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연둣빛 봄날, 삶이라는 학습을

최형록(인문학자)



녹색 대문을 나서면 시립운동장이 환영하듯 있습니다. 운동장 정면의 오른쪽 모퉁이부터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해군 영관급 장교들의 관사들이 정겹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선글라스 시대에 탱자나무의 짙은 녹색과 탱자의 노란색은 일종의 보호색입니다. ‘금상첨화’에 있어서 꽃에 해당하는 것이 초등학교에 오가는 정겨운 길, 그 울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연두색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타이스의 명상곡’ 같은 봄의 미풍에 율동하는 연두색 아카시아 나무 그리고 요즘과 다른 채도 높은 푸른 하늘바다에서 꿈꾸듯 흐르는 구름. 봄이 거칠 것 없이 펼치는 이런 풍경화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의식적인 최초의 꿈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학교는 억압적이어서 혐오했으나 친구들이 좋아서 평생 아이들과 함께 살고픈 바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삶’을 영위하는 길 중에서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을 위인전기를 읽으면서 학습한 까닭에 나의 ‘마음 밭’에 그런 씨앗을 파종한 것이었지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라는 가락과 연둣빛 속에서 키워온 꿈나무를 자주 바라보면서, 팔만대장경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정지상의 ‘송인(送人)’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 사회가 낯선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신문과 뉴스를 시청할 때마다 ‘지옥도’를 시청하고 있음을 항상 확인하게 됩니다.

가부장적인 가정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엄모자부(嚴母慈父)인 가정으로, 군부파시즘 사회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이 공적인 문화기관의 지도세력이 되는 사회로, 점심도시락 반찬으로 달걀이 귀하던 시대에서 ‘물귀신’인 코카콜라―인도의 케랄라에서 코카콜라의 이윤욕 탓에 식수가 더욱 부족해지고 곡창지대의 수확이 감소하자 이 지역 여성들의 투쟁으로 법원으로부터 이 회사의 ‘물 해적질’에 철퇴가 가해짐―와 피자로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로,

암기식 교육에 흥미 없고 혐오한 탓에 ‘거금 70원’(1964년, 7세 때)하던 책들에 빠졌던 시대에 비하면 겉보기는 물론 그 내용의 충실성과 가짓수에 있어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책, 그리고 정보의 바다인―‘똥 바다’ 이기도하지만―인터넷의 시대로, 이토록 경이로운 변화가 있음에도 왜 여전히, 나의 학창시절보다 더욱 악화된, 학교폭력이―왜 하필이면 반민족친일단체였던 ‘일진회’와 이름이 같은지― 그리고 군부대에서 폭력이 그칠 날이 없으며 밀양에서는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하는 ‘새끼악마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3월 15일이 1960년 4·19의 도화선이 된 날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나 청소년들이 아는지 의심스러운 ‘빌어먹을 한국’에 비해서, 이날 ‘타락시킬 수 없는 인물’, 변호사 출신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의 후손, 프랑스의 중·고등학생들은 ‘교육악법 피이용 법안’의 철회를 목적으로 파리에서 2만 명이 가두시위를 했더군요.  1주 전에는 4만 명이 시위했으며 이때 ‘공권력’의 끄나풀들(Provocateur)이 1,000명 투입되어 구타한 사실 역시 주목합시다.

피이용 법안의 본질은 제2차 대전 이래 ‘공화국 교육’의 원리를 제시한 랑즈뱅―왈롱 계획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의 핵심은 교육접근의 평등성, 만인의 성취인데 ‘기업정신’에 입각한 ‘기업의 경영방법’에 따라 교육을 개악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개악의 기조는 ‘자본가 계급만의 자유’주의에 따라 ‘경쟁에 충혈’되는 한편, 실업의 ‘불안에 출혈’하는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교육―노동시장의 게티즈버그전투’를 치르겠다는 계급적 결의입니다.

‘1968년 혁명의 봉화’를 기억하는 프랑스의 중·고등학생들은 대입 자격고사 바칼로레아, 학급당 학생 수의 인하, 교수와 보조인원 채용 등의 안건을 전국적으로 투표에 붙여 교육부에 ‘불만 정리부’(Cahier:프랑스 혁명기에 프랑스 전역에서 작성된, 동학농민혁명기 ‘폐정개혁안’의 초안 같은 것―와 함께 의견서를 전달할 예정이라는군요.

프랑스 혁명기의 계몽사상가 콩도르세는 1792년 4월 20일과 21일 작성한 ‘공공교육의 전반적 조직에 관한 보고서’에서 새로운 공화국의 교육목표를 “각자에게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완전무결하게 만들고 사회적 제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며, 자연으로부터 받은 재능의 범위 전체를 개발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 ‘실질적 평등’을 확립하며 법이 인정하고 있는 ‘정치적 평등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확실히 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싸구려 사랑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야수적 ‘신자유주의’시대에 우리 교육의 철학 역시 이런 정신이 되어야 하며 부패악덕한 교육 장사꾼 놈들의 방패인 ‘사립학교법’ 같은 쓰레기 청소에 중·고등학생이 앞장서 나서려면 이런 철학의 법음(法音)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계몽사상과 함께 생각할만한 것이 불교의 ‘3독(三毒)’입니다. 화냄, 탐욕(집착) 그리고 무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의 ‘무지’란 전경련이 강조하는 ‘악 그 자체로서의 자본주의’의 경제를 비롯한 지배나 피지배의 수단으로서의 지식 없음이 아니라 ‘만물의 상호관련성’과 ‘상호의존성’에 관한 연기(緣起)사상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는 것이며 이런 무지에서 벗어날 때 노동자의 눈물과 땀을 밑천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좋은 신랑, 멋진 아버지가 되는 것 자체에 무감각한 집착에서 벗어나며, ‘부단한 학습으로서의 삶’을 일상생활에서 시시각각 실천함으로써 개인적 분노의 불길로부터 벗어나 ‘변혁적 실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의 이런 ‘윤리적 지혜’는 대체로 콩도르세의 계몽사상과 ‘교집합’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일반교육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서 정치학과 함께 ‘도덕과학’을 강조한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 ‘동방무례지국’을 치료할 수 있는 가장 인도주의적 방도는 ‘사회혁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민중이 그런 위업을 성취할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입니다. 이런 상태를 ‘거의 가능’한 상태로 변모시키는 노력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생각에 대한 생각’의 교육이라고, 영원했으면 하는 이 봄날, 생각해봅니다.


[최형록의 과학에세이] 44호(2005-5/6월)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한국인권뉴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인권뉴스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