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마이클 샌델 왜 데려왔느냐 물으신다면...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논설위원 지적에 답합니다.

지난 6월 1일 연세대 노천광장에 선 마이클 샌델은 만오천 청중에게 "사랑합니다"는 인사를 건네며 강연을 시작했다.

벌써 4일이 지났다. 우연히 표를 얻어 두 친구와 참석했던 지난 1일 연세대 노천광장에서의 마이클 샌델 강연회. 다음날 나는 이에 대한 기사를 써보려다 이미 여러 언론에서 자세히 보도한 것을 보고 생각을 접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다시금 4일 전의 기억을 더듬어 뭔가를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 강연회에 대한 한 경제신문사의 논설위원이 쓴 비판글 때문이었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정규재 논설위원은 마이클 샌델이 공동체주의 철학자라는 점부터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주의는 '전체주의의 낭만형 버전' 정도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아주 반가워할 사상이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사상을 지닌 학자의 '위험한'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부나 팔리면서 우리사회에 '위험한' 일이 발생했다.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든 독자들은 시장 아닌 공동체를 강조하는 샌델의 결론에만 주목하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반(反)시장, 반기업 정서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그의 강연엔 이런 게 있더군요

논설위원이 보기에 샌델의 주장은 "재미는 있지만 편협하고,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지엽적이며, 시장경제를 비판하지만 도덕적 호소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어 공허"하다. 물가 폭등과 같은 문제가 닥쳐도 시장은 정부보다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이런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런 샌델이 논설위원 보기엔 퍽이나 답답하다.

아니 답답함을 넘어 가증스럽다. 여러 딜레마 상황을 던져놓고 "자신이 직접 해답을 주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다니. 그건 사실 "처음부터 답이 없음에도 거짓 겸손을 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논설위원은 샌델의 이론을 '공론(空論)'이라 규정하며 "마이클 샌델 데려와 뭘 하자는 것인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심정에 어느 정도 공감은 인다. 논설위원이 비판 도구로 주요 사용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의 말대로 그리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있다.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대학 1학년 교양수업 수준으로 정리한 이 책에 특별히 새로운 이론이나 발상이 없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또 책에서 끊임없이 제시한 딜레마들의 대안이자 샌델의 정의가 소개된 마지막 장 '정의와 공동선'은 몇 번을 읽어도 뚜렷하게 잡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정의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책을 읽어도 독자들은 그 답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책을 덮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샌델의 이론이 '공론(空論)'이란 그의 지적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딱히 대안을 제시해 주지 않는 공허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논설위원의 설명대로 출판사의 탁월한 기획력과 이명박 정권의 '공정사회' 모토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교사인 나로서는 그렇다.

강의 원고를 묶어낸 책답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바다를 건너 하버드 대학 어느 교실로 들어서게 된다. 강의실 중앙에는 마이클 샌델이 서 있다. 그런데 교실에서 그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곳의 주인공은 바로 책을 읽는 우리들이다.

샌델이 최초의 문제를 던진다. 곧 답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의 얘기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외의 답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샌델은 그 답의 모순점을 지적해낸다. 때로 특정 상황을 설정해 모순을 스스로 느끼도록 하기도 한다. 그럼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답을 얘기하고 학생들이 다시 그 생각의 타당성에 젖어드는 그때 샌델이 또 나선다.

그렇게 끝없이 질문하고 딜레마 상황을 제시해 학생들 스스로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며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교실. 그 교실이 샌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고스란히 느껴진다. 책과 함께 EBS의 샌델 교수의 수업 동영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한층 더 직접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저 많은 인원이 함께 호흡하며 고민하고 얘기나눌 수 있을까 감탄마저 나온다.

샌델은 자신의 답을 '강의'하지 않았다. "모두 하나의 답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강연에서의 핵심이었다.


벤담, 밀, 롤즈,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그들에 대해 이미 '배웠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해 '고민'하고 '대화'해 본 일은 없다. 그저 교실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벤담은 양적 공리주의, 밀은 질적 공리주의', '롤즈 정의론의 두 가지 원칙'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된 낱낱의 지식들을 주입식으로 전달받아 달달거리며 암기했을 뿐이다.

질의응답으로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샌델은 각 학자들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강의'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상황에서 이 학자의 주장이, 저런 상황에서 저 학자의 주장이 과연 '정의로운가'를 끝없이 물으며 함께 얘기하자고, 함께 고민하자고 그렇게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 이와 같은 수업을 별반 경험해본 일 없는 우리 사회에서 샌델 교수의 수업은 놀랍고 신기하고 부러웠기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 것 아닐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샌델의 이론이 정말 '공론'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정의란 무엇인가>는 샌델의 고유한 답이 상당 부분 비어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나는 듣고 싶었다. 그런데 샌델은 여전히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아예 강의 자체를 별반 하지 않았다. 과장하자면 그가 두 시간의 강연회에서 내뱉은 말의 양은 나의 50분 수업에서보다도 적었다. 그것은 그가 하버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주인공이 아닌 안내자가 되기 위해 연세대 노천광장에 섰기 때문이었다. 6월 1일 저녁 연세대 노천광장에서의 주인공은 1만5000 청중이었다.

고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모두가 적극적으로 '공공담론'에 참여하는 이곳은 연대 노천광장이 아닌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이었다.

그는 물었고 우리는 답했다. 먼저 "레이디 가가의 티켓 암거래는 정당한가"하고 물었고 이에 대한 의견들을 충분히 들은 뒤 "그럼, 철학 강의를 위한 암표거래는 정당한가"하고 방향을 전환했다. 여러 목소리들 중 "교육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 포착되자 그는 이를 "기여입학제 정당성 문제"과 "독서를 위한 현금보상제 정당성 문제"로 연결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의문이 일었다. 그것은 바로 "시장 거래가 과연 만능일까?"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더 깊게 깊게 고민하도록 샌델은 질문을 쉬지 않았다. 스위스의 핵폐기물 현금 보상이 오히려 사람들의 지지율을 낯춘 사례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어린이집 지각과 관련한 벌금제가 더 많은 지각자들을 양산한 사례도 제시했다. 나아가 한국적 상황까지 적용해 스포츠스타 박주영이나 가수 비가 군대에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강연회에 함께 한 나와 친구들은 모두 교직에 있다. 각각 대학, 고등학교, 초등학교라는 각기 다른 학교에 속해 있긴 해도 어쨌든 우리에겐 '가르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지난 1일 샌델의 이같은 수업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우리는 강연회가 끝난 뒤에도 늦도록 우리만의 토론을 계속했다. 단 우리의 토론 주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강연회의 주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샌델의 수업 자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친구(연세대 생활과학대 강민주 교수)는 "같은 내용을 강의식으로 했다면 별 것 없을지 모르지만 스포츠 중계처럼 청중으로부터 끌어내 끊임없이 새롭고 현장감 넘치게 만드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친구(원묵초 성시온 교사)는 "누구든 한 번쯤 생각해봤을, 하지만 잊고 사는 생각들을 수면 위로 올려 순수하게 고민하게 해준단 지점이 청중에게 힘을 불러 넣어주고 있다. 또한 핀트에서 어긋난 답을 하는 경우에도 무시하지 않으면서 토론의 주요 흐름을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샌델의 수업을 곱씹으며 감회를 나눴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교실로 돌아가 샌델의 하버드 강의실을, 오늘의 노천광장을 재연해보고 싶다는데 일치했다.

교사인 나... 그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나로서는 두 친구와 달리 입시라는 제약조건이 있기는 하다. 학습량이 많고 오지선다 수능시험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토론수업은 사치가 된다. 하루빨리 진도 뺀 뒤 문제풀며 복습을 하기엔 주입식 강의식 수업만큼 적합한 게 없다. 또 강의식 수업이 지배적인 우리의 학교문화 탓에 어쩌다 토론수업을 해볼라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을 열지 않아 몇몇 뛰어난 아이들만의 독주무대가 돼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불가피하다해도 후자의 경우엔 현장에서 직접 느낀 샌델의 수업을 참고해본다면 보다 많은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입을 열고 귀를 열게 하도록 도와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논설위원의 말이 맞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은 정의가 도대체 뭔지 끝까지 대답을 피했다. 6월 1일 연세대 노천광장에서도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돈으로 사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과 노천광장의 수많은 청중들이 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의 과정에서 이들은 '시민'이 되어갔다. 아고라 광장에 모여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던 그리스의 그들처럼.

샌델은 나와 친구들에게 토론수업에 대해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 너와 내가 소통하며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론은 '공론(空論)'일지 모르나 센댈을 만난 이들은 그를 통해 '공공담론(公共談論)'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노천광장의 적지 않은 인원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얘기나누며 '시민'이 되어갔다.
덧붙이는 말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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