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ActOn] 여전히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17살이면 국가에 불려가 열손가락 지문을 강제적으로 날인해야 한다. 내가 자라서 언제 범죄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1968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도입한 이 이상한 제도에 대해서 아무도 감히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1996년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한 개의 카드에 주민등록 정보부터 운전면허, 건강보험, 신용카드 정보가 담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총체적인 국민 감시에 대한 각계의 반대가 거셌다. 결국 전자주민카드는 1997년 당시 김대중 정부가 백지화하면서 폐기되었지만, 지문날인을 비롯해 한국식 주민등록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반인권적 제도라는 문제의식은 계속되었다.

1999년 본격적인 지문날인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지문과 주민등록 정보를 전자화하는 플라스틱 주민등록증 발급을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공개적인 지문날인 거부자가 수백 명에 달했고 이들의 주소지에서는 주민등록증 경신을 강요하는 동사무소 측과 거부자 간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의 성과로 1999년 지문날인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기되었다.

그 후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지문날인 반대운동은 2002년 지문날인 반대연대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지문날인 반대연대는 국가가 지문날인 거부자에 대한 참정권과 여권 발급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고 주민등록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내년이면 지문날인 제도가 40주년을 맞는다. 전망은 밝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지문날인 제도가 합헌이라고 결정하였고, 미국이 주도하는 생체여권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운동은 꾸준히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지난 7월 임종인 의원은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 지문날인을 폐지하자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국가에 의한 과도한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및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려는 취지에서다. 그리고 진보네트워크센터는 오늘도 지문날인 거부자들로부터 전화와 메일을 받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헌법공부를 하면서 지문날인에 대해서 합헌 판결을 내인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게 되는, 지문날인에 반대하는 한 대학생입니다.


요즘, 전자여권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위조를 방지한다고 바꾼 지 몇 년 채 되지 않은 여권을 미국 출입국 시 비자를 면제받기 위해서 또다시 엄청난 혈세를 들여서 바꾼다고 하네요. 며칠 전 대체 신분증으로 여권을 만들기 위해 시청에 갔다가 담당공무원으로 부터 내년에 전자여권으로 바뀌게 되면 지문날인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 답답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신문 등 각종 매체에서 여권대란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떠들고 있는 것을 보고서 아주 가까이 다가온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을 근거로 여러 기관에서 국민들의 생체정보를 요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갈수록 정도가 너무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운전면허 연습장에서뿐만 아니라 모 대학 기숙사에서 출입감시용으로 홍채인식기를 설치하려다 학생들의 반발을 샀다는 얘기도 들리고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급식 도식을 방지하기 위해 지문정보를 이용하려다 학부모들의 원성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리고……. 편의성을 목적으로 사람들의 인권을 자꾸 무시하고 밟아버리는 것 같아서 참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제가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굳이 인간의 존엄과 신체적 자유의 보장이라는 헌법상의 조문들을 들지 않더라도 나의 몸은 나의 것이고 누구든 내 몸의 정보를 함부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나는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며 국가가 보호할 의무를 지는 건실한 국민입니다. 나는 잠재적인 범죄자가 아니며, 몇 개의 기호로 정리되었다가 행정편의상의 목적으로 함부로 타인의 정보와 대조해 볼 수 있는 펀치카드가 아닙니다. 나의 생체정보는 나만의 것이지 나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국가 기타 기관에서 함부로 수집하고 취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소는 쓰나미와 같은 사고 발생 시에 국민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지문날인제도가 필요하다고 말을 했지만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민들을 경찰청 자료실 속을 맴도는 하나의 지문자료 하나로 처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적인 일입니다. 정말로 국가가 국민들을 보호하려고 한다면 반 인권적이고 강제적으로 수집된 지문정보를 수동적으로 대조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국민들의 의사와 인권을 존중해주는 과학적이고 능동적인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투자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3년 전, 제가 처음 주민등록증 발급통지서를 받았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주민등록증을 만든 지 몇 십여 년이나 지난 어른들께서는 그때의 감정을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주민등록증을 받은 제 친구들은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오라는 그 통지서가 ‘이제 너희들을 성인으로서 인정한다’고 말해주는 어른 인증서처럼 느껴져서 참 신나고 뿌듯했습니다. 그렇게 친구들은 들뜬 마음으로 하나둘씩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왔고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통지서를 받지 못한 친구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민증을 구경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구들의 민증 뒷면에 떡 하니 자리 잡은 검은 지문을 보면서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어요. 기분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친구들도 지문을 찍으면서 기분이 많이 나빴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지문날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어른증명서를 위해 잠깐의 기분 나쁨을 감수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지문을 국가에 헌납하고 왔습니다.


지문날인반대자임을 자청하고 지내는 동안 가장 가슴이 무거운 일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지문 그거 한번 찍고 말지 뭐가 문제야?” 하고 생각하는 인권 불감증입니다.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그 주민등록증에 범죄인 검거의 편의성을 위해 당연히 지문을 찍어 넣어야 한다는 당연하지 않은 명제에 세뇌당한 사람들은, 제도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하려는 노력조차 않습니다. 주민등록 제도와 지문날인이 언제 만들어졌고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반대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사람들은 지문날인을 반대하고 주민등록증 발급을 거부하는 저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봅니다. 그런 시선들이 제가 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계속하여 지키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제도가 어떤 제도이며 어떻게 우리의 인권을 침해하는가에 대해서 사실관계만이라도 제대로 알려준다면 좀 더 많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첫 출발점이 주민등록증 발급을 앞두고 있는 청소년에게 나의 몸은 머리카락 한 끝이라도 나의 것이라는 인권교육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속도로 통행권에 찍힌 지문으로 범인을 잡았다는 뉴스에 경찰들이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내는 학생들에게, 그 범인을 잡기 위해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선량한 국민들의 지문이 모두 범죄자의 그것으로 간주되어 범인들의 그것과 대조되는 수모를 겪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 청소년들은 입시공부에만 치여서 제대로 된 인권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요.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해본 학생들은 더더욱 없습니다. 나 자신의 인권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고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면 앞으로도 수십만 수백만의 청소년들은 즐겁고 마음으로 지문과 성인인증서를 교환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더 많은 생체정보를 요구하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놓을 거에요.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변화시키려는 사회는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미 지문을 찍고 주민등록증을 한 번이라도 발급받으신 적이 있는 어른들의 목소리보다 국가에서 계속 지문을 수집해야 하는 다음 세대 청소년들의 외침이 더 크게 울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잘못 흘러가는 사회제도를 바로잡기 위해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자각과 의식이 필요하다면, 소수의 인권옹호론자들이 모여 정부에 대고 무어라 외치는 것 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우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아니라, 또한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가 아니라, 당연한 것은 당연하게, 당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가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 키작은 해바라기님의 이메일


출처: 웹진Ac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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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솔

    지문 날인 반대자입니다. 현재 지문날인반대연대에서 별다른 활동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혹 활동가분들 보시면 연락부탁드립니다. febos@hanmail.net

  • 푸른솔

    지문 날인 반대자입니다. 현재 지문날인반대연대에서 별다른 활동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혹 활동가분들 보시면 연락부탁드립니다. febo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