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학생인권조례, ‘상위법 우선의 원칙’을 제대로 적용해 바라보자

시사 이슈 덕에 온 국민이 법 공부를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엔 백화점 관계자들이 붕괴 전 건물 벽에 금이 가는 등의 이상 징후들을 간과한 것을 고의로 볼지 과실로 볼지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다. 그때 신문지면마다 '미필적 고의'란 용어가 소개되어 국민 대다수가 그 의미를 알게 됐다.

2004년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연대해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를 의결함으로써 헌법에 명시돼 있으나 사실상 상징적 의미만 갖던 탄핵제도에 국민적 관심이 일기도 했다.

최근 학생인권조례 관련 논란은 '미필적 고의'나 '탄핵'과 같이 난이도가 높지는 않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을 수 있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을 생각하게 한다. 말 그대로 상위규범은 하위규범에 우선하기 때문에 상위규범에 위배되는 하위규범은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고등학교 2, 3학년 사회과 선택과목인 '법과사회' 교과에도 등장하는 상당히 기본적인 이 원칙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면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된다.


학생인권조례를 사문화 시키는 시행령?

지난 18일 <동아일보>는 '학생인권조례 제동… 두발-소지품 검사 가능'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학생인권조례는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것이 기사의 핵심이다. 학칙에 학생의 두발과 소지품 검사 같은 내용을 명시하도록 허용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이 17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는데 조례보다 상위인 시행령에서 두발과 소지품을 학칙으로 제한할 수 있다고 정했으니 학생인권조례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기사는 곧 일선 학교들에 영향을 미쳤다. 23일 경기도 성남지역의 한 고교에선 교실마다 이 기사를 활용해 "학생인권조례는 사문화됐다"는 내용이 적힌 공고문을 일제히 게시하기도 했다(관련기사 : 윤근혁 기자의 <"인권조례는 사문화됐다" 경기 고교에 공고문 게시>).

정말 인권조례는 이제 힘을 잃고 사문화된 것일까? 논란의 중심에 놓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2012. 4.20 개정)의 정확한 내용을 살펴보자.

상위규범인 조례에 위배되는 학칙을 제정해도 된다는 시행령, 문제는 없을까?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1항. “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한 학교의 학교규칙(이하 ‘학칙’이라 한다)에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기재하여야 한다.
(중간생략) 7. 학생 포상, 징계, 징계 외의 지도방법, 두발 복장 등 용모, 교육목적상 필요한 소지품 검사,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 및 학교 내 교육 연구활동 보호와 질서 유지에 관한 사항 등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4항. “학교의 장은 제1항 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항에 관하여 학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눈을 씻고 봐도 개정된 시행령 어디에도 "학생의 두발을 제한하고 소지품 검사가 가능하다는 내용의 학칙을 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다. 그저 단위 학교에서 학생의 다양한 생활영역에 대해 교육 주체들이 논의를 통해 학교규칙 내용을 정한 뒤 이를 명시해야 한다는 내용만 담고 있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개정 시행령의 취지를 ‘학생의 생활에 대해 학교급마다 자유로이 (학생인권조례에 어긋나는 내용으로까지) 학칙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이는 교과부 관계자들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유권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교과부의 이 같은 해석은 상위법 우선의 원칙을 제대로 고려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하위규범인 개별 학교들의 학칙은 상위규범인 학생인권조례를 위배해서는 안 된다. 즉, 두발 제한, 소지품 검사 가능 등이 학생인권조례에 위반되는 것들이라면 이를 명시한 학칙들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기자 주 : 학생인권조례와 관련한 규범들의 위계는 '헌법>초중등교육법>초중등교육법 시행령>학생인권조례>단위 학교 교칙' 순이다)

그럼에도 교과부가 학생인권조례와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학칙을 규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고집하는 것은, ‘1학년 후배가 3학년 선배에게 함부로 대들어도 된다’는 내용의 교칙을 만들어 이를 아이들에게 유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헌법에 합치하는 조례가 위법이라면, 그 법은 문제가 없을까?

한편 상위법 우선의 원칙은 학생인권조례와 학칙뿐 아니라 학생인권조례와 초중등교육법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 1월 교과부는 대법원에 학생인권조례의 무효를 확인해달라는 소를 제기해 현재 소송이 진행중이다. 그런데 소송을 제기한 까닭 중 하나는 교과부가 ‘학생인권조례가 초중등교육법을 위배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조례는 학교규칙을 일률적으로 규제하여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등이 보장하는 학교의 자율성 및 학교 구성원의 학칙제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교과부가 ‘학교의 자율성 및 학교 구성권의 학칙제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판단한 학생인권조례의 두발 규제 금지, 소지품 검사 금지, 체벌 금지 등은 학생의 신체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행복추구권 등을 보장하기 위한, 헌법에 합치하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헌법에 보장된 학생의 권리를 보장하는 학생인권조례가 위배되는 상위법이 있다면 그 상위법이야말로 오히려 헌법에 위배되는 것 아닐까?
덧붙이는 말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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