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이 세월도 헛되이 : 테크노 세대, 독서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이 세월도 헛되이 : 테크노 세대, 독서


최형록 (인문학자)


이동휘 선생님을 따라 하바로프스크로 가신, 서당훈장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맞으셨을 북풍이 나에게도 지조를 잃지 않고 안겨옵니다. 동명성왕 주몽이 금와왕에 쫓겨 자라 떼가 만든 다리로 엄체수(압록강 동북쪽)를 건너실 때처럼 두 분은 독립국가 건설의 꿈을 다리삼아 가셨겠지요.

북풍이 손질해주는 산을 오릅니다. 백도(白桃) 빛 근육질 땅을 밟으며 오릅니다. 겨울산은 절제된 명석함 그 자체입니다. 유명한 이영애가 ‘자이’의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친절하다고 하는 텔레비전 광고의 흐드러짐은 장애인들의 둥지를 유태인의 게토처럼 만들어버리는 징그러운 성깔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삼성이 세계 최초로 경이로운 용량의 플래시 메모리 칩을 개발했다는 흐드러짐은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생매장하고 그 가족을 몰살시켜버리겠다는 경악스런 언행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삶이 보이는 창>>,2005-7/8월호, 96~101면)


…/ 낙원이라는 카페가 있다/ 춤추는 연놈이나 술 마시는 것들은/ 모두 다 피 흐르는 비수를 손아귀에 쥐고 뛰는 것이다/ …/ 예전부터 싸움으로 먹고사는 무지한 놈들이 있다/ 내 나라의 심장 속/ 내 나라의 수채물 구멍/ … / 이 지금 내 나라의 커다란 부정을 못 견디게 느끼나/ …/ 이 세상에 나 처음으로 쥐어보는 내 나라의 깃발에/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춤추던/ 그리고 밝고 굳세인 새날을 맹서하던 사람들이 아니냐/ …/ 아, 그리고 이 세월도 속절없이 물러서느냐.

27세에 해방을 맞이한 오장환이 남한에서 일제와 운명을 같이 한 인간쓰레기들 그리고 미 제국주의에서 부귀영화를 찾으려는 인간쓰레기들의 망동으로 ‘자주적 민주국가’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음을 느끼면서 절박한 통한으로 쓴 「이 세월도 헛되이」입니다.

북풍을 맞으며, 약 60년 전 열혈시인의 시정(詩情)은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라든 만해의 시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세월도 헛되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면서 품위(?) 있는 식당에서 1인당 10만 원 내외의 식사를 하고 30만 원 이상 하는 명품 목걸이를 선물하고 34석밖에 없는 고급 극장(1인당 3만 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런 20대 중반 젊은 놈과 공존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 존엄성’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어떤 계급의 사람들이 어떤 제재도 받음 없이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 수 있도록 용인되었을 때 ‘자유’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부자들이 경제적 독점을 행사해서 공동체의 여타 성원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때 ‘평등’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212년 전 6월 25일 프랑스 대혁명기의 주요 정파 중 하나인 ‘격분한 사람들’(Enrage)의 지도자 자끄 루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끄 루 같은 재야지도자가 2005년 겨울 비정규직의 생존권 투쟁현장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껍데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아닐까요?

60년 전 ‘해방기’에 새로운 나라의 목표가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지녀서 우리 조상이 좋아하던 ‘인자한 덕’을 지닌 성인들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육을 강조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민족의 행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계급투쟁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에서 나의 세계관과 차이가 있으나 그의 꿈은 자크 루의 비판에 동조하는 ‘인간’이라면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백범입니다.

‘내실 있는 자유와 평등의 덕의 공화국’을 실현하려면 ‘비판정신’과 ‘정의감’을 실천할 수 있는 세대를 육성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공연예매 사이트 인터파크가 8월 초 20대와 30대가 79%이고 40대가 14%인 연극관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심히 우려스런 것입니다. 좋은 연극의 판단기준은 감동(34%)보다는 재미(52%)이며, 연극의 문제점으로 55%가 ‘너무 철학적이다(난해하다)’라고 답했더군요.

이런 경향은 선호하는 영화의 종류에서도 나타납니다. 상업영화의 제국, 미국에서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가 예술영화 상영관으로 직행해서 단관 개봉한 일이나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오른 영화가 미 개봉으로 DVD시장으로 직행하는 사태가 그렇습니다.

이런 경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휴대폰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엄지족’과 컴퓨터 ‘마약’에 빠진 청소년의 증가, 그리고 독서 부족입니다.

체 게바라를 높이 평가한 사르트르가 ‘바보상자’라고 부른 텔레비전의 해독은 지금도 지적되는 주제입니다. 세계적 명문인 미국의 존스 홉킨스대와 스탠퍼드대 그리고 워싱턴대의 연구에 따르면 텔레비전이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텔레비전의 악영향은 가족성원들 사이의 대화시간을 좀먹는 것으로도 드러납니다. 따라서 세대간 ‘문화계승의 혈전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비교육적 효과’는 컴퓨터 게임과 비디오 게임에서도 나타납니다.

독일 하노버의 범죄연구소가 텔레비전과 비디오 게임에 관한 이제까지 최대의 연구―10세~15세 청소년 23,000명을 대상―에 따르면, 텔레비전을 너무 오래 시청하거나 비디오 게임을 너무 자주 하면 비만해지며 멍청해질 뿐만 아니라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며 병에 취약해진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비영리 매체 조사기관인 NPO 월드에 따르면 조사대상 30개국 중 한국인의 주당 독서시간은 3.1시간으로 최하위이며, 세계 평균인 6.5시간에도 못 미친다고 합니다. 내가 청소년일 때에 비해서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태를 보다 넓은 맥락에서 생각해 봅시다. 미국의 국립교양기금이 20년간 추적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서의 위기’ 경향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1982년에는 18세 이상인 미국인들 중 56.9%가 연간 최소한 소설 1권을 읽었으나 2002년에 이르러 이 수치는 46.7%로 줄어들었습니다.

더 우려스런 사태는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독서량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의 원인은 첨단 시청각 기기들의 이용으로 쾌락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경우 ‘범죄 시리즈’의 독서량은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이런 소설들이 ‘사회적 삶의 탐구’와는 동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열등한 문화적 동질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의 청소년들이 정신 팔리는 비디오 게임, 컴퓨터 게임이 프랑스의 ‘범죄 시리즈’보다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내용을 더 많이 훌륭하게 담고 있을까요?

이런 ‘문화의 공황상태’를 타개하려면 교육 전반, 나아가 남한 사회의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 질적으로 변화해야 함은 명명백백합니다. 허울을 벗는 한 가지 방도는 공공 도서관의 내실화일 것입니다. 남한의 공공 도서관 수가 400개인 것에 비해서 일본은 2,700개이며 국민 1인당 장서 수에 있어서는 남한이 0.47권인 것에 비해서 일본은 3권입니다. 일본의 인구가 남한의 2배 정도임을 생각하더라도 후진적임은 분명합니다.

남한의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 후 룸살롱에서 개지랄을 떨고 있거나, 군사 파시즘의 친위대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예산심의를 여전히 치외 법권 지대에 방치하는 직무유기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여야 의원들이 ‘문자-활자 문화 진흥법안 요강’을 만드는 일과 같은 성실성을 바라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20대 중 참혹한 한국전쟁의 발발연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비율이 46%에 불과하다는 것은 청소년의 역사의식 수준이 우려할 만한 한 가지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남한은 ‘내우외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형제’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를 외면하는 정규직의 ‘이익집단’적 경향, 한국노총의 부패, 그리고 아슬아슬한 북한, 일본의 노골적인 군국주의화, 그리고 남한의 진정한 민주화에 또 하나의 결정적 장애물이 되어가고 있는 ‘자본주의 중국’.

이런 ‘내우외환’의 파고를 슬기롭게 극복하려는 올곧은 결의를 북풍 속에서 다시금 생각합니다. 어린 가슴에 인상 깊었던 『채근담』을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로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재물을 쌓는 마음으로 학문을 쌓고, 공명을 추구하는 집념으로 도와 덕을 추구하고,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벼슬과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책략으로 국가를 지켜야한다….”

[최형록의 과학에세이] 47호(2005-11/12월)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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