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서평] 옥중련(獄中蓮) - 서준식 선생을 말하다 (2)

[최형록 서평]

옥중련(獄中蓮) - 서준식 선생을 말하다 (2)

    
                

최형록(인문학자)

서준식,『옥중서신』(야간비행, 2002년)
『서준식의 생각』(야간비행, 2003년)


3. 지혜와 ‘인간에 대한 사랑’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되며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이것은 공자의 진리추구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격언이다. 그런 한편 배움과 생각 자체가 심화 - 확대되려면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한다. 서준식에 따르면

경험은 인간에게 사색할 것을 강요하고 그 사색의 결과를 실험해보려는 능동적인 자세가 또 다시 새로운 단계의 경험을 낳게 되고, 그것이 다시금 보다 높은 단계의 사색을 유발한다(『옥중』, `81. 12. 15일자, 185면 그리고 296면, 476면, 642면).

1981년의 이런 입장은 1986년에도 지속되어 보다 문제의식이 선명해진다.

‘추상’과 ‘구체’, ‘법칙’과 ‘우연’, ‘원칙과 비원칙’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사고하고 행동하는, 참으로 고통스럽고도 치열한 삶을 감행해야한다. 왜 ‘고통’이며 ‘치열’인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원칙’에 대한 무서운 회의와 그 회의를 극복하고 다시 원칙으로 회귀하려는 의지, 아니면 낡은 원칙을 새로운 원칙으로 갱신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겪는 무서운 긴장,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정직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회의가 과연 정당한 회의인지 아니면 소시민적 욕심에서 생겨난 동요인지를 자신의 내부 가장 깊숙한 곳으로까지 내려가 엄하게 힐문해야 하는 그런 끊임없는 정신적 긴장의 무시무시한 중압 때문에…(『옥중』, `86. 8. 30일자, 654면 그리고 180면, 615면).

정신의 심연(深淵)으로부터 제기되는 이런 문제의식은 이미 20대 중반에 (『옥중』22면, 『생각』205면) 형성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초반 (『옥중』, 639면) , 30대 중반에 위와 같이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옥중』전체의 내용을 볼 때 그의 문제의식은 ‘소시민적 욕심’으로부터 유래한 동요가 아니라 기존의 ‘정통 원칙(리?)’에 대한 강력한 회의이다.

그가 문제시하는 ‘유물론적 인간형’이란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일까? 이런 인간형이 인간과 사회․역사를 보는 관점은 단순명쾌한 기계론적 결정론과 ‘정치주의’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 이것에 뿌리를 둔 윤리에 대한 무관심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런 인간은 ‘반 지성’적 이다.

‘옳은 것’이 피와 눈물로 다져져서 ‘진짜 옳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닌 반 지성, 모든 주장의 결론에 이르는 논리적 과정을 음미하지 않고 자신의 결론이나 용어법과 틀리면 규탄하는 반지성, …(『옥중』,1979. 11. 7일자, 70면).

각박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사랑’ 따위는 관념적인 영역에서 ‘이념화’되어버리고… 나날이 현실적인 삶과는 무관한 저 높은 곳에 걸려있으면서 ‘궁극적인’정당성과 정의로움을 담보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일상적 실천’의 아픈 구도를 거쳐서만 정당성과 정의를 확인해가고 싶은 나는 고독하다(『옥중』1983. 9. 2일자, 387면).

여기서 ‘궁극적인’이란 ‘환원론적’ - 경제적(혹은 생산력주의적)이든 정치적이든 - 사고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런 사고방식은 ‘00교본’ 따위에서 배워서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회과학적 법칙, 공식, 도식, 개념 등을 정연하게 열거하며 ‘살아 숨 쉬는 현실’을 억지로 뜯어 맞추는(『옥중』, 508면) 경향성을 띠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유신’ 시대나 향후 ‘사회민주주의’(정반대로 21세기형 파시즘)의 일정한 세력구축을 정치적 상황, 문화적 사조, 사회운동의 전통, 국제적 맥락과 같은 측면들은 도외시 하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판단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서 상황은 ‘경제적 잉여’라는 개념으로 환원되어 파악된다. 1933년에 독일에서 나치즘이 ‘합법적 선거’를 통해서 집권한 것이 1970년대 초 한국만큼 노동자계급과 타협할 수 있는 ‘경제적 잉여’가 적은 것으로부터 비롯된 ‘야만’이었을까? 혹은 조선보다 훨씬 오래 식민지 치하에 있었으며 조선 못지않게 ‘경제적 잉여’가 없었던 인도에서는 왜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40여년의 파쇼체제와 같은 ‘야만의 거친 숨’이 사회전체를 질식시키지 않았을까?

더욱이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입으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 마음이 울리지 않는다’.

자생이고, 정서고, 감정이고, 낭만성이고를 딱 잘라버리고 흑이냐 백이냐, 좌냐 우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남이냐 북이냐 따위의 살벌한 양극론만을 앞세우고 윽박지르는 돌대가리들을 상대해야할 때면 …(『옥중』, `81. 6. 22일자, 154면).

이런 ‘유물론적 인간형’의 한 가지 위험성은 지나치게 ‘세속적 기도에 사로잡힌 1차원적 인간화’의 위험이며(『옥중』, `86. 7. 19일자, 639면) ‘정치적인 너무도 정치적인’ (『옥중』, `85. 10. 26일자, 568면) 인간이다.

이런 인간들은 비판적 지성을 갖춘 서준식에게 “예수냐, 마르크스냐, 양자택일하란 말이야!”라고 다구친다. 서준식에게 이런 태도는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그를 왼쪽에서는 ‘무절제’하다고, 오른쪽에서는 ‘아류’, 심지어는 ‘위장’이라고 비난하고 욕을 한다.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부족과 유치한 통찰은 때로 난폭한 ‘과격’으로 은폐되거나 보상받기 마련…(『옥중』, 258면).

서준식은 이런 ‘속류’,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해서 처참한 정신적 위기에 처해서 깨달은, ‘절실한’ 근본적인 문제 틀을 제기한다. 이것은 나 자신이 탐구하고 실천하려는 문제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혁명과 인간의 도덕성과의 관계, 사회제도만 변혁시켜놓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인간의 선량함이 따라갈 것인가의 문제, 자동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인간이 착해지려는 ‘주체적인 정신운동’ 같은 것이 사회개혁운동과 병행 내지는 보충할 필요가 없는가의 문제, 통속적으로 이해되는 유물론적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경향으로 치닫는 측면을 포함할 것인가의 문제 등등(『옥중』`86. 9. 9 일자, 662면 그리고 639면).

이런 근본적 문제제기는 서준식의 문제틀 ‘자생적, 토대 - 상부구조’론에서 유래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이라는 ‘토대’ 위에 고도로 효율이 발휘되도록 짜여 진 조직적․전술적 원칙이라는 ‘건조물’이 세워지는 것… 그런데 이렇게 세워진 ‘건조물’이란, 그것이 부단히 튼튼하게 입각해 있어야할 ‘토대’로부터 유리되고 겉돌아 그 자체로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혁명가의 삶은 다만 비정하고 참을 수 없이 왜소한 한낱 기술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후퇴하고 혁명가는 전사나 음모적인 정치가로 타락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의 갈망과 거기에 입각한 자기추구, 실존적인 상황파악의 고통스런 노력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미리 주어진 당위만 실천하는 것이므로… (『옥중』, `82. 10. 30 일자, 501면)

초등학생 때 인상 깊게 보았으나 당시에는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의 영화에 등장하는 라라의 남자 연인에서 우리는 이런 ‘유물론적 인간형’을 볼 수 있다. ‘혁명과 인간의 도덕성과의 관계’라는 문제의식은 ‘실존적 상황파악의 고투’로서, 인간의 역사시대 이전 선사시대 나아가서는 ‘생명의 진화’라는 훨씬 장구한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생의 근원에 가로놓인 인간의 ‘짐승 된 슬픔’은 합리적 사상이나 ‘역사의 진보’가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에 속할 것이다. ‘짐승 된 슬픔’의 철저한 자각은 ‘인간의 무한한 위대함’에의 자부가 ‘유물주의적 환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인간의 주체적․도의적 노력을 독려하기 위한 거점이 된다(『옥중』, `86. 7. 19 일자, 640면).

‘인격의 변화 없이 인간의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유물주의적 환상에서 해방되려면 ‘내적 개조’ (『옥중』, 570면)가 필수적이다.

…‘진짜 자기’를 구속하는 이러저러한 미련이나 욕심으로부터 해탈해야한다 …달관…이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쟁취해야할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하다(『옥중』, `84. 7. 31 일자, 479면) 이런 해탈은 항상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 사랑’의 실천(『옥중』, `83. 2월, 334면) 과정에서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맹자는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에 無恒産 因無恒心 (일정한 재산이 없다면 그로 말미암아 일정한 도의성을 지닐 수 없다)이라면서 無恒産而 有恒心者는 오직 士人(오늘날의 경우 넓은 의미의 혁명적 인텔리겐챠)만이 가능하다고 2300년 전에 지적했다.  그의 사상의 일정한 역사적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자아의 해탈’은 피나는 투쟁의 과정임이 분명하다. ‘자아의 해탈’과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 사랑’이 ‘도덕재무장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준식의 경우는 다르다. 그의 ‘철창철학’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얽매임에서의 벗어남이 아니라 ‘얽매임 속에서의 얽매임과의 처절한 투쟁’이다. 그 투쟁이란 얽매임 속에서의 객체적 삶을 그 얽매임 속에서의 주체적 삶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한 자신과의 눈물겨운 투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넘치는 기쁨으로 그 얽매임에 몸을 맡길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즉 얽매임은 자유가 된다(『옥중』, `88. 4. 28일자, 826면).

서준식의 유물론적 문제의식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그람시의 ‘옥중고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는, 레닌으로부터 변증법을 잘 모른다는 비판을 받은 부하린의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등을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에서 이른바 “외부 세계의 실재”와 관련해서, 민중은 외부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지 여부와 같은 문제를 묻는 것 자체를 우스꽝스런 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물음은 마치 역사의 외부에 그리고 인간의 외부에 어떤 객관성이 있는 것을 상정하는 것과 같음을 지적한다.

이런 ‘객관주의’는 17세기 근대 서구의 자연과학, 특히 물리과학을 사회와 역사적 현실의 파악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고’의 귀결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역사적 유물론’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기원을 지닌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점이다.

객관적인 것은 항상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정확히 “역사적으로 주체적인 것”에 상응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주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그람시, 『옥중수고 선집』445면).
  
그람시의 ‘실천의 철학’에 있어서 실천이란 철학적으로 의지(상부구조)와 경제구조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 있어서 ‘경제인’적 인간관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인간관을 전제로 하는 기계적인 사적 유물론은 모든 정치적 행위가 구조에 의해서 직접(매개과정 없이 - 필자) 결정된다고 가정하며 실수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준식의 ‘혁명과 인간의 도덕성과의 관계’론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동반자, ‘분개 내지 증오’ 그리고 감정과 정서의 문제는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의 형성문제와 직결된다. 즉

민중은 “느낀다”, 그러나 항상 알며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지식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항상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항상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양 극단은 한편으로는 현학성과 속물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맹목적 열정과 분파주의이다 …

지식인들과 민중 - 국민 사이의 관계가, 지도자들과 피지도자들 사이의 관계가,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 사이의 관계가, 느낌 - 열정이 이해가 되고 그런 다음 지식이 되어서 하나의 유기적 응집성을 지니게 된다면,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만 그 관계는 (독재가 아닌, 민주적) 표상관계가 된다.(그람시,『옥중수고 선집』, 418면)

서준식은 사랑이 가득 찬 착한 삶을 ‘직관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어머니 같은 분들의 한계(『옥중』, 254면), 집단적 광기(『옥중』, 613면)에 대한 지적에서 그람시가 강조하는 바를 깨닫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계속)

『진보평론』2003년 여름호  [2003. 4. 14~15]

(사진=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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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양해 아래 그의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에세이는 최 선생의 책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도서출판 다올 정문사)에서 옮긴 것으로 그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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