명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저는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의 책들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이탈리아 소설가, 그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살은 어떤 형태든 간에 인간의 존엄에 관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들의 죽음 속에서 자살은 어쩌면 기억에 대한 욕망, 사람들의 기억에 대해 편집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연대회의에서 내는 열사달력을 보면 오월은 유난히도 열사의 이름들이 빼곡합니다. 공수부대의 진압이 예고되고 뒤이은 학살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1980년 오월의 시민군,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대학생과 의문사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1991년 오월의 무수한 죽음들. 이 땅 민주주의는 오월에 참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 오월, 인권재단 사람은 ‘남산 안기부터를 인권·평화의 숲으로!’라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한때 ‘남산’이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은 남산에 따라붙는 상투적 수식어였습니다. 혹자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안기부장이 곧바로 남산에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갔기 때문에 ‘혁명’이 실패했다고도 합니다. 오랜 세월 대한민국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이 있었다면 청와대의 바로 밑, 그리고 국민들의 머리 위에는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이른바 남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다가 의문사한 최종길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장남, 함세웅 신부와 한승헌 변호사, 고은, 김지하, 황석영, 이문구 등 시인과 소설가, 화가 홍성담. 남산이 미워했던 이들은 민주화 인사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유명했던 방송작가 한운사와 가수 조용필도 끌려갔고 심지어 중앙정보부를 만든 김종필의 최측근들도 곤욕을 치렀습니다. 수많은 재일교포를 비롯한 보통사람들이 모진 고문 끝에 간첩단의 조직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권유린의 현장, 인간 존엄을 말살했던 역사와 기억을 인권과 평화의 숲으로 만들자는 것이 바로 캠페인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인권과 평화의 숲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

이십대 시절, 오월이면 늘 광주 망월동을 찾았습니다. 먼지가 풀풀 날리던 묘역 입구의 비포장도로는 미완의 항쟁, 해결되지 않은 광주를 상징하는 듯 보였습니다. 묘역을 돌다 제 또래가 주인인 무덤을 대할 때면 묘한 부채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5.18기념공원을 갔을 때 위압적으로 솟아 있는 기념탑과 공원을 뒤덮은 대리석을 보며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가 국가에 의해 박제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직접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분의 안내를 받아 그해 오월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고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풍부한 정보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왠지 거세된 역사의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역사적 사건과 하나로 상징될 수 없는 집단기억을 어떤 공간 속에 조형물로 표현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저희 사무실 근처인 서대문 독립공원을 산책하다 독립문을 볼 때면 참 우스꽝스럽고 또 안쓰럽습니다. 스러져가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협회가 국민의 성금을 모아 지었다는 독립문은 원래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영은문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립을 하겠다며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뜬 것도 그렇고 그마저도 중국인의 손을 빌려 지었다 하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습니다. 일찍이 한 시인은 “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은/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세웠고/황토현 녹두장군 기념관은 전두환이 세웠으니/광주항쟁 시민군 위령탑은 또/어떤 자가 세울 것인가”(정희성의 시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에서)라고 꼬집었는데 역설적으로 5.18 기념탑이 한국의 불완전한 과거청산에 대한 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1943년 9월 독일군이 이탈리아 토리노를 점령하자 반파시즘 빨치산 부대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평균 수명이 고작 3개월에 불과한, 건장한 사람은 노역으로 허약한 사람은 가스실에서 ‘절멸’되던 수용소, 150만 명이 학살된 아우슈비츠에서 7천 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으로 토리노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에 대한 작업에 몰두했고 2년 뒤 책으로 묶인 『이것이 인간인가』는 출간 당시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10여 년이 흐른 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두 차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1965년 아우슈비츠 해방 20주년 기념식이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 너무나 질서정연했고 건물 정면은 너무 깨끗했으며 대부분의 대화들이 형식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2년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나는 처음으로 아우슈비츠에 있던 수용소 가운데 하나로 가스실이 있었던 비르케나우 기념관을 방문했다. 철로가 보존되어 있었다. 녹슨 철로는 수용소 안으로 이어져 일종의 텅 빈 공간 가장자리에서 끝났다. 앞에는 화강암 벽돌로 만든 상징적인 기차가 있었다. 벽돌마다 나라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기념관은 이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기념물이 세워졌지만 특히 독일에 있는 것들은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베를린 베벨광장 홀로코스트 기념비는 나치의 나팔수였던 괴벨스의 지시에 따라 소년 나치들이 유대인 학자와 소설가의 책 2만 권을 불태운 현장이었던 광장에 바닥을 유리로 덮은 뒤 그 안에 흰색 서가가 들여놓고 그 앞에 “책을 불태우는 자는 결국 인간도 불태우게 된다.”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을 새겨놓았습니다. 베를린 근처 나치에 의해 파괴된 유대인 교회 자리는 공터에서 자라난 나무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없어진 교회 의자의 일부분만을 복원하여 비어있는 기억의 공간으로 교회를 재구성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기념관들은 홀로코스트를 재현한다는 명목 아래 수용소를 본떠 웅장한 건물을 짓거나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사진을 빼꼭히 걸어놓아 희생자를 대상화하고 그들의 고통을 전시한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의 기념관은 세심하게 고려된 동선에 따라 관람객이 이동하면서 핍박받는 유대인과 해방자로서의 미국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끔 하는 공간적 서사로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하기에 고도의 정치적 타협물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관용』의 저자 웬디 브라운은 “(관용박물관과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중동 문제에 대한 텅 빈 재현과 요란한 침묵을 통해, 이스라엘이 지금 겪고 있는 최근의 어려움이 과거 유대인이 겪어 온 고난의 연속이라는 메시지를 은밀히 전달한다. … 이스라엘은 이제, 문명 대 야만, 관용 대 증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최전방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고발합니다.

한국에 프리모 레비를 소개한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 교수는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까닭을 두 가지 이유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학살이며 또 하나는 홀로코스트를 왜곡하고 부인했던 독일 수정주의 역사 논쟁입니다. 어쩌면 시대의 증언자임을 자임했던 레비 스스로가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 가운데 하나의 기념비로 소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무엇보다 안기부 터에 만들어질 인권과 평화의 숲이 많이 불편했으면 합니다. 녹슨 철로와 벽돌로 된 기념관처럼 소박했으면 합니다. 계몽주의 신념에 가득 차 ‘역사는 이러했노라.’라는 웅변의 공간이기보다는 재현의 불가능성과 기억의 불일치성 앞에 모두가 겸손한 공간이었으면 합니다. 중심이 없이 비어 있는, 그래서 누군가의 기억이 나날이 더해지고 우리네 이야기처럼 여러 갈래의 길들이 이리저리 얽혔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노력이 모아져야 하겠죠. 이렇게 다 적어놓고 보니 이제 막 캠페인을 시작하는 마당에 너무 멀리 나간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숲은 우리에게 휴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뭇잎이 떨어져 썩고 벌레와 짐승들이 잡고 잡아먹히며 무수한 생명들이 사투를 벌이는 생성과 소멸의 공간입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의 오월을 성찰하고 마주하기 힘든 고통과 모순을 대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승효상 건축가의 『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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