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강력범죄와 인권

범죄문제가 사회 전반을 뒤흔들더니 정치로까지 번졌다. 성폭력과 아동대상 성범죄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인권 탓에 강력범죄가 늘었다는 주장마저 나돈다. 강력범죄를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도 비등하다. 사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다시 강력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여론들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일반인의 불안심리는 그 자체가 우리 시대의 병리를 징후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태를 선정적으로 단순화하고 증폭하는 현실도 감안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긴 하지만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점이 없진 않다. 예를 들어, 사형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터져나오긴 했지만, 적어도 사형집행을 당장 재개하라는 요구는 사회의 주류적 견해가 아닌 것 같다. 이것만 해도 우리 사회가 강력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차분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간혹 나오긴 한다.) 10년 전과 비교해보아도 상당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민주주의가 진행되면서 범죄율도 함께 증가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등 여러 포스트-민주화 국가들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크게 보면 한국도 이런 추세에 속하는 경우다. 왜 민주주의의 진전과 범죄율 사이에 일종의 상관관계(인과관계가 아닌)가 존재할까? 우선 권위주의 시절엔 강압적 통치방식이 정치적 자유와 일반범죄를 동시에 억눌렀다는 가설을 기억하자. 독재체제는 전 사회를 감시와 탄압으로 꽁꽁 묶어두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서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도 억압되지만,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사회환경도 억눌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공권력을 둘러싸고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한편으로 구시대와 빨리 결별해야 한다는 ‘청산심리’ (dismantling mentality)가 사회의 대세를 이루면서 더 이상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공권력을 동원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아직도 공권력의 권위주의적 동원이 있긴 하지만 (용산참사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일이 잘못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치안을 확보할 경우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전 사회가 학습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체제에 걸맞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식으로 치안을 확보하기에는 공권력의 주체들이 자신감이 부족하고 경험도 적다. 특히 경찰은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옛날식으로 하면 독재라고 비판받고, 민주적으로 하면 무능하다고 손가락질당한다. 그러니 경찰의 언행은 모순적일 때가 많고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경찰 내부에서 간간이 나오는 자성의 목소리. 그러나 시위현장이나 일선 지휘관들의 시대착오적인 자세를 보면 이같은 모순성을 잘 알 수 있다. 경우는 다르지만 딜레마에 빠지기는 인권운동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탄압에 반대하여 인권을 옹호할 때엔 인권운동이 국민의 지지를 받기 쉬웠다. 인권운동은 대중의 마음으로부터 성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인권운동가는 힘들지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강력범죄와 관련해서 인권운동은 여론의 전례 없는 돌팔매를 맞고 있다. 범죄자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것이 범죄 자체를 옹호하거나 불처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인권원칙에 맞춰 대우하라는 요구인데도 불구하고 대중은 인권운동이 범죄자를 감싼다고만 오해하곤 한다. 강력범죄에 관한 한 인권운동이 국민의 지탄을 받기 쉬워진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된 데에는 민주화 이후의 사회분위기뿐만 아니라 시장숭배-경쟁만능식 경제정책도 큰 몫을 했다. 사회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실직, 박탈, 열패감으로 자포자기에 빠진 잠재적 가해자들이 양산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분노를 자기 스스로에게 그리고 자기 바깥으로 표출하곤 한다. 최근 한국에 번역-소개된 제임스 길리언의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에도 이런 연구가 잘 나와 있다. 사회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스스로를 죽이거나(자살), 남을 죽이는(타살 혹은 ‘묻지마’범죄) 치사적 폭력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가해자만 양산되고 있는 게 아니다.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면서 가정과 학교와 지역사회의 지지망 바깥에 놓인 잠재적 피해자들 역시 엄청나게 늘어났다. 부모가 일터에 나가 야간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할 때 혼자 남겨진 아이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까? 가정문제로 가출한 청소년이 손쉽게 길거리 성매매와 착취에 빠졌을 때 그것을 보호해줄 안전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런 다양한 배경에서 가해자의 확산, 심각한 범행양상, 피해자에 대한 연민, 범죄자의 인권만 소중하냐는 식의 반감이 겹쳐져 대중의 분노가 인권운동을 향해 폭발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악순환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정부가 져야 마땅하다. 도대체 정부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2007년 말 지난번 대통령 선거 당시를 기억해보라. 이명박의 대선공약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 취임사 어느 한구석에도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 흔한 약속 한 마디 없었다.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대통령과 정부의 일차적 책무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과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의 경우 ‘일부’ 국민인 기업인의 재산은 보장해주겠다고 했지만 일반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약속은 일언반구 없었던 것이다. 보수적으로 평가하더라도 도대체 기본이 안 된 정부요, 개념이 없는 대통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일차적 책무를 방기해놓고 이제 와서 ‘범죄와의 전쟁’ 운운하는 건 무책임하고 즉흥적이며 ‘너무 늦고 너무 작은’ 조치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전으로 한국이 착취적 음란물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한 이미 ‘강대국’ 반열에 들어선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성년자 포르노의 생산에 있어 한국이 전세계 6위에 속하는 나라라고 하니 우리가 모르는 새 우리 사회의 범죄적 성도착 현실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와 범죄율은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도 마치 민주주의와 인권이 범죄의 직접원인인 양 몰아가는 건 무지하거나 악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범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성적이다. 모든 강력범죄가 똑같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일부 강력범죄에 대해 대중이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예컨대 체제변화 이후 범죄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우크라이나의 경우, 강도-강간-아동과 관련된 살인범을 극형에 처하라는 요구가 대단히 강했다. 전체 살인사건 중 강도-강간-아동관련 살인이 3.5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과 아동에 대한 성폭력이 특히 대중의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에 존속에 대한 범죄를 특히 심각하게 인식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범죄의 평가는 사회적 도덕감정의 현주소를 직접 반영한다.
이처럼 범죄의 실상과 대중의 범죄인식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재범자의 관리부실을 시정해야 한다는 건 백번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 강력범죄를 줄이기는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흥미있는 비유를 한 것을 여기에 인용해본다. 어떤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에 불량품이 많다고 치자. 불량품을 아무리 가려내어도 계속 불량품이 나올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제조공정 자체를 점검해서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 불량품만 가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죄도 마찬가지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범죄는 그 사회의 집단적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일탈을 뜻한다. 이런 문제를 개별적인 강력조치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강력범죄로 인해 시민들의 불안이 커질수록 공권력에 의한 강경책이 등장할 여지도 커진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여론의 지지를 얻을 경우 감시와 처벌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상승한다. 이때 일상적 사회통제(예: 불심검문)의 수준도 함께 상승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다른 수단에 의한 권위주의’가 재림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안전을 보호받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주는 역설이 발생한다. 토머스 홉스가 말했던 사회계약론과 흡사한 구도이다. 이것은 위축형 인간관을 전제로 하는 발상이다. 생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무조건 체제에 순응하라는 요구로 들리기 쉽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이 정도로 강퍅하고 절박한 사회일까? 그런 면에서 박근혜가 사형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적지 않은 우려를 자아낸다. 살인자에게는 “너도 죽을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전근대적 응보형 범죄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시각이다. 또한 이것은 일반범죄가 얼마나 철저히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아버지가 유신체제라는 명분으로 ‘북괴’의 위협에 맞서 정치적 경찰국가를 만들더니, 자식은 국민행복이라는 명분으로 ‘범죄’의 위협에 맞서 사회적 경찰국가를 만들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민주주의는 여러 차원을 거치며 발전하기 마련이다. 87체제가 정치 민주화의 서막을 연 이후, 최근 들어 경제 민주화 논의가 활발한가 싶더니, 범죄문제를 계기로 ‘사회 민주화’를 둘러싼 논쟁까지 촉발되었다. 사회 민주화란 각종 사회문제를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일체의 노력과 움직임을 뜻한다. 사회문제를 민주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면 사회현실과 사회구조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 어떤 사회적 이슈도 간단히, 한 칼에, 발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범죄를 간단히, 한 칼에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전형적인 군인의 발상이다. 5.16 쿠데타 이후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깡패들을 잡아 시가행진을 시키고, 넝마주이들을 강제노동 현장에 투입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의 범죄가 사라졌는가?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삼청교육대를 설치해서 조폭, 문신한 사람들 등등 온갖 인간들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던가? 엄청난 부작용만 낳고 우리사회의 범죄는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시간과 현명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범죄자의 고환을 제거하자는 사람은 사회 민주화의 반대자이고, 사회문제의 뿌리를 제거하자는 사람은 사회 민주화의 지지자라 할 수 있다. 무상급식 논쟁이 복지담론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흉악범죄 논쟁도 사회문제에 있어 민주시민들에게 중요한 학습효과를 주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범죄문제도 자유-민주-인권 원칙의 테두리 내에서 다루어야 옳다. 또한 장기적 사회정책을 중심에 놓고 치안대책이 그것을 보완하는 방식이 진정한 자유민주적 범죄대응이다. 바로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강점이자 자랑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인권운동이 흉악범죄를 대해는 기본관점이 숨어 있다. 인권친화적인 진정한 사회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대중의 분노를 헤아려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victimology)을 마련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좋겠다. 결론적으로 이번 논란에서 얻은 정치적 교훈이 있다면 사회 민주화에 대한 태도로써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와, 자유와 민주의 탈을 쓴 잠복성 권위주의 세력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된 점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말

*본고는 2012. 9. 12.<창비 주간논평>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