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세계에서 꿈나무를] 왜 사회주의인가? - 아인슈타인

[한국인권뉴스 편집부]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다음은 이 책에 실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왜 사회주의인가?"(번역: 정해운)이다. [한국인권뉴스]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면 보통 천재 자연과학자라고만 알고 있다. 과연 그는 연구실에서 자연에 대한 고도의 추상적 생각만 한 사람이었을까? 아래 글은 1949년 5월 미국의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잡지 [Monthly Review] 창간호에 실렸던 아인슈타인의 글이다. 이 글은 43년이 지난 92년 같은 잡지의 44-1호에 다시 실렸다.
‘현존 사회주의의’가 붕괴 해체된 이 시점에서 왜 이 글을 다시 실은 것일까? 두 가지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일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놀랍게도 ‘현존 사회주의’ 실패의 주된 요인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가 생산영역과 정치영역에서 구현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하는 뜻이 아닐까? 이 글은 이런 점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극소전자공학혁명’의 시대에 점점 더 사회적 역할이 중요해지는 자연과학 기술자들이 어떠한 사회의식,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는지 고민하는데 하나의 자극제가 될 것이다. (옮긴이)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경제-사회적 쟁점들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 견해를 밝히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과학적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천문학과 경제학 사이에는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이점들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양 분야의 과학자들은 일정한 한계 내에 있는 현상들 사이의 관련성들을 가능한 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런 현상들에 대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방법론에 차이점들이 있다. 경제학 분야에서 일반법칙의 발견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관련된 경제현상들이 종종 따로따로 파악하기에는 퍽 어려운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에 더해서 이른바 인류역사의 문명시대가 시작된 이래 축적되어온 경험들은 대체로 본질적으로 오직 경제적인 것만은 결코 아닌, 여러 가지 원인의 영향과 제약을 받아왔다. 이를테면 역사상 대부분의 강대국들은 정복을 통해서 건설되었다. 정복자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복당한 나라의 특권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토지 소유권을 독점하였고 그들 가운데서 성직자를 임명했다. 성직자는 교육을 통제하여 사회의 계급적 분열을 하나의 제도로서 영구화했고 가치체계를 창조하여 일반사람들이 사회적 행동을 할 때 상당한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그것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에 속한다.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이제껏 소스타인 베블런([유한계급론]을 쓴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자-옮긴이)이 인간발전의 ‘포식적(捕食的)단계’라고 불렀던 단계를 진정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 현상은 바로 그 단계에 속하며 그런 경제적 사실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법칙들조차 다른 단계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정확히 말해서 인간발전의 포식적 단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조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둘째,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표를 지향한다. 하지만 과학은 목표를 창조할 수 없고 더욱이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회-윤리적 목표를 주입할 수 없다. 기껏해야 과학은 일정한 목표를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을 뿐 이다. 그러나 그러한 목표 그 자체는 숭고한 윤리적 이상들을 품은 구체적인 사람들의 몫이며-이런 목표가 유산되지 아니하고 생명력 있고 정기가 있는 것이라면-그것은 절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의 완만한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채택 되어 실행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 관련된 문제에 부딪힐 때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를 조직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 대해서 전문가들만 견해를 밝힐 권리가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사회는 위기를 겪고 있으며, 사회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박살났다고 줄곧 주장해오고 있다. 개개인이 크건 작건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적대적이기 조차 한 것은 그런 상황의 특징이다. 개인적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설명하고자 한다. 최근 나는 유식하고 성품이 좋은 사람과 함께 또 한 차례의 큰 전쟁의 위협을 논의한 적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전쟁은 인류의 생존에 심각한 위험을 불러올 것이며 오로지 국민국가를 뛰어 넘는 조직만이 그러한 위험을 피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즉각 그 방문객은 매우 침착하면서도 냉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왜 당신은 인류의 소멸에 대해서 그토록 깊이 반대하십니까?“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이런 류(類)의 말을 그토록 쉽게 말할 수 없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이룩하고자 줄곧 애써 왔으나 헛일 이었고 따라서 평정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 이다. 그 말은 오늘날 매우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탈출구는 있는 것일까?

그런 문제를 제기하기란 쉽지만, 정도야 어떻든 확신을 가지고 답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비록 우리의 느낌과 노력이 종종 모순되고 불분명하며 그 점을 쉽고 단순한 공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대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은 그 자신과 그와 가까운 사람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바램을 충족시키며 타고난 능력들을 개발하고자 애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친구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친구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슬픔에 처한 친구들을 위로하며, 그들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오직 이러한 다양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노력이 인간의 특성을 설명해주며, 그러한 노력이 특정한 형식으로 모여 한 개인이 정신적 평정을 이룩하고 사회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정도를 결정짓는다. 이러한 두 가지 충동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결국 구체적인 사람 됨됨이는 대체로 성장기의 환경, 그가 성장하고 있는 사회의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한  행동유형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의해서 형성된다.

“사회”라는 추상적 개념이 개개인에게 뜻하는 바는 그 개인과 동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지난 세대의 모든 사람들과 가지는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관계들의 총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많은 것을-육체적, 지적, 그리고 감정적 존재에 있어서- 사회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사회의 틀을 벗어나서 개인을 생각하거나 개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음식, 의복, 집, 노동의 도구, 언어, 사고방식 그리고 생각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사회” 이다. 개인의 삶은 “사회”라는 작은 낱말 뒤에 숨겨져 있는, 과거와 현재의 수백 수천만 사람들의 노동과 노동의 성취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의존은-개미와 꿀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폐지될 수 없는 자연적 사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개미와 꿀벌의 삶의 과정은 그 가장 작은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고 유전적인 본능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는 반면, 인간의 사회적 유형들과 상호관계들은 변화에 퍽 민감하며 다양하다.

기억력, 새로운 조합(Combinations)을 만들 수 있는 능력,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 능력 덕분에 인간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의해서 명령될 수는 없는 여러 가지 발전을 이제까지 이룩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은 여러 가지 전통, 제도와 조직, 문학과 과학기술적 성취들 그리고 예술작품들 속에 나타난다. 이러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의식적인 사고와 바램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유전을 통해서 생물학적 성격을 획득하는데 그것은 인류에게 특징적인 자연적 충동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고정되어 있어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에 더하여 인간은 살아가면서 문화적 성격을 획득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의사소통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많은 유형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사회로부터 채택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될 수 있고, 상당한 정도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이 바로 이 문화적 성격이다.

현대 인류학은 이른바 원시문화들을 비교 조사하여 인간의 사회적 행위는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유형과 조직유형에 따라서 크게 다룰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인간의 문명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희망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생물학적 성격 때문에 서로를 절멸시키거나 스스로 초래한 잔인한 운명에 내맡겨져 있지는 않다.

인간의 삶을 가능한 한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회구조와 인간의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우리 스스로 자문한다면,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는 일정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인간의 생물학적 성격은 온갖 실제 목적을 위해서 변화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난 몇 백 년 동안 기술이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함으로써 오늘날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조성되어 왔다. 생존의 지속에 없어서는 안 될 재화를 소비하며 상대적으로 밀집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인 노동의 분업 그리고 고도로 중앙 집중화 된 생산기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개개인 혹은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들이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대는- 퍽 목가적으로 보이는-영원히 가버렸다. 약간만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인류는 생산과 소비의 전 지구적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이루는 것에 대해서 짤막하게 지적해 보아도 좋을 지점에 이르렀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예전에 비해서 사회에 대한 의존성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은 이러한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으로서, 유기적인 유대로서, 보호해주는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자연적인 권리들에 대한 위협으로서 혹은 심지어 그의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서 경험한다.

더욱이 사회 안에서 개인이 처한 상황은 그의 성격 중에서이기주의적 충동이 끊임없이 강해져 가고 있는 반면에 본래 약한 사회적 충동은 갈수록 악화 일로에 있다. 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이든 모든 인간은 이러한 악화의 과정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다. 은연중에 개개인은 이기주의의 포로들로서 불안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천진난만하고 단순하게 삶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비록 삶이 짧고 위험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사회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존재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이다. 우리는 눈앞에서 거대한 제조업체들이 끊임없이 상호간에 집단적 노동의 과실들을-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립된 법적 규제를 충실히 따름으로써-빼앗느라고 분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생산수단은-부가적 자본재뿐만 아니라 소비재 역시 생산하는데 필요한 생산력 전체- 법적으로 개개인의 사유재산일 수 있거나, 실제로 대부분이 사유재산이다.

쉽게 말해서 아래의 논의에서는-비록 일반적인 그 용어의 쓰임새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몫으로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 모두를 “노동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이용해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재산이 되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실제 가치라는 점에서 측정되는 두 가지, 즉 노동자가 생산해 내는 것 그리고 노동자가 받는 것 사이의 관계이다.

노동계약이 “자유로운”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그가 생산해 내는 상품의 실제 가치가 아니라 그에게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 그리고 일자리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노동자들의 수와 자본가들의 노동력 수요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심지어 이론상으로도 노동자의 임금은 그의 생산물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음을 이해하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인 자본은 소수의 손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이며 둘째, 기술의 발전과 점증하는 노동 분업이 소규모 생산단위를 희생시키면서 대규모 생산단위의 형성을 고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들의 결과가 사적 자본의 과두정(寡頭政) 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민주정치가 조직된 사회에서조차 그 과두정의 엄청난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 할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인 까닭은 의회의원들을 선택하는 정당이 대체로 사적인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 즉 그 사적인 자본가들이 입법부로부터 선거인단을 분리시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민중의 대표자들이 유권자 가운데 기본적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사실상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 더욱이 현재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정보의 주된 원천들(출판, 라디오, 교육)을 통제한다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 까닭에 일개 시민이 객관적인 결론을 내려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행사하기란 지극히 어렵거나 실로 대부분의 경우에 거의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경제에 있어서 두드러진 상황은 두 가지 주된 원칙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첫째, 생산수단(자본)이 사적으로 소유되어 그 소유자들이 적합하다고 보는 대로 생산수단을 처분한다. 둘째, 노동계약은 자유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러한 뜻에서의 순수 자본주의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이 길고 긴 어려운 정치투쟁을 수행함으로써 노동자들 가운데 어떤 범주의 노동자들은 “자유로운 노동계약”이라는 다소 개선된 형식을 획득하는데 성공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오늘날의 경제는 “순수”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효용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일을 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어떠한 법률규정도 없다. 따라서 “실업자 군단”이 거의 항상 존재한다. 노동자는 끊임없이 일자리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휩싸여 있다. 실업 노동자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은 수지맞는 시장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며 그런 결과 크나큰 어려움이 뒤따른다.

기술의 진보가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 보다는 더욱 많은 실업을 낳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 접속된  이윤동기야말로 자본의 축적과 이용에 있어서 불안정을 초래하며 그 불안정은 격화되어 결국 대 공황으로 귀결된다. 무제한적인 경쟁은 엄청난 노동력의 낭비를 초래하며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개개인의 사회적 의식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

생각하건데 이렇듯 개개인이 불구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악이다. 우리의 교육체제 전체는 이러한 악으로부터 고통 받는다. 과장된 경쟁적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되며, 학생들은 장래의 경력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소유 지향적(acquisitive) 성공을 숭배하도록 길들여진다.

확신컨대 이러한 심각한 사회악들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고, 아울러 사회적 목표들을 지향하는 교육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은 사회 그 자체에 의해서 소유되며 계획적으로 이용된다. 계획경제는 공동체의 여러 가지 필요에 맞춰 생산하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나누어 주어 모든 남녀노소의 생계를 보장해 줄 것이다. 개개인에 대한 교육은 타고난 능력을 장려함과 아울러 권력과 성공의 영예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와 같은 타인들에 대한 책임감을 기르는 데 애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경제가 곧 사회주의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계획경제 그 자체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사회주의의 성취에는 아주 어려운, 몇 가지 사회-정치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광범위한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보면서 어떻게 관료제도가 전능해지며 거만해지는 사태를 예방하는 일이 가능할까? 개인의 권리가 어떻게 보호될 수 있으며 그것과 함께 관료제도의 힘에 대한 민주적 견제력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여러 가지 목표와 여러 가지 문제를 분명히 하는 일은 현재와 같은 이행의 시대에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현재와 같은 조건 아래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논의하는 것이 금기시(禁忌視)되어 왔던 까닭에 나는 이 잡지([Monthly Review]를 가리킴-옮긴이)의 창간이 하나의 중요한 공공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1992년 7월 21일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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