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역사적 상상력의 해방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역사적 상상력의 해방

                                                                          최형록 (인문학자)

“야! 천국이구나!” 14년 전 4월 말 헤이그에서 머리 속에 이성의 검열 없이 떠오른 문장입니다.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에서 내려 공원 속 도시 헤이그 행 열차 차창 너머 보이는, 잡스럽지 않은 원색 융단처럼 펼쳐지는 튤립공동체! 그리고 풍차. 산지가 국토의 3/4인 갑갑한 공간으로부터 거칠 것 없는 평원에 들어간 사실만으로 ‘해방감’이 용솟음친 것일까요?

민족분단 그리고 ‘총성 없는 전쟁의 낮과 밤’이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긴장의 나날을 살아왔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왕립 사회연구소(ISS: Institute of Social Studies)에서 ‘발전, 법, 그리고 인권’에 관한 특별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제3세계 사회운동 관련자들과 토론하는 그 시각에, 대학생들이 백골단에 맞아죽고 성춘향 같은 젊은이들이 삶의 사계를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을사늑약,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기적’ 같은 4대 발견이 이뤄진 지 100주년,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한국전쟁 발발 55주년, 그리고 해방 60주년인 해가 바로 금년입니다. 60년 전 한반도 민중의 꿈을 ‘자주적 민주국가의 건설’이라고 규정하는 데 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중의 삶의 내용과 그 조건은 얼마나 그 “꿈을 꿈 아닌 것”으로 만들었을까요?

“김정일이 내려와서 6개월간 싹 정리하고 올라가 버리면 좋겠다.” 사람들끼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김정일이 아니라 대리운전자들이야”라고 택시기사들이 얘기하는 것도 봅니다.

무엇보다 남한 민중의 현실인식에 있어서 파시스트적 반공냉전의 언어도단이 ‘사상의 역사박물관’에 안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런 반면 반공은 다른 몰골로 강시처럼 떠돌아다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표현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능지처참해야 할 ‘신자유주의’라는 것과의 대결에 있어서 ‘자주성’과 ‘역사적 상상력’을 생각합니다.

왜 남한의 고질, 부정부패 그리고 삶의 모든 면에서 부단히 표출되는 반 생명성과 거짓을 남한 내부의 ‘자생적 정화능력’으로 쓸어버릴 생각을 못하고 외적인 힘에 의존하려는 것일까요? 최근 국적 포기자들 중 41.1%가 학계인사이고, 40.6%가 상사원이며, 40%가 강남-분당 거주민이고 전직 국방장관과 외무부장관의 손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역기피라는 점에서 분노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 대한민국이 살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자주성’이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한정해서 발휘해야 할 인간적 자질일까요? 내가 살고 있는 사회 내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주적인 관계’가 바로 ‘민주성’의 생명이 아닐까요?

“내가 보기에 가까운 미래에 위기가 들이닥칠 것 같은데 그것은 나의 용기를 잃게 만들고 있으며 국가안보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 기업들은 이제 왕좌에 앉게 되었으며 고위직의 부패가 판치는 시대가 뒤따를 것이다. 돈의 권력은 민중의 편견에 영향력을 미쳐서 소수자가 모든 부를 수중에 움켜쥐며 공화국이 파괴되도록 분투할 것이다.”

이 글은 대통령 노무현이 존경하며, 전두환 파쇼체제에서 문화 관련 장관을 지낸 놈과 같은 장소에서 미국만세를 외치는, ‘이게 뭡니까’ 교수 김동길이 쓴 전기의 주인공 링컨 대통령이 1864년 11월 21일에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오늘날 남한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존심’을(이 덕목을 내 마음대로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머저리들이 한편으로 얼마나 많습니까!) 접고 노예적으로 살아가고 있고, 나아가서는 그런 ‘비참한 처지’에 분노하여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사태야말로 바로 ‘자본가 계급’에 대한 ‘자주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남한 민중이 머저리가 아니라면 링컨이 국가안보를 돈의 권력, 기업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일보」의 정치부장이라는 자가 쓴 칼럼 ‘삼성의 나라’에 따르면 삼성은 매출액이 국가 총생산의 17%, 국가 수출액의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돈의 힘’으로 삼성 토탈에 대한 공정위의 조사를 방해하며 향후 변호사 300명으로 법률단도 구성할 경우 그것은 아시아 최대인 법률회사보다 규모가 더 큰 것이 되리라고 합니다. 비단 삼성만이 아닌데 이런 사태에 ‘민주적’ 제동장치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법치(法痴)’는 그나마 불완전한 ‘법치(法治)’에도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변호사 출신인 링컨의 통찰력은 지극히 오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임원은 연봉이 9,000만 원의 약 100배에 이르는 반면에,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남한 국민 10명 중 1명이 빈곤층(4인 가족 기준 월 소득이 113만 6,000원 이하)이라고 합니다. 소득의 양극화가 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득 상위 10%의 월수입이 하위 10%에 비해서 18배에 이르는 현실이 오늘날 ‘민주공화국’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부패방지법’ 개정안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요. 남한 경영자들 다수가 부패한 놈들이라는 것은 지극히 낯익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윤리경영’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박용성이 우리 시대의 영웅은 보아, 배용준 등 주로 연예인과 체육인인데 또 다른 영웅 기업경영자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라고 ‘청소년을 위한 시장경제 강좌’에서 강의한 것이나, “개방시대에 애국심이란 없다. 힘센 자는 계속 잘 나가고 힘 약한 자는 죽게 될 뿐이다”라고 하는 한국은행 총재 박승의 이야기는 ‘자존심’ 있는 민중에게는 ‘쓰레기 담론’일 뿐입니다.

‘자주적 사고’에 필수적인 것은 ‘역사적 상상력’입니다. 책상물림이건 반민중적 입장을 지닌 놈이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허무맹랑한 잡소리를 합니다. 역사에 ‘가정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런 역사는 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말하는 당달봉사의 역사이며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고 투덜거리는 용기 없는 역사입니다. 이런 역사와 역사관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역사책의 역사는 단원 김홍도의 ‘서당도’가 단 하나인 것처럼 세월이 흘러도 단 하나일 것입니다.

‘역사적 상상력’이란 삼성을 공유기업으로 ‘구조재조정’ 해버린다면 민중의 삶이 어떻게 질적으로 달라질 것인지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남한 민중의 역사적 상상력에 무자비하게 총질과 대포질을 해대고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버리는 끔찍한 실험을 했다면, 오늘날 그 ‘악역’을 ‘신자유주의’라는 사상이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의열단 단원이기도 했던 이육사의 꿈. 해방 60년. 우리 남한과 북한의 민중은 인간미가 청포도처럼 영글고 상상력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전설이 울타리를 휘돌아 마을 뒤 정상을 감싸 주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할 인간적 책임을 스스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용기 있는 행동에는 ‘자주성과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며, 이런 덕성들은 ‘사상의 자유’라는 원천으로 통합니다. 헤이그에서 호흡했던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가 「신학―정치학 논고」에서 이렇게 주장한 말이 새롭습니다.

“국가의 평화는 오직 ‘사상의 자유’를 토대로 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


[최형록의 과학에세이] 45호(2005-7/8월)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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