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연대가 변혁적 중도주의? 과연 안철수는 누구인가?" - 최형록

최형록(인문학자)

[최형록 에세이] 야권연대가 변혁적 중도주의인가?
                                        
2013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 민중은 2류 레이건에 이어 2류 대처가 오도(誤道)하는 고난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문재인지지 세력과 안철수 지지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의 일부가 합세하여 후보단일화를 이룩하여 가까스로 승리하지만 우왕좌왕하는 불안한 길을 걸을 것인가라는 “미로” 앞에 서 있다.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인 노무현에 대한 기대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신(新&辛) 자유주의에 대한 무력감과 무능이라는 낙과(落果)로 나타났다. 민중은 심화되어 가는 양극화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특히 박정희 군부 쿠데타 이래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직시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보수야당의 계급적 기반과 그 정당의 의사결정 구조의 문제점들 등등을 노무현 개인의 인간적 매력과 얼마나 똑똑하게 구별했을까? 나아가 한국 보수야당이 4. 19라는 “미완의 혁명”으로 분출된 민중의 열망을 얼마나 우유부단하게 정치화하지 못했으며 1987년 결코 정치노선에서 다르지 않음에도 양 김(김영삼 VS 김대중)으로 분열하여 민간인 복장을 한 군부독재정권을 탄생시킨 등등의 역사를 반추해 보았을까?

2012년 5. 16 군부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헌법 전문을(...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1) 무시하는 박근혜 그리고 노무현의 적통 문재인을  앞에 두고 한국 민중은 다시 이 질문을 자문해야한다.

이런 역사적 조건 속에서 보수적이고 무능하며 용기 없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연대가 정의롭고 현명한 선택일까?

법 앞의 평등을 가소롭게 여기는 Psychopath적 이며 Sadistic한 재벌을 “다스리는” 경제민주화를 삼성경제연구소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세력이 실천할 수 있을까?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SJM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폭력적으로 묵살하는 회사에 대해서 그리고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공(恐)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던2) 반면 그런 무법 천지적인 SJM측에 대해서는 공(空)권력으로 변신하는 경찰에 대해서 민주당은 행정부의 직무태만을 어떻게 시정해서 견제하였는가? 민간인 사찰 문제 역시 천안함 사건처럼 은폐-축소하는 악의 세력의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비롯하여 일상적으로 구체적으로 “짐승 같은 삶”을 강요하는, 당면한 생존권을 비롯한 제반 문제들을 이성적이며 용기 있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1987년 이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성장해온 민중운동 세력이 독자후보를 내어 대선에 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내가 중요한 점에서 동의하면서도 결단의 방향에 있어서 입장을 달리하는 관점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비평계에서는 물론 민주화운동에 크나큰 기여를 해 오신 백낙청 선생님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백 선생은 <<창작과 비평>> 2012년 가을 호 “2013년 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에서 ‘강력한 수구세력이 상당수의 합리적 보수주의자들마저 포섭하여 최대정당으로 군림하는 구도를 깨어야한다’면서 <<안철수의 생각>>에 대한 긍정적 비평을 하고 있다.3)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민주당을 지지하는 적잖은 자들이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백 선생께서 추진하는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교수가 경선을 통해서4) 박근혜의 만만찮은 대항마로 나서는 길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최대정당이라는 것이 원내 1당이면서 대통령까지 “새 누리 당”(전두환의 꼭두각시 였던 민주정의당이 살(殺)민주 불의 당이라는 그 진면목을 항상 환기시켜 주었듯이 이 당명은 헌 세계 당이라는 진면목을 항시 환기시켜줄 것이다) 출신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 세력이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을 상당수 영입하는 데 성공하면 그러 한대로 그 세력을 압박해서 민주화의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고 “새 누리 당”의 헌 누리성이 그 반동성의 발톱을 드러내면 범 진보세력은 생존권의 벼랑에 밀려 더 이상 후퇴할 수 없기에 쥐새끼 같은 인생이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세력의 목을 치는 길에 나서지 않을까?


1. 분단모순이 변혁의 제 1 관문인가?  

백 선생께서 “분단체제 속 마음공부와 중도공부”를 강조함은 당면한 대선 차원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변혁을 변화한 세계 속에서 추구한다고 할 때 전면적으로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우선 백 선생은 한국의 시민운동에 “후천성 분단인식 결핍증후군”이 있다면서 한국인의 개발 지상주의와 분단체제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5). 분단모순은 남한민중과 외세(미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민중과 (미-일) 제국주의의 갈등으로부터 비롯한다.6)

이런 모순은 남한민중과 북한민중 사이의 관계 그리고 남북 정권의 작용을 고려해야한다. 기본모순은 사회적 생산과 사적 점유(Appropriation을 뜻하는 것으로 전유: 專有라고도 한다) 사이의 모순으로 계급모순이며 주요모순이 민족모순임을 전제로 해서 이 두 모순, 계급모순에 민족모순이 특유하게 중첩되어 분단모순을 초래했다는 입장이다.

이런 “변혁적 중도주의”는 1987년 이래 한국사회의 향방에 대한 세 가지 노선을 비판하면서 형성된다. 첫째 노선은 중간층의 온건 개혁노선, 둘째 노선은 “민족해방"(NL: National Liberation) 노선, 셋째 노선이 ”민중민주주의“(PD: People's Democracy) 노선 이다. 즉 변혁적 중도주의는 중간층의 온건 개혁노선과는 그 질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중간층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볼 때 대략 중간계급, Bourgeois계급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의 계급지배에 핵심적인 면이 경제와 정치의 분리이며 이것은 교사와 교수를 비롯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군과 경찰의 정치적 중립 등과 같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민주주의의 목덜미를 잡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한국의 가정-학교-사법부-언론-제 종교단체들 등에서 악의 체제인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그 체제를 넘어 그 대안의 체제를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체제와 질적으로 다른 성격들 중 한 가지가 기본적으로 경제의 사회적 재생산에 정치라는 외적 강제가 직접적으로 항상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가 계급은 “자유계약”이라는 법적 관계를 통해서 노동계급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구매한다. 마르크스의 천재성은 바로 이 겉보기에 “자유로운 계약” 관계가 봉건적 지주-소작 관계에서처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지배-착취 관계를 느끼고 깨닫지 못하도록 은폐함을 잉여 노동력을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확보함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다.

산업 혁명기에 반(反) 자본주의적인 노동운동의 선구자들이 독립적 장인들(Artisans)과 숙련공 이었던 점은 이런 노동과정의 질적 성격변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장인들은 상품을 자신의 구상 아래 자신의 기술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생산하는 까닭에 자신의 노동에 보람을 체험할 수 있는 반면에 자본주의 체제 아래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부터 “소외감”을 체험한다. 이런 소외된 노동관계에서 장시간 노동을 할 경우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성찰해서 은폐된 착취-지배관계를 깨닫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국가 공권력이라는 강제력 그리고 앞서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ISAs: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가족-학교-종교단체-언론-사법부)에 의한 “조작된 동의”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가능하다. 파업에 대해서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세계적 추세에 후진적인 것이며 짐승만도 못한 야만 그 자체인 것이다.

중간층의 온건 개혁 노선이란 이런 경제와 정치의 불가분의 관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며 그런 만큼 형식적 법적 절차에 한정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노동계급이 체제수준에서 강요당하는 부자유와 불의에 항거하는 파업 등의 행동들이 “법과 질서”에 어긋나는 과잉행동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자기기만적 세계관의 수인(囚人)으로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변혁을 지향하는 백 선생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변혁”이 빠진 개혁노선 내지 중도노선과는 입장을 달리 한다. 그러면서도 “다만 그 변혁대상은 분단체제이므로 국내정치에서의 개혁노선과 얼마든 양립 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국내 민주주의 문제 전체가 남북관계와 맞물려 있는 것이 분단체제 특유의 현실” 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삶의 조건과 관련해서 중대한 고비로서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방침을 밝히는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박정희가 7.4 남북 공동성명이라는 마술을 부리면서 야만적인 유신체제 수립으로 넘어간 과정,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을 반추해 보면 그리고 그 관계에서 균형자 역할을 미 제국주의가 해왔음을 직시한다면 남북관계는 국내 정세를 규정하는 주된 실타래들 중 하나다.

그리고 그 남북관계는 1978년 이래 주자파(走資派)의 노선을 걸어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大國掘起) 중국의 영향력이 북한에서 커가는 상황에서 향후 남한이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키느냐 우매하기 짝이 없는 “차양정책”을 답습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며 동시에 국내정세와 선순환의 상호작용을 가지거나 악순환의 관계를 가질 것이다.


2. 민중은 역사적 조건의 객체이자 주체

백 선생과 함께 문제의식의 먼 길을 걸어오다 우리는 갈림 길에 이른 듯하다. 변혁의 주체문제 그리고 본질주의적(Essentialist) 환원론이 아니라 “연기론”적 사고방식의 문제가 바로 그 분기점의 작용점이다.

우선 변혁주체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주체형성”을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유전학과 생물학에서 논쟁점인 유전자-환경-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잠시 살펴보자. 유전자 결정론은 유전자가 개인을 결정하고 개인들이 사회를 형성함으로 유전자에 의해서 사회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복지국가를 해체하는 반동적이고 야만적 책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해주며 사회를 반동적 우생학의 관점에서 관리-통제하려는 세력에게 자기기만적 자기 정당화의 논리적 비수로 그 기능을 발휘한다.

이런 환원론적 사고방식에 비판적인 관점은 “생명체는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을 결정하는데 생명체는 환경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외부세계를 변화 시킨다”는 것이다. 식물의 뿌리는 서식지 토양의 물리적 구조와 화학적 성분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을 결정하여 영양분을 보다 용이하게 동원하여 흡수한다. 식물이 자신의 환경을 구성하는 것이다!

태양광선이라는 물리적 환경을 꿀벌과 인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달리 변화시킨다. 꿀벌은 광선을 자외선 범위에서 지각하여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가시광선 범위에서 사물을 지각할 수 있으며 자외선에 과다노출 되면 피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선택되는 특징들”이 결정되는 것이다.

변혁주체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사회 환경 속에서 구체적 상황에 적응하는 동시에 부단히 그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역동적 존재다.

환경에 대한 객체이자 주체로서의 생명체 일반이라는 “연기론”적 사고방식을 인간의 사회와 역사에 발휘한 분이 Antonio Gramsci 이다. “객관적인 것은 항상 ‘인간적으로 객관적인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정확히 ‘역사적으로 주체적인 것’에 상응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주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7)

1989년 백 선생은 김승호 당시 지역-업종별 노조 전국회의 부위원장 그리고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민주주의 이념과 민족민주 운동의 성격”이라는 좌담을 진행하는데 안 교수는 자유 민주주의가 민중이 소망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민중의 주체적 역량이라는 점에서 당시 운동권의 구호(22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는)자주-민주-통일로 표현되는 민족-민중 혁명노선을 반대하고 있다. 그 당시 부족했던 민중의 주체적 역량은 전교조를 비롯해서 민노총을 결성함으로써 성장했다.

그런 한편 예상한바 보다 훨씬 급속히 분열하고 있는 “토합 진보당”(合한 것을 吐하고 있기에)사태는 이 시기에 필요한 주체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체역량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가치관이 “목구멍이 포도청”, “파이부터 키워야 나눌 수 있다”는 류의 경제주의와 선 성장 후 분배론 이다.  

인간에 대한 이런 류의 경제 동물적이고 용렬한 가치관은 사상의 암과 같은 것이다. 독일의 Edouard David은 “우리는 카우츠키가 기술하는 방식, 마음을 혁명화 하는 방식으로는 대중의 공감(Sympathy)을 획득할 수 없었다. 마음을 혁명화 하는 방식으로는 학생들 몇몇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데 그칠 것이다. 대중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식으로 혹은 이해하기가 그다지 녹록하지 않은 사상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다.

대중을 혁명화하기란 마음에서부터가 아니라 위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세상사에 빠삭한 양반”(“Mr. Worldly Wise")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8) 이런 양반들의 속물적 태도에 대해서 Lenin은 민중에게 ”진실과 진리(Truth)를 말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내가 Truth를 진실과 진리로 구별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선악이 어떻게 혼재하는지 파편적이고 편파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전모를 있는 그대로 본다(如實知見)는 것은 현실의 진상(진실)을 보는 행위이며 그 행위는 ”창조과정으로서의 인간다움“의 원리로서의 진리를(과학적 진리, 인문학과 예술적 진리 그리고 종교적 진리) 반드시 동반한다는 확신에 입각한 것이다.

레닌의 이런 관점을 계승해서 Antonio Gramsci의 Hegemony론에서 확신할 것을 강조하는 점이 ”진리-진실의 힘“ 이다. ”거짓말 하기는 정치의 기교(art)에 본질적인 것이다.......이런 일이 하도 뿌리 깊고 널리 유포된 의견이어서 진리-진실을 실제 말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 상황을 개탄하면서 ”......진리-진실을 말하기는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며 거짓과 은폐-조작-날조에 정면 대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9)

이 나라의 5적(賊)-재벌, 장차관,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장성-에게 거짓말은 일용할 양식이기에 그람시의 촉구는 오늘 우리 민중의 실천과제인 것이다.

“우리가 당신의 지성을 필요로 하게 될 때가 올 것이기에 당신 자신을 교육하라. 우리가 당신의 모든 열정을 필요로 하게 될 때가 올 것이기에 흥분할 줄 알라. 우리가 당신의 모든 힘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이기에 조직하라”. 그람시가 주도한 Ordine Nuovo(신질서)의 창간호(1919-05-01) 왼편에 실렸던 이 경구는 이제까지의 성취로부터 자신감과 긍지를 가지는 한편 뼈아픈 실패들을 정면직시해서 고귀한 교훈을 민중 개개인의 심심산천(心心山川)에 심으면서 민중해방을 향한 끈질긴 투쟁의 여정을 걸어가는 데 여전히 명심해야할 정신자세 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마음을 혁명화 하는 과정은 범속함의 짐승 같은 안정성을 용기 있게 박차고 나아가는 것이다. 맹자는 2300년 전 범속한 사람들의 경우 “일정한 재산이 없다면 그로 말미암아 일정한 도의성을 지닐 수 없다”(無恒産 因無恒心)면서 일정한 재산이 없어도 일정한 도의성을 지닌 자는(有恒心者) 오직 선비(士人)뿐 이라고 말했다. 이 격언을 내가 지금 강조하고 있는 바에 입각해서 이해한다면 민중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그러려면 경제주의를 벗어나야한다는 것이다.

백 선생님이 변혁운동의 우선 과제를  상대적으로 분단모순의 극복에 두더라도 그 주체가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이라면 그리고 모순의 성격을 본질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연기론적-변증법적”으로 파악한다면 당면한 대선에서 야권연대에 집착하는 태도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야권연대의 힘의 작용점이 안철수 교수랄 수 있는데 그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정부의 발표를 믿습니다......’는 입장에 대해서 “독자적 학습과 성찰”을 백 선생께서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경향신문>(2012-09-20일자)에 따르면 안 교수는 민주 통합당이 재벌구조를 바꾸어야만 효과가 영속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내부 순환출자 등으로 10대 재벌이 지분율 1 %도 안 되는 0.9%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2012-07-02일자) 반이성적인 강도적인 “기업지배”(Corparacracy)라는 암세포, 국가안보(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수술 칼을 약간 대려는 것을 두고 근본주의적 발상이라고 하는 그는 백 교수께서 비판했던 문재인 씨와 같은 “온건 개혁세력”에도 못 미치는 것이 아닐까?

경제민주화가 성장 동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 과연 과학적인 사실로 둔갑해서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선 성장 후 분배론”이라는 인식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Vaccine)일까?  안 교수를 노예적으로 경제주의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경제 동물적 한국인들을 “빠삭하게 잘 아는”(Mr. Worldly Wise) 그 부르주아적 “근본”을 넘지 않는 “통속적 중도주의자”라고 규정하면 지나친 것일까? 南無觀世音菩薩.


(* 이 글은 본지 17일자 '민중세력의 '독자적 후보전술'을 말한다 - 최형록' 영상교실의 원고로 최형록 선생이 일부 업그레이드한 것입니다. 원고량이 넘친 관계로 이하 전문은 '바로가기'로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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