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욱일기 교과서 방치? 우리라도 행동하자”
초등학생들 뿔났다, 이주호장관 큰일 났다

[현장] ‘욱일승천기’ 교과서에 존속...초교 4학년생들 직접 행동 결정

경기 서정초 박항재 교사가 이 학교 4학년 4반 학생들과 함께 모둠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안옥수 기자

한 초등학교의 4학년 학생들이 ‘욱일승천기’ 무늬가 실린 교과서를 고치지 않기로 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와 이주호 장관에 대해 직접 항의행동을 전개할 것을 표결로 결정했다. 지난 25일 오후 1시간여에 걸쳐 집중 모둠토론을 벌인 결과다.

이날 오후 1시 50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정초등학교 4학년 4반 교실. 23명의 학생 전체가 토의를 하기 시작했다. 주제는 “<사회> 교과서 ‘욱일승천기’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책이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격”

‘욱일승천기 교과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경기 서정초 4학년 4반 학생들이 모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가운데 학생이 교과서에 실린 욱일승천기 무늬를 처음 발견한 채승혁 군(10). 안옥수 기자
일본 군국주의 시대 깃발인 욱일승천기 무늬가 교과서에 담겨 있는 사실에 대해 학생들은 격앙된 발언을 쏟아냈다. 이 학급 학생 대부분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일본 군국주의 깃발이 우리 교과서에서 휘날리는 게 우리를 욕보이는 것이다.”
“욱일승천기를 책에서 보고 너무 기분이 나빴다. 다시 일제가 침략할 것 같다.”
“한국 책이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교과서가 흙이 되고 욱일승천기가 씨앗이 되어 일본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어엿한 대한민국인데 교과부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아직도 일본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앞서 지난 20일 오후 이 학교 4학년 4반은 크게 술렁인 바 있다. 이 학급 채승혁 군(10)이 2학기 국정 <사회> 교과서(2010년 초판 발행, 2012년 9월 1일 3쇄) 30쪽에서 욱일승천기 무늬를 발견해 학생들 대부분이 공분했기 때문이다.

토의 학습에 참여하고 있는 한 학생. 안옥수 기자
하지만 교과부 교과서기획팀은 욱일승천기 무늬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교과서기획팀은 수정 불가 이유로 ▲교과서를 사용한 3년간 전국 학교에서 한 건의 문제제기도 없었고 ▲무늬의 크기가 2∼3cm 정도로 작으며 ▲2014년부터는 새 교과서가 적용된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서정초 4학년 4반 학생들은 상당히 분해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담임을 맡은 박항재 교사(43)는 <국어>교과 ‘적절한 의견 말하기’ 교육과정을 활용해 이날 모둠 토론학습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23명 중 19명이 “교과서 무늬와 욱일승천기 똑 같다”

이날 수업에서 먼저 박 교사는 <사회> 교과서 무늬와 욱일승천기를 보여준 뒤 “둘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똑 같아요”라고 합창했다. “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들어보자”고 박 교사가 제안했다.

23명의 학생 가운데 19명이 손을 들었다.

박 교사는 다시 “올해 1학기 전부터 욱일승천기를 본 적이 있는 사람?”하고 물었다. 7명이 손을 들었을 뿐이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최근 몇 달 사이에 욱일승천기의 모양을 뒤늦게 알았다는 얘기다. 학생들은 “<각시탈>(드라마)을 본 뒤 알게 됐다. 런던 올림픽 뒤에 알게 됐다”고 제각기 한마디씩 던졌다.

박 교사는 수업 중간쯤에 “교과부에서 교과서의 욱일승천기 무늬를 바꾸지 않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학생 10여 명이 제 각기 의견을 냈다.

한 학생은 “우리는 어쩔 수 없더라도 3학년 동생들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그 책을 쓰게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학생은 “교과부가 비용이 많이 들어 고치기 어렵다면 우리라도 용돈을 모아 보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초등 4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 30쪽에 실려 있는 욱일승천기 무늬. @박항재
이어 표결을 진행했다. 결과는 ‘지금 당장 수정’ 13명, ‘2013년 전에 수정’ 9명, ‘2014년까지 참자’ 1명.

학생들의 표결 결과에 따라 이제 6개 모둠으로 나눠 모둠 토의가 시작됐다. 주제는 “어떻게 우리가 교과서의 욱일승천기를 없앨 수 있을까”였다.

이주호 장관에게 항의 편지와 댓글운동 결정

10여 분간 토의를 거친 학생들은 모둠별로 토의 내용을 발표한 뒤, 이에 대해 다시 표결을 진행했다. 다득표 순으로 결정된 5개의 행동 방안은 다음과 같다.

-(교과부로 하여금) 임시스티커를 만들게 해 ‘욱일승천기’를 가리도록 한다.(22표)
-인터넷 댓글 운동을 벌인다.(20표)
-이주호 교과부장관에게 항의와 건의 편지를 보낸다.(19표)
-교과서 수정 캠페인을 벌인다.(19표)
-교과부 사이트 등에 사이버 시위를 벌인다.(17표)

일부 학생들은 ‘교과부 앞 항의시위와 면담 신청’, ‘교과부 사이트 사이버 테러’ 등의 다소 과격한 의견도 내놨지만, 많은 지지표를 얻지는 못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교과서를 확대해 칠판에 붙여놓은 욱일승천기 무늬 위에 학생들이 태극기를 그려 넣었다. 안옥수 기자
학생들은 이날 각자 집에 돌아가 ‘이주호 장관에게 보낼 편지를 써오기’로 했다. 박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과부장관님께 보내는 편지를 꼭 교과부에 보내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업이 끝난 뒤 박 교사는 “오늘 학생들의 발표와 토의 집중도는 내가 교사 생활 중 진행한 수업 가운데 가장 높았다”면서 “자기들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려는 자발적인 학습이기에 이런 놀라운 모습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학생들이 갖고 온 <사회> 교과서를 펼쳐봤다. 한 학생은 문제의 그 욱일승천기 무늬가 보이지 않도록 연필로 까맣게 칠해놓았다. 또 다른 학생은 욱일승천기 무늬 위에 색연필로 태극문양을 그려놓기도 했다.

10살 초등학생들도 교과서에 있는 욱일승천기 무늬를 감추기 위해 남모르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말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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