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악의 뿌리 자본주의 체제 지적한 아인슈타인

[인권뉴스 편집부]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한국인권뉴스]   


마하트마 아인슈타인

                                                                          최형록 (인문학자)

1953년 6월 13일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 지는 “시민들이 X의 충고대로 …을 증언하기 보다는 차라리 감옥행을 택한다면 우리의 대의 제도는 마비될 것이다”라면서 X를 ‘극단주의자’라고 불렀으며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시민불복종 세력’은 ‘불법’일 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집단이라고 공격하면서 X를 ‘몹시 현명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은자(hermit)의 나라’에서 미군이 노근리 학살을 자행하고 남북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지옥 같은 전쟁’이 서서히 황혼녘에 접어들 때였습니다.

당시 상원의원 매카시는 X에게 ‘미국의 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그 X란 다른 누구도 아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바로 그 이, 자연과학계의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증언이란 상원이나 하원에서 자신이 ‘반미국적’이 아닌 ‘반공’에 투철함을 고백하는 ‘사상검증’을 가리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광기’에 복종하지 말기를 촉구한 죄 값으로 남한의 조선·중앙·동아와 같은 유력지로부터 ‘개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물질세계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건전한 ‘무혈혁명’을 일으킨 방정식 E=mc2의 제시자를 ‘몹시 어리석다’고 중상 모략했던 것입니다.

‘춘향가’에서 이몽룡이 빠진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할만한 이 걸작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천재 과학자로서만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경탄한다면 그의 인격 전체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차례에 걸쳐 “나의 삶은 방정식과 정치로 양분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각하건대 아인슈타인을 진정으로 선량한 인도의 민중이 간디에게 수여한 인격의 왕관, ‘마하트마’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단순히 천재일 뿐만 아니라 ‘사상의 자유’에 책임 있는 행동으로 용기라는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바로 자유 중의 자유를 ‘생물’로 확인시키고 보존시켰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활동하는 공간, 역사적 시공간을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1949년 5월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적 『Monthly Review』창간호에 실림)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각종 첨단기술의 성과를 누리면서도 ‘믿을 놈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남한의 현실과 관련해서 몇 가지만 간략히 성찰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악의 진정한 뿌리가 ‘경제적 무정부상태’,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도대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있는데 무정부 상태라니? 아인슈타인이 미국에서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체험하고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표현은 자본주의 체제가 경기변동 특히 ‘공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자본 몇몇이 일종의 과두지배 체제를 이루고 상호 경쟁하면서 대량으로 실업자들을 낳으면서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저항에 대해서는 일치단결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 심 봉사와 뺑덕어멈과 같은 관계에 있음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국회의원 선거가 정당정치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정당의 재정은 대체로 사적 자본에 의존해있다고 지적하면서 국민의 대표자들이 국민 가운데 운이 좋지 않은 혹은 재산이 별로 넉넉지 않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대표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론’의 형성과 관련해서 대중의 정보원인 언론·출판·학교를 사적 자본이 통제하고 있는 사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보통신 혁명’의 시대에 이것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명명백백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사회악의 유일한 제거방도로서 사회주의 경제의 확립 그리고 소유를 성공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표를 지향하는 교육제도의 수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나 다수 민중의 진정한 민주주의 그 자체인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것의 전면 부정이듯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자유’란 사실상 다수 민중의 인간적 존엄성 그 자체인 ‘자유’의 전면 부정입니다.

노무현 정권도 노동자들과 농민·도시빈민의 파업에 대해서 ‘법과 질서’를 ‘조건반사적’으로 내뱉고 있습니다. 파업으로 인한 손실이 수백억 원, 수조 원에 이른다면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요? 지배계급은 그런 방식이 ‘정치적 지배’의 ‘합리적 계산’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 손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에 희로애락의 감정과 이성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백치 아다다로부터 백치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법’에 생명을, 그 생명이 독사와 같은 생명이든 해바라기처럼 살가운, 장차 ‘마하트마’의 기대를 실현시킬 아기와 같은 생명이든,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회적 관계’이고 어떤 성격의 생명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앎을 전제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며 이런 행동의 성패를 겪으면서 앎이 숙성해가는 ‘행동하는 앎’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남한사회의 위기가 노조의 파업을 비롯한 사회 모든 부문의 시위 그리고 분배의 요구 때문일까요?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파시스트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입니다. 영어 학습 광풍과 인터넷상에서의 한글파괴, 가정 내 부모-자식 간의 대화 단절, 공중도덕을 비롯한 윤리 의식의 전반적 붕괴 등을 해결하는 묘안이 ‘경쟁’을 부추기는 것일까요?

초등학생에게 ‘자본주의 경제’를 교육시키는 것이 지름길일까요? 오늘날 파시스트 경제 5단체와 부패한 교장·교감·교육감들이 생각하는 것은 살아 있는 로봇 같은 ‘기업형 인간’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 같은 교육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성찰을 깊이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이유는 바로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최형록의 과학에세이] 34호 (2003년 8,9월)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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