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10년 16호 특집기사 1
장애인들의 탈출이 계속되고 있다
김유미(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지난 토요일 한 장애인이 또 시설에서 ‘탈출’했다. 이번에도 ‘한 편의 드라마’가 연출됐다. 28세 남성 S, 뇌병변장애에 언어장애가 있다. 열 달 전 경기도에 있는 ㄱ시설에서 동료들과 함께 ‘탈시설’ 하려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로 실패, 전라남도 장성에 있는 ㄴ노인요양병원으로 보내진다. ㄴ병원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하던 S와 시설 동료들 사이에 작은 싸움이 일어나고, 이 일로 S는 ㄷ정신병원에 격리된다. 미치지 않은 S는 시설 밖 친구들에게 SOS를 날린다. 그리고 얼마 뒤 시설 밖 친구들이 차를 끌고 ㄷ정신병원에 S를 ‘면회’하러 간다. 친구들을 만난 S는 친구들에게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ㄷ병원 관계자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S는 친구들의 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한다. ㄷ정신병원은 경찰에 S가 납치되었다고 신고. S가 탄 차량 번호가 노출된 탓에 S와 친구들은 경찰 검문을 피해 국도와 고속도로를 번갈아 타 가며 급히 서울행…
지금 S는 잘 있다. S와 친구들, 분노한 S의 아버지, 납치범 탐문에 나선 경찰, 관리 부실 책임을 뒤집어쓸까 노심초사한 정신병원 사이에 여전히 긴장이 흐르고 있긴 하다. S는 열 달 전 함께 탈시설을 하려고 했던 ㄱ시설 출신 친구들 집에 머물며, 앞으로 만들어 가야할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병원에서 뭔지도 모르고 먹어야 했던 약을 끊은 덕분에 더 안정된 S.
지난해 여름에도 한 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마흔두 살의 지체장애가 있는 여성, A. 경기도 산골짜기 시설에 살던 그녀는 사람들이 모두 ‘소등’하고 ‘취침’한 밤에, 온 몸으로 기어 시설을 탈출했다. 큰 길이, 불빛이 보일 때까지 무작정 기었다. 몇 시간을 기었는지 모르겠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그녀를 발견해 근처 경찰서에 데려다주었다. 언젠가 시설에 들어와 ‘탈시설 욕구’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갔던 S가 생각나 무작정 ‘탈출했으니 도와 달라’ SOS를 날린다. A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S와 경찰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시설 관리자. A를 가운데 두고 설전이 벌어지고, A는 S와 함께 시설이 있는 동네를 벗어난다. 밤 1시, 그녀의 탈출이 이뤄졌다. A도 지금 잘 살고 있다. 그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다. A가 한밤중에 시설을 기어서라도 나가야겠다 결심했던 건, 시설에서 A의 손전화기를 빼앗은 사건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녀의 남편인 T와 그녀는 시설에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A와 T는 시설에서 나가 함께 살기로 약속했으나 A 부모가 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T 먼저 시설을 나가게 된다. 떨어져 있는 동안 A와 T를 이은 유일한 수단은 손전화. 시설에선 A가 손전화를 통해 계속 ‘탈시설’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고, 전화를 못 쓰게 눈치를 주다가 결국 이를 빼앗고 만다. 눈앞이 깜깜해진 그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기로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설에서 기어 나온다. 그곳에선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벼락 맞듯 깨달은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라고 표현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바로 2009년, 2010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다. 몇 십 년 전 일어났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자, 이제 극적인 드라마의 재미에서 빠져나와 ‘시설’에 주목해보자. 대체 시설이 어떤 곳이기에 장애인들이 거기에서 ‘탈출’하고 있는지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사람이 죽어나갔다. 정신질환자 80%, 알콜중독자 20%, 한 방에 60명이 똥통, 소변통 옆에서 잤다. 새벽 4시 기상시간. 배고파서 개밥도 먹어 봤었다.” 1998년에 충주 장호원 근처에 있었던 장애인생활시설의 모습이다. 당시 시설은 열악했고, 인권유린의 온상이 되어 우리 앞에 종종 등장했다. 그곳에 살았던 야학 학생 덕민께서는 당시를 “완전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시설은 한 방송사의 ‘현장고발’ 보도로 바로 폐쇄됐다.
시설 폐쇄로 살 곳이 없어진 덕민은 ‘음성 꽃동네’로 옮겨 갔다. “꽃동네는 동네가 아니었다. 작은 도시라 할 만했다. 5000여명이 있었는데 내가 살던 건물만 해도 300여명. 한 방에 15명 내지 17명까지 정신지체, 뇌성마비, 중도장애인들이 같이 생활했다.” 꽃동네는 그 명성답게 장애인을 잘 보살폈다. 덕민은 꽃동네를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라고 이야기한다. 21세기 시설은 이제 적어도 먹고 생활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는 듯하다. 아직도 종종 인권유린 뉴스가 흘러나오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시설이 살 만한 곳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춥고 배고프지 않았지만 덕민은 2004년 꽃동네에서 나왔다. 그 역시 지금 잘 살고 있다.
“아침에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 반에 밥을 먹고, 씻고 뭐하고 하다보면 8시가 돼요. 8시부터 8시 반까지 기도 시간이고, 기도가 끝나면 10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근무자들이 점심 준비를 해요. 우리는 11시 반에서 12시까지 점심을 먹어요. 12시부터는 근무자들이 밥을 먹고, 그 뒤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는 자유시간이에요. 자유시간에 저는 주로 컴퓨터를 해요. 3시 반부터 4시 반까지 근무자들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해요. 4시 반부터 5시까지 밥을 먹고, 5시부터 청소하고 이불 깔고 잘 준비를 해요. 6시부터 6시 반까지 저녁 기도 시간이고, 그 뒤론 또 자유시간이에요. 9시에는 불을 꺼요. 불은 꺼야 되는데 텔레비전은 안 꺼도 돼요. 텔레비전은 11시까지 볼 수 있어요.” 2010년 4월 현재 꽃동네에 살고 있는 국진 씨, 종일 뭐하며 지내냐는 질문에 그가 한 대답이다. 국진 씨는 1990년 그의 나이 15살에 꽃동네에 입소해 20년째 살고 있다.
시설 안과 시설 밖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시설 안의 삶은 군대 안, 감옥 안과 닮았다. 한 방에서 대여섯 명이 5시 반 기상 9시 소등하는 생활을 20년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학교에서 단체 생활과 규칙을 가르치기 위해 진행하는 극기 훈련, 야영 프로그램도 3박 4일이면 족했다. 시설 안의 삶, 장애인의 삶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된다는 전제를 깔아야 시설이 살 만하다,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결국 장애인이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장애인에 대한 포기가 전제된 말. “아직까지 시설에 대한 불만은, 그렇게 큰 불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소한 것들… 나도 자립생활 한번 해보자, 남들 같이 일도 해보고 돈도 벌어보고 한번 그렇게 살아보자 그런 마음이 있는 거죠… 시설에서는 틀에 박힌 생활이니까. 오늘이 어제고, 어제가 오늘이고…”
지난해 국진 씨는 시설에서 나와 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시설 바깥으로부터 받았다. 가족의 반대가 심하기도 했지만 그가 선뜻 나가지 못 한 건 대책이 없어서였다. “그때는 숙일 수밖에 없었어요. 돈… 보증금이 필요한데… 그동안 제가 나오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무조건 나오겠다고 했던 거예요. 근데 돈 문제가 걸리니까 고집을 끝까지 못 부리겠더라고요.”
‘탈시설’은 엄연한 현실의 문제다. 시설에서 삶을 저당 잡힌 채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무슨 돈이 있을 것이며, 가족의 포기로 버려진 이들에게 돌아갈 집이 있을 리 없고, 게다가 일상적으로 활동보조가 따라 붙어야 삶이 가능하다는 취약점(?)도 있다. 모든 것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밑바닥에서 탈시설은 시작된다. 투쟁하지 않으면 되는 게 없는 게 탈시설 장애인들의 삶이다.
야학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탈시설 중증장애인들은 “선생님, 화장실 좀…” 화장실에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하고, “안 바쁘시면 밥 좀 먹여주세요.” 매 끼니 밥 먹을 걱정을 한다. 보증금을 모으기 위해 과일 가게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활동보조인이 갑자기 오지 못 하는 날이면 축축한 엉덩이로 종일 천장만 보고 누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마치 신고식이라도 하듯 한번 씩 대성통곡을 한다. 힘들어죽겠다, 외로워죽겠다는 이야기는 해도 시설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현재 국진 씨는 꽃동네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와 음성군수를 상대로 자립생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지난 해 12월 음성군에 사회복지서비스 변경 신청을 했는데,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업법 제33조는 복지서비스를 이용하는 당사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게 돼 있다. 당사자가 서비스를 신청하면 관할 기관은 욕구 조사를 하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국진 씨는 음성군에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해달라고 신청했다. 하지만 군에서는 시설에서 나오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 있다 정도의, 누구나 아는 정보만 제공했다. 욕구조사도 없었다. 국진 씨는 음성군청이 자신이 제기한 사회복지서비스 변경 신청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문제제기하는 소송을 시작했다. 소송의 의미는 크지만 가족의 반대가 여전하고 소송이 잘 될지,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내가 몸도 못 가누는데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것이며, 몸이 갑자기 아프면 누가 병원에 데려갈 것이며, 갑자기 위험한 일이 나도 대처가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시설에 있으면 다 알아서 해주는데 왜 그러냐고… 사람으로 살면서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내가 느끼는 기쁨, 그런 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아도 천국이 지옥이 되고, 지옥에서도 내가 기뻐하면 그게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진 씨의 드라마는 아무래도 대하드라마가 되려나 보다. 야학에선 ‘포기’란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말장난을 하곤 한다. 썰렁하지만 맞는 말 같다. 시설에 장애인을 가두는 것, 스스로 시설에 갇히는 것, 결국 서로 함께 살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 꽃동네 국진 씨가 어서 이곳으로 나오면 좋겠다. 활동보조가 없어 쩔쩔매고 대성통곡하는 시간을 겪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오늘, 내일이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보다, 후들거릴지라도 이곳에서 함께 사는 게 낫다. 삶은 밑바닥에서 만들어 가면 되는 거니까. 포기하는 것보다 투쟁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