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뮌영상]'크랙 캐피털리즘' 저자 존 홀러웨이 화상강연

"우리가 균열(crack)들의 연결을 끊는 방식은
바로 위대한 좌파의 종파주의 전통에 의한 것.."

"혁명은, 미래 아닌, 여기 그리고 지금이어야"
"우리가 창조하길 원하는 세계대로 살아감으로써 부숴야"



『크랙 캐피털리즘』 출간기념  

멕시코-서울 실시간 화상강연: 저자 존 홀러웨이
  

일시: 2013년 1월 16일 (일) 12시 ~ 14시
장소: 다중지성의 정원 302호
행사진행: 기획책임/오정민, 코디네이터/김하은, 통역/김정연




□ 추상노동, 아큐파이, 사회주의 등에 대한 홀러웨이의 생각


[강의 참고자료]

2013년 2월 12일
뉴욕의 잡지 'Tidal'과 홀러웨이의 인터뷰

질문1: 균열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Tidal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의 걷기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다른 걷기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정-그리고-창조입니다. 세계는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돈, 이익을 낳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니오(No)라고 말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우리가 바람직하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하면서, 돈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의미를 낳으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자본의 지배에 순응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고,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의 창조이고, 자기-결정입니다.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고서 다른 세계의 씨들이 될 것을 뿌리고 있습니다.

물론 Tidal뿐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거스르고 대신에 다른 어떤 것을 하려는 모든 시도들입니다. 이것은 ‘점거운동 또는 사빠띠스따처럼’ 클지도, ‘사회센터, 공장점거처럼’ 중간일지도, ‘대안적 농업에 그들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한 한 그룹의 친구들, 평균 크기의 혁명적 당처럼’ 작을지도, ‘아마, 키스처럼’ 정말이지 조그마할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은 ‘주코티 광장처럼’ 공간적일지도, ‘폭동의 일주일처럼’ 시간적일지도 또는 ‘대중교통에 무료로 타기, 물의 사유화에 맞서는 캠페인처럼’ 특유한 활동에 헌신될지도 모릅니다.

우선 첫째로 중요한 것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계가 균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인간 존재는 비인간화하는 체계에 맞선 지속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반(반)-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의 경험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때에만,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뜻을 갖습니다.


질문2: 균열(크랙)들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균열들의 연결을 끊는 방식은 바로 위대한 좌파의 종파주의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건 틀린 방식이야, 우리를 따르면 우리가 그 방법을 보여줄게!"라고요. 제 말은 논의하고 비판하고 제안하는 행위를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음과 같은 것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 또는 차라리 단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길들을 창조하려 노력 중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맥락에서, 자본주의에 맞서-그리고-넘어 밀어붙이는 많은 다른 길들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 균열들을 연결하는데, 특히 균열들로서의 상호 인정을 진척시킴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이게 바로 Tidal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이 인터뷰가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노래ㆍ극장ㆍ책이 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저는 제도적 연결들보다는 반향( 反響)들을 생각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制度)들은 일반적으로 지루함과 침체를 진척시킵니다.


질문3,4 : 무엇이 오늘날 혁명일까요? 파열의 순간과 혁명의 과정 사이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몹시 긴급합니다. 우리가 자본의 동학(動學)을 부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점점 더 골치 아픈 곳이 될 것이고, 인간이 그리 오래 생존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어려움은 우리가 혁명이 무엇처럼 보이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에 군림했던 개념,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사회를 변형한다는 그 개념은, 작동하지 않았고 몇몇 경우들에서는 무서운 결과들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혁명의 생각을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합니다. 혁명적 변화는 이전보다 더 긴급하나,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국가 권력을 손에 획득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 말입니다.

저는 사빠띠스따 말하기의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도움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물론) Yabasta! 충분해!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혁명을 생각할 수 없고, 혁명은 여기 그리고 지금이어야 합니다. 균열들에서 우리는 여기 그리고 지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가정합니다. 그것은 상황을 개선할지도 모르지만 파멸의 자본주의적 동학을 부수는 것과 관련이 없는 개혁을 통해서 증강하는 변화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둘째로 부숴라, 지금 부숴라, 우리가 창조하기를 원하는 세계대로 살아감으로써 부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걷고, 우리는 달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멀리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연기(延期)가 아니고, 완전히 반대입니다. 혁명의 전통적 시간성들에 대한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오래된 생각은 미래의 혁명이었습니다. 미래의 혁명이 사태들을 극적으로 그 때 바꿀 거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 그리고 지금 (반향하는 균열들과 함께)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들고 종종 느린 과정을 여는, 존재하는 것에 맞서-그리고- 너머로 언제나 밀어붙이는 그 과정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일축되는 지점까지 자라나는 파열들의 조수(潮水)적 파도(처럼) 말이죠.


질문5: 어떻게 도시는 혁명적 실천의 무대가 될까요?

그것은 이미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밖으로 가서 보십시오. (만약 그러한 친구가 있다면) 당신의 친구와 앉아서, 당신이 얼마나 많이 당신의 이웃에서 균열들을 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들을 가지고 Tidal에 쓸 수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자료제공: 다중지성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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