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주인의 판단을 그대로 답습하는가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

[도전적 예수읽기] 악하고 게으른 종아 - 전영철 (새기운)

[프롤로그]

2천년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익숙한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경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신실한 사람으로서는 문자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한다고 하는 복음서의 글이라 해도, 복음서가 쓰인 시점이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 4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잘 알려진 대로 복음서는 현대처럼 녹음기가 있어서 현장에서 녹취한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구전을 통해 전해져 온 것이다.

따라서 상황이 달라진 그 당시의 복음서기자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해석을 통해서 나온 글임을 생각한다면, 같은 예수의 말을 전하면서도 복음서기자마다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것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기자가 바로 실제 예수가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복음서기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예수는 너무도 그 생각이나 행동이 달랐던 예사롭지 않은 분이었다. 복음서기자들이 예수의 뜻을 전한다면서 오히려 예수를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즉, 복음서기자들은 예수를 기록함과 동시에 본의 아니게 왜곡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 바로읽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식이요 의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을 주로 해내는 것은 전문 신학자들의 소관이며 그동안에도 이들은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결코 전문 신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닌 듯싶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이란 예수처럼 실제 삶속에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혁명전선의 최전방에 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책상위에서 그 이치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론 이상으로 실천적인 현실참여가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일에 있어서는 긴요한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가난한 민중으로 살았던 예수를 이해하는 일은 이 방면에 대한 전문적인 학자보다는 그 사회의 열악한 조건 아래 일상을 사는 소박한 민중들이 오히려 그 핵심을 짚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점도 중요한 단초가 된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능력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회중에게  말씀을 전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평소 성경과 씨름하다가 터득하게 된 생각의 조각들을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공개함으로써 뜻있는 분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1. 악하고 게으른 종아
-도전적 비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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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악하고 게으른 종아 (달란트의 비유)
성경: 마25:14-30 (눅19:11-27)
     참조: 도마복음41:1-2; 막4:25
핵심: 반전, 비유 새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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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13:12)

현대인으로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를 대하는 사람이라면(특히 무식한 사람일수록) 이 말이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을 뜻함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신학자들은 거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같은 구절이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복음서기자들에 의해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마태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또 하늘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마13:14)

마태는 이 비유가 ‘하늘나라’를 비유한 이야기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 뒤에 나오는 ‘어떤 사람’이란 ‘예수’를 나타낸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어떤 사람’이 말하고 행한 일이 모두 당연히 옳은 일이라는 선입관념을 갖고 읽게 된다.

그 결과,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아 돈을 번 사람들(주인의 종들)을 향하여 주인이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는 신임과 칭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두고두고 교회 내에서 성실한 청지기들의 귀감으로 삼는 전통을 만들어 냈다.

그런가 하면, 더 이익을 남기지 않고 원금만을 돌려준 종에 대하여는 가차 없는 형벌이 가해진다.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고 말하고 이어서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러한 현상은 현대 자본주의 기업이 이윤의 논리에 따라 노동자들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그리고 정리해고로 간단히 퇴출시키는 참담한 현실과 많이 닮았다.

이 대목에 이르면 당연히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이 어떻게 하늘나라의 비유가 될 수 있는가.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최고이며, 돈놀이를 해서라도 재산을 증식해야 한다는 주인을 어떻게 예수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아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어두운 곳으로 추방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는가.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눅19:26-27)는 극악한 횡포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주인’은 다시 오실 심판자로서의 예수가 아니다.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데 힘쓴 사람들은 ‘착하고 신실’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규탄하는 주인은 바로 악덕 자본가의 표본이다.

예수가 이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은 자신의 재산밖에 모르는 자본주(資本主)의 뜻을 받드는 일은 착한 일도 신실한 일도 아니요, 그의 탐욕을 한껏 채우는 일이라는 것, 더군다나 가난한 사람을 추방하고 죽이는 일은 하늘나라를 파괴하는 극악한 일이라는 것을 예수는 비통한 마음으로 폭로하며 그 체제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막4:25)라는 말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막21-23)는 말 뒤에 배열했다.

그리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은, 세상의 지배자들이 숨겨 둔 것은 드러내고, 감추어 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속 깊은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예수의 이야기를 새겨들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종교적 도덕적인 이야기로 오인하지 말고, 체제에 도전하고 있는 예수의 참뜻을 헤아려 달라는 예수의 육성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지난 2천년 동안, 어찌하여 이런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악덕 자본주, 노예의 주인을 예수로 혼동하고 부화뇌동하여 고작 ‘착하고 신실한 종’밖에 모르며, 그 발아래 유린되고 추방 처형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한 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주인의 판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가.

만일,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이 글에서 타당성을 인정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배운 기존의 가르침, 성경관이나 신조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2천년동안 누려온 권위적인 해석에 결코 방심하거나 막연하게 추종해서 안 되는 것은 성경 속에 예수의 귀한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지난 2천년의 험난한 세월을 군사·정치·경제·종교의 억압과 박해를 견뎌내는 가운데 자의반 타의반으로 왜곡되었던 성경의 진실을 복원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다.

예수는 그 옛날에 이미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체제의 횡포를 꿰뚫어 보면서 이를 경계하며 맞설 것을 촉구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서 곳곳에서 짧은 비유를 통해서 경종을 울리고 있는 예수의 저항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서 우리는 비로소 역사 속의 정의로운 예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소개] 전 영 철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새기운) 대표, 우석대학 명예교수(영문학), 마음사랑교회 목사.
전영철은 2011년 5월,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기독교의 시발점이 된 1차 니케아공의회(325년)를 현지 답사차, 공의회가 열렸던 오늘날의 터어키 이즈닉(Iznik)을 방문했다. 전영철은 니케아공의회에서 비롯된 종교적·정치적 야합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종교간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적인 기독교인·무슬림·유대교인들과의 진솔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2011년 11월에는 메카 순례(Hajji)에도 참가하는 등 국내외 무슬림과도 직접 대화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불교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인 인드라망 정신을 변혁적인 원형의 예수정신과 연계하여, 가난한 이웃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주체로 성찰하고 네트워크화 할 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된 종교운동의 하나됨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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