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

[기고] 촛불 봉기의 '승리'를 진정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다중의 전위적 기획인가?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인가?

지난 주 종교인들의 ‘감동적인’ 동참, 그리고 이어지는 7월 5일의 대규모 ‘평화집회’는 두 가지의 서로 모순된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부의 끈질긴 버티기 혹은 공안탄압에 의해 지쳐가고 있던 촛불의 불씨를 되살리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다중의 전위적 활력과 차이의 생산을 거세하는 ‘국민화’ 기획의 완성이기도 했다.

물론 이 기획은 지난주에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기획 - 다중의 전위적 기획과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이하 전위적 기획과 국민화 기획) - 은 삶정치를 매개로 지속적으로 부딪히면서 공존해왔다. 5월 2일의 청소년들의 봉기, 24일의 대책위 주도의 집회로부터의 이탈과 거리행진, 갖가지 구호로 무장한 대중의 다종다양한 ‘자기표현’으로서의 가두시위의 모습, 막으면 돌아가는 떼 지성의 흐름, 지도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 등이 전자의 한 예라면, 대형무대의 설치, 구호의 단일화, 방송차의 행진 지도, 각종 ‘국민 대토론회’, 시위대를 호명하는 ‘국민’ 호칭, 조금씩 시도되는 것으로 보이는 정부와의 협상, 국회등원요구 등은 후자의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기획의 수행자는 결코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때로는 전위적 기획을 수행하고, 다른 때는 국민화 기획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 동시에 두 가지 기획이 함께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 두 기획은 명시적이고 언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근본에서 작동하는, 말하자면 ‘힘(혹은 욕망)의 흐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민화 기획의 완성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촛불봉기 내에서 ‘국민화’의 기획을 이끌어 온 “국민대책위”가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이 그 기획을 완성시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촛불봉기에서 ‘국민화’의 기획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라는 초월적 수준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국민’으로의 통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6월 10일의 대규모 행진으로 본격화된 이러한 국민화 기획은 정부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촛불봉기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정부는 대규모의 촛불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퍼포먼스를 벌이자마자 전열을 가다듬고 농성전과 공안탄압에 나섰다. 그것은 여러 방향으로 흐르던 힘이,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힘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6월 10일에 크게 한 번 터져나온 외침 이후로도 대형 집회는 이어졌지만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리한 반복일 뿐이었다. “대형집회하면 명박산성 쌓으면 되고, 촛불의 ‘숫자’가 줄어들면 공안탄압하면 되고~♪” 경찰 측의 오바스런 폭력행위가 종교인들을 끌어내긴 했지만 그것이 전반적인 흐름을 역전시키진 못했다. 촛불봉기는 이제 국가에 대항하는 저항적 ‘국민운동’으로 단일화되었다.

혁명을 망각하기

더 큰 문제는 열심히 촛불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특히 인권활동가들을 비롯하여 봉기의 전위적 기획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지난 5일의 집회 이후 상당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6.10에 이어 또 다시 50여 만 명이 모였으나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생성하는 사건을 만들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만연하고 있다.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이미 유통까지 되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이 바로 이 거리의 주인이며, 누구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초창기 봉기의 그 충만함을 찾기란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입을 쳐다본다. 사제단 신부님의 입, 대책위 활동가의 입, 또 누군가의 입. 그리고 이제 누군가 “우리 국민”의 저항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게 대책위 때문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정서를 극복하도록 이끌기보다는 더욱 더 큰 무력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망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혁명’을 망각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혁명’이라는 단어에서 정권탈취를 떠올린다. 응집된 인민권력이 단번에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의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과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청와대로 가자!”, “차벽을 넘자!”는 외침과, 그것을 위한 직접행동들(줄다리기, 토성 쌓기) 이외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좀 더 넓게는 저녁의 촛불집회와 가두시위 외에 이 봉기의 시간 속에서 다른 실천을 기획하지 못하는 건 “다중”을 말하고, 상상력과 전위를 논하는 이들조차도 이 봉기를 기억속의 ‘혁명’ 속에 억지로 끌어 맞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억 속의 혁명과 현실의 갭 사이에서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은 “다중”적이어선 실현될 수 없는 기획이다. 혁명 지도부의 확고한 지도 아래 인민이 한 몸이 되어 응집된 폭력으로 국가를 뒤집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혁명을 원한다면 당장 구체적으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장비(어쩌면 무기!)를 동원하여 명박 산성을 무너뜨리고 청와대와 정부청사, 국회로 행진하여 지배자들을 무장해제하고 새로운 정부를 선언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 경우 어쩌면 군대와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중의 봉기라는 형태로 시작된 이 국면이 이런 식의 혁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없음을(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아가서도 안 됨을) 인정해야 한다.

승리의 충격

촛불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두 달 전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우린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승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그레이버의 논의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 역시 9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의 반세계화/반전 투쟁에 참가하면서 우리와 같은 문제 - 패배감의 만연 - 에 부딪혔다. 그는 패배감의 이유를 운동의 단기적 목표는 전혀 달성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중기적 목표는 너무나도 빨리 달성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찾는다. 여기서 단기적 목표란 -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면 - 특정 서밋(IMF, WTO, G8 등)을 저지해서 철폐하는 것을 말하고, 중기적 목표란 워싱턴 컨센서스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고 각종 국제기구들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직접 민주주의운동의 모델을 보급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적어도 급진적인 운동의 분파에게) 최종적 과제는 국가를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문제는 최종적 과제가 중기적 과제의 빠른 성공과 단기적 과제의 실패로 인해 무한히 연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반세계화 운동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단 몇 년 사이에 전지구적 수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실제로 IMF, 세계은행 등이 가진 자본금이나, 이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남미의 경우 이제는 거의 IMF없는 남미를 상상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하지만 그들의 단기적 목표는 거의 대부분 실패한 것이었다. G8 회담이나 WTO회담은 어찌되었던 무사히 열렸고, 경찰폭력은 단호히 시위대를 막았다. “반테러”의 명분으로 각국의 공항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패는 활동가들로 하여금 중기적 목표에 대한 운동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운동을 분열시켰다. 구 좌파는 구 좌파대로 자신의 혁명이상에 이 운동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물러나고, NGO들이나 종교단체는 “자본주의 폐지”라는 좌파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해 물러나며, 아나키스트들을 비롯한 직접행동 그룹들은 그 과정에서 패배감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최종적 목표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만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직접행동 그룹이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혁명이란 단번에 국가 단위(혹은 전지구적 단위)에서 국가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폐절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실제 승리한 지점에서부터 그러한 자본주의 바깥의 삶, 국가 바깥의 삶을 살며 그러한 삶과 저항, 그리고 수많은 승리들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타도되는 하나의 순간, 즉 명확한 단절이라는 옛 견해의 이면은, 그에 모자라는 어떤 것도 진정한 승리는 전연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여전히 건재한다면, 그리고 한 때 전복적이었던 견해를 팔아치우기 시작한다면,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이겼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중략)... 내게 이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자본주의 기업이 페미니스트 책과 영화, 그리고 다른 상품들을 마케팅하기 시작했다고 하여, 페미니즘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한 방에 타도하지 않는 한, 이것은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명백한 징표다. 어쩌면 혁명을 향한 실질적인 길은 무한한 흡수의 순간, 무한한 승리 캠페인의 순간, 무한한 작은 반란의 순간 또는 무한한 탈주와 조용한 자율의 순간을 포함할 지 모른다. (중략)...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가 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며, 사실상 약간은 이겼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실 최근 우리는 상당히 많이 이기고 있다.(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좀 더 우리가 거둔 성과들을 분명한 승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혁명”은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조정환은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1)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대중화시키고 있다.
2) 수구적인 이데올로기적 권력기구 조중동의 권력을 침식하고 있다.
3) 국가권력과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성하고 있다.
4) 사회 각계각층을 반이명박 전선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5) 새로운 항쟁의 주체들을 생산하고 있다.
6) 봉기의 새로운 기술들을 매일 매일 창조하고 있다.
(조정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또 촛불봉기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시민의 상식” 목록도 있다.

첫째, 헌법 1조 지켜져야 하며, 국민 원하면 대통령도 리콜해야 한다는 생각
둘째, '배운여자'와 '배운남자'는 더 이상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생각
셋째, 사실을 왜곡 보도하는 조중동, 언론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생각
넷째, '민영화'와 '자율화'는 생각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
다섯째,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울 수 있다는 생각
(이수연, <촛불과 함께한 두 달,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이 것 이외에도 수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만 명이 모인 광장은 김밥과 생수가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뮌의 모델을 제시해주었고, 생협이나 대안학교 운동 등 그동안 ‘탈정치적 중산층 운동’으로 여겨져왔던 운동에 급진적 삶정치의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조합원 수가 늘어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무슨 일만 생기면 법원, 인권위, 헌재만 바라보던 사회운동이 다시금 직접행동의 능력을 찾아가고 있기도 하다.(그 과정에서 집시법은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두 달 전의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성과들이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사 지금 우리가 공안정국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미국산 쇠고기가 제대로 된 검증장치 없이 유통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바로 우리가 이룬 이 성과 위에서 이어갈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승리로 인식하고 더 많은 승리로 과감히 나갈 때 가능한 것이겠지만.

요구되는 상상력 - 대중집회를 넘어 소수 정치로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집회는 이제 광우병 쇠고기 반대 내지는 몇 가지 핵심 이슈들만이 이야기되는 ‘국민저항’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그 이슈 바깥의 주장, 또한 국민 바깥의 주체성들을 배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봉기의 형식 역시 “대형무대와 방송차, 말하는 지도부와 듣는 청중”의 질서로 배치되고 있다. 나는 과감히 이런 식의 촛불 집회를 포기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더 이상 집회를 나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봉기에 있어 유일한 직접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중집회의 안팎에서 현재의 봉기 형식, 주체성, 내용 모두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청와대로 가는 거보다는 이미 우리가 2달 동안 점유한 거리 그곳에 대한 지배를 기정사실화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낙서, 목소리들이 설치 미술이 되고 있는 그곳. 밤마다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기정사실화 하는 것. 아예 그곳에서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듣는 것이 당연한곳으로 .. 원봉(주: 원천봉쇄)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난장을 벌이고 지구에 대해 삶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거다. 언제나 이 썩은 사회를 향해 시위하는 곳으로 그곳의 의미를 점유하고 공간을 점유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이미 그런데 그걸 더 의미화 하는 작업이 필요할거 같다. 승리했네 승리할 꺼네 이런 소리보다는 말이야.(진보넷 블로거 달군, <거리점유>, http://blog.jinbo.net/dalgun/?pid=1249)

이러한 형식 속에서 아직 표현되지 않는, 혹은 이미 배제되어버린 다양한 소수적 외침들을 외쳐야 할 때이다. 집회 초기부터 열심히 결합하고 있는 한 성소수자 활동가는 “촛불집회 사회자가 ‘촛불 소녀 오셨습니까?’, ‘노동자 여러분 오셨습니까?’, ‘유모차부대 오셨습니까?’라고 참가자들을 호명할 때 ‘성소수자 오셨습니까?’라고 외치는 걸 상상하곤 해요.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찜찜한 기대를 동시에 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찜찜한 기대”란 이미 그 장이 “국민”의 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하나로 호명되는 것도 찜찜한 것일 테고, 또 그 ‘국민’들이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찜찜함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목소리들이 말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공간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금 이 촛불의 공간이 “모든 이들이 모든 능력을 표현하며, 모든 요구를 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촛불’은 저녁의 촛불집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터가, 학교가, 또 그밖에 다종다양한 우리의 삶터 모두가 촛불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저녁의 촛불집회를 이러한 소수 정치의 공간으로 재전유해야 한다. 솔직히 정말 죄송한 마음으로 고백하건대 나는 방송차를 경찰이 탈취했을 때 한편으로 환호하기도 했었다. 촛불집회는 다시 지도부 없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경찰의 방송차 탈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힘의 분출로서 그리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승리 - 즉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혁적 주체성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 - 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권침해와 입시지옥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외침이, 노동과 삶의 불안정화에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이, 주거권을 요구하는 빈민과 노숙인들의 외침이, 장애를 가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장애인들의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그들의 삶터와 촛불집회의 현장 모두에서 외쳐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승리들을 만들고, 또 그 승리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통의 세계를 창조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참일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무슨 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
-교육감 선거에 대처하는 소수 정치를 위하여


이 글에서 이러한 소수 정치의 직접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곧 열리게 될 7.30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앞에 두고 한 가지만 제안을 해 보고 싶다.(혹은 하나의 낮 꿈을 꾸고 싶다.) 이 싸움에서도 두 가지 기획 - 국민화 기획과 전위적 기획 - 은 충돌하고 있다. 국민화 기획은 이미 밑그림이 그려졌지만(시민사회진영의 단일후보 지지운동) 전위적 기획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선거에 대응하는 국민화 기획 속에서는 정작 교육감 선거로 인해 가장 크게 삶을 좌우당할 ‘청소년’이 배제당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청소년들은 그간의 촛불집회에서도 체계적인 배제를 경험해야 했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 “청소년은 10시가 되면 자율귀가 합니다.”라는 촛불집회 사회자의 망언(이게 망언이 아니면 무엇인가!)은 이들이 최초의 봉기자가 되어 마련한 공간을 이들에게서 박탈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청소년들은 투표권도 없는 교육감 선거를 통해 이들의 삶의 문제,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낮꿈을 꾼다. 청소년들과 “청소년-되기”를 하는 많은 이들이 이 선거를 “우리의 삶을 어른들에게 맡길 수 없다. 투표권을 달라!”고 외치는 또 다른 봉기의 장으로 삼기를. 물론 ‘투표권 요구’는 현실가능하지도 않고, 또 투표권 자체가 운동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투표권은 사실 자신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삶정치의 한 표현일 뿐이다. 우리는 몇 년 전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왔던 청소년들에게 소위 “교육운동”을 한다는 전교조 등의 운동가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수능 대신 내신을 강화하자는 그들의 운동은 청소년들에게는 또 하나의 지옥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의 청소년들에게 “너희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랬던 이들이 이제는 또 자기들의 대표를 세워 교육문제를 해결하자고 하고 있다.

교육감 선거는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봉기를 꿈꾸며, 그들의 봉기에 결합하고 싶다. 이 운동을 7월의 “투쟁과제”의 하나로 제출하는 바이다.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우리의 새로운 삶을 함께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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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 선거 , 촛불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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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니

    정말 딱, 너무도 전형적인, 너무나도 노골적인 자율주의...
    용어선택부터 좀 덜 주관적이었음 좋겠어요.
    촛불봉기도 없었고 5월2일 청소년들의 봉기도 없었습니다. 그걸 봉기로 보는 것, 혹은 그렇게 수사하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다.

  • 김강기명

    애니님은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왜 위험하다고 보시는지도요.^^

  • 박정호

    매우 탁월한 평가이고 제안입니다.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자기 해방정치를 목표로 한다면 스스로가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교육의 주체(학생)가 배제된 교육감 선거 문제 심각하지요. 이것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이들이 무슨죄냐! 우리가 지켜주자!'의 속편입니다. 그럼에도 정치조직원인 나는 여전히 지도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고 목표와 현실의 일치를 실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노동자계급과 촛불의 결합을 성사시키지 못한 책임을 절감하지만 이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7월 5일에 등장한 '자본가 없는 세상 진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 애니

    님 글에 전에도 한번 댓글을 단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반론을 정중히 하시더니 이번에도 정중하시군요. 원래 점잖으신 분이시군요? 하여튼 퉁명스럽게 첫 댓글을 툭 달아놓은 제가 좀 무안해집니다. ^^
    제 첫 댓글의 취지만 간략히 말씀드릴게요.
    "봉기"란 그것이 국가권력을 탈취하든 헤게모니를 장악하든, 그 무엇을 뜻하건 간에, 감탄의 수식어로 씌이는 게 아니라면, 즉 객관적인 평가의 용어로 씌인다면 일단 운동이 도달하는 '최정점'을 뜻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게 봉기가 됩니다. 즉 봉기라는 말이 아무 것도 뜻하지 않게 되겠죠.)
    그래서, 지금의 촛불을 봉기로 단정한다면, 즉 운동의 최정점으로 단정한다면 그 다음의 내리막 국면들은 (고시철폐 등의 운동의 구체적인 요구들이 아무 것도 성취되지 않는 지금) 모두 큰 패배로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절정은 지나갔으니까요.
    그래서, 패배감을 잊기 위해서 무언가를 일부러 망각하거나 ("혁명") 멀쩡히 존재하는 현실을 두고 현실 밖의 삶을 꿈꾸거나 ("자본주의 바깥의 삶")아니면 대중을 '대리'해서 모험주의적 행동 (아나키즘적 "직접행동")으로 튕켜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제가 봉기라는 단어에 특히 민감해 하며 위험하다고 했던 첫 댓글의 취지였습니다.

  • 달군

    이글 너무 잘 안보이는데 있다요..안타깝.

  • su

    애니님// 저는 "봉기"가 최정점으로 느껴지진 않는데요. 이 글에선 왠지 시작점같은 느낌 아니면 그냥 운동 전체. 시작점이든 최정점이든 모두가 주관적인 인식이 아닌가요? 근데 저는 주관적인 인식/판단이 왜 안되는지, 왜 위험한지 잘 모르겠어요. 또 객관이라는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봉기든 최정점이든 그 이후의 내리막길에 대해선 동의합니다. 그래서 그런 최정점이 없었으면 좋겠고. 흐흐, 아주 서서히 또는 급격히, 어쨌든 끊임없이 운동/봉기/혁명 하고 싶어요.

  • 애니

    su님// 모든 판단이야 주관적이겠죠. 제 얘기도 뭐, 하나의 주관이구요. 다만 제 주관이 김강기명님의 것과 다른게 요점인데, 그런 의미에서 제 주관을 어줍잖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촛불시위의 '장기적' 성과는 분명 크지만 (이 점은 누구나 아는 것이니 따로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승리를 자축할만한 '단기적' 성과(예컨대 재협상)는 아직 없습니다. 더불어 7월 5일 이후 촛불시위는 스스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해야만하는 갈림길 국면에 와 있습니다. 기세가 누그러진 내리막 국면도 여기에 겹쳐있구요.
    그래서 지금 우리는 경계심과 위기의식을 느끼며 선택과 결정을 신중하게 해야합니다. 지나친 낙관(승리의 자축)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하게되면 '단기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패배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68년 국가 전체를 흔들었던 프랑스 '봉기'가 잘못된 며칠 간의 선택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는, 그래서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마무리하자는 선택)때문에 얼마나 순식간에 드골에게 완전히, 그리고 아주 잔인하게 진압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는 자신감 못지않게 위기의식과 경계심을 가질 고비에 서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김강기명님의 글 (아나키즘 정치에 기댄 글이라 생각합니다.)이 보여주는 낙관이 지나치며, 또한 이런 지나친 낙관은 사실 역설적이게도 지나친 패배감 때문 (김강기명님 스스로가 인용한 아나키스트들의 패배감)이 아니겠냐는 의구심을 느껴 댓글을 달았던 겁니다. 사람이 패배감을 지나치게 느끼면 냉소적이게 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승리가 아닌 것을 승리라 하고, 봉기가 아닌 것을 봉기라고 과장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참고로, 저는 지금 대규모 집회("대규모 방송차와 무대"를 갖춘)를 어떤 식으로든 계속 유지하기 위해 버텨야 한다는 선택이 옳다고 봅니다. 대책위 방송차가 경찰에게 탈취되는 끔찍한 비극도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고 보구요....

  • 김강기명

    애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헌데 저는 '봉기'를 '혁명'과 일정부분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저는 님이 '봉기'라고 말한 그 측면을 '혁명'이라는 최종점으로(허나 저는 이전의 혁명을 우리의 모델로 삼기를 거부합니다) 보고 있고, 봉기는 여하간 어떤 형태는 대중적 힘의 분출이라고 생각합니다. 봉기란 말 자체가 벌떼의 일어섬이란 뜻이잖아요?^^

    그리고 님의 고민이 자리한 그 자리가 바로 제 고민이 자리한 자립니다. 단기적 목표는 하나도 달성이 안 된 것 같은... 하지만 '혁명'이라는 최종 목표에 대한 상을 지운다면 사실 우리는 이룬게 분명히 있고, 그리고 우리가 이룬 것들로부터 어떻게 다음 단계(그것 역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로 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거에요.

    그런 점에서 그레이버가 운동의 목표를 단기-중기-최종 목표로 구분한게 유의미하고, 너무나 일찍 달성되어버린 중기적 과제의 승리를 우리가 분명히 힘으로 인식하고, 그 힘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저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자율주의에는 가깝긴 한데, 자율주의가 또 아나키스트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딱지 붙이는 식으로 제가 말 걸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제 이야기로 보고 비판을 해 주시면 더 생산적일 것 같습니다.

  • 애니

    김강기명님// 글 참 단정하게 잘 쓰십니다. 읽는 맛이 좋습니다. 필력이 딸리는 저로선 더이상 댓글을 달기가 좀 버거운데 어쨌든 입이 간질거려 몇 가지만 덧붙이자면,

    7월 5일 대책위가 국민승리를 선포하는 순간 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만 아니라 같이 나간 꽤 많은 친구들도 함께 당황했습니다. 전 이런 정서가 대중적 정서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님이 글을 쓰신 동기도 이런 당황스러움이 대중적으로 느껴졌기에 쓰신게 아닐까 합니다.) 제 말의 요점은 이런 대중적 정서는 그레이버(누군진 잘 모릅니다)의 글을 통해 안심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물질적, 객관적 근거가 있는, 명백히 존재하는 정서라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촛불을 일단계로 나누든 삼단계로 나누든, 혁명을 이야기하든 아니든, 그런 것과는 아무, 정말 아무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위기"가 우리 앞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님이 이 "위기"를 위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한다고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지나친 낙관, 혹은 지나친 패배감이 그런 대체의 원인이 아닐까하는 넘겨짚음과 함께) 그게 퉁명스런 첫 댓글을 달게 된 주된 동기입니다. 현실에 눈을 감는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덧붙여 아나키즘과 자율주의 딱지를 섞어 쓴 건 그 둘이 서로 꽤나 가까운 이념적 형제라고 판단하는 제 생각 때문인데, 그런 생각과는 별도로 '딱지'를 붙이는 논의방식이 저 역시 님 말씀 대로 생산적인 토론에 그닥 도움이 되진 못한다고 생각해요. (님이 정중하시니 저 역시 정중해야겠군요. 혹 좀 거슬리셨다면 '꾸벅'입니다.) 다만 핑계를 대자면 짧게 댓글 남길 때 제 생각을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표현하기에 딱지붙이기가 비교적 손쉬운 방식이기에 그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