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왜 지능인가? (2)

최형록(인문학자)



1. 머리말

“그런데 어떤 목적에서 지구가 형성되었지?”라고 캉디드가 물었다. “우릴 충동질해서 미치게 하려고”라고 마틴이 대꾸했다. 그리고 캉디드는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란 오늘날 그러듯이 항상 서로 학살해왔다고, 항상 거짓말쟁이들, 사기꾼들, 배신자들, 배은망덕한 자들이고 도둑놈들이며, 약하고, 변덕스럽고, 비겁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탐욕스럽고, 술꾼이며, 인색하고, 야심만만하고, 피에 굶주렸으며, 남을 중상모략하기 좋아하고, 음탕하며, 광신적이고, 위선적이며 어리석다고 넌 믿니?”

18세기 중엽 캉디드 즉 뛰어난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65세경)가 푸르른 하늘 아래 전개되는 인간사에서 문제라고 생각했던 현상이 오늘날 얼마나 소멸했을까? 신문을 펼치면 그리고 TV 뉴스를 들으면 캉디드가 분개했던 온갖 사회악, 비열한 인간들과 부딪히지 않는가? 박지원의 준엄한 호랑이의 껍데기만 남은 이 땅 그리고 이 너머에서.

타인은 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할 때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회정의를 위해 테러를 기도했던 신창원이라는 묘한 거울은 백설 공주의 거울 보다 흠집은 많은 것 같으나 쓸모는 더 있는 것 같다. 이 묘한 거울은 이렇게 말한다. “엄청난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금방 감옥에서 풀려나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나처럼 한 순간의 실수로 작은 죄를 지은 사람들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묘한 거울이 ‘할 말은 하는 (뒤에서) 1등’인 신문(전혀 아침(朝)의 햇살 같은 빛남(鮮)과는 무관한 쉰 문) 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불의스런 사회’의 전라(全裸)를 정확하게 비춰주고 있지 않을까? 진형구라는 거울은 ‘추악한 거울’ 그 자체다. 이 거울은 알량한 법 지식을 악용해서 한국조폐공사의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처자식과 부모친척의 생존권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굿상의 음식으로 차리고 그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 쓰레기 같은 거울이다. 박지원의 호랑이를 불러 똥통에 내동댕이치게 해야 할 역겨운 거울이다.

필자는 신창원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또 하나의 거울, ‘지존파(至尊派)’라는 거울을 떠올린다. “가난이 죄다.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이지 못하고 죽게 돼 아쉽지만 밑바닥 인생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를 조금이라도 되갚아줘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지존파의 행동대장 강동은(당시 22세)은 진술했다. 한 길 사람 속에 이토록 깊고 깊은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필자는 그 ‘집’의 보안과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첫 대면을 하면서 ‘지존파‘에 대해서 대화한 적이 있다. ‘범털’, ‘개털’을 삼복더위에만 아니라 반평생 너머 겪은 보안과장의 원인분석은 ‘가정교육의 실종’이었다. 지당할 수도 있는 인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론(緣起論)’적인 분석이 아니기에 틀렸다고 지적했다.

가정교육을 시키는 부모는 가정의 울타리 내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두환이 ‘집’에서 풀려나 고향에 온다고 환영 플래카드를 가슴 뭉클하게 들고나갔을,  엄연히 공민권이 있는  ‘노예’일 수도 있다. 정반대로 키워가던 희망의 불씨로 ‘자신’을 불살라 노동자라는 사회적 존재가 상식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정의에 기초한 과학’으로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족쇄에 채인 존재’임을 보여주려 했던 ‘청년 전태일’과 호흡했던 ‘노예반란자’일 수도 있다.

              

또한 신지식 여성으로서 조선여인들을 황국 신민화 하는데 앞장섰던 여사를 흠모하는 ‘여편네’일 수도 있다. 혹은 “도현이를 잃게 한 나라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둘째 아들이라도 제대로 된 세상에서 키우고 싶다”며 예전에 필드하키 국가대표선수로서 씨랜드 참사를 겪으면서 훈장과 표창을 반납한 어머니일 수도 있다.

개개인은 자신을 수양하면서(修身) 집안을 다스리며(齊家) 국가의 온갖 종류의 대소사에 참여하고(治國) 나아가 세계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平天下)는 공자의 격언에 대한 필자의 해석은 제가와 치국 혹은 제가와 평천하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집’에 있는 동안 운동하러갈 때마다 자주 ‘지존파’ 가운데 어린 녀석과 동행했다. 그는 얼마 후부터는 눈인사를 했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생명의 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중생에게. 속으로 나를 만났더라면 사회에 대한 과학적 관점을 습득해서 불의에 대해서 끔찍스런 증오에 찬 ‘불의’가 아니라 결코 쉽지 않고 용기 있는 ‘정의’를 행할 수도 있을텐데… 라는 착잡함이 들었다.

눈발이 날리는 어느 날 운동 중에 옆방에서 조금 전 헤어졌던 그 녀석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생명에의 절규’였을까, 혹은 ‘증오에 찬 절규’였을까? 꿈속에서 아련히 느꼈을는지도 모를 어머니의 ‘생명의 눈길’ 그리고 하염없이 무심하게 내리는 차가운 ‘죽음의 눈발’ 사이에서 이제 꽃필 나이 20세 초반의 무참한 인생.

‘지존’ 김기환, 강동은 등은 ‘순해 빠지고 인사성 바른 젊은이’였다고 한다. 이랬던 ‘거울들’의 변질은 근본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소외의 심화 즉 ‘사회의 사막화’ 그리고 ‘화폐의 그림자’로 전락한 생명의 경시에 기인하는 것이다.

캉디드의 물음에 대한 마틴의 대답, ‘미친 지구’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안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는 없는 것인가? 그런 방안의 핵심은 민중민주주의의 수립과 생산관계의 변혁 그리고 그와 관련되면서도 구별되는 윤리적 정신혁명이다. 윤리적 정신혁명이 구별됨을 강조하는 이유는  앞의 두 가지 과제가 중대한 역사적 조건을 형성한다고 해서 후자가 ‘자동적으로 그리고 선형적으로(linear)’ 초래되지는 않는 것이 며 결코 그것을 낙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자신의 종에 대한, 당연히 인간 보다 더도 덜도 존엄하지 않는 그 자체로 자연스런 존재 가치를 지닌 여타 생명체들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문화적 돌연변이’라는 새로운 과제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강력한 의문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구미 제국주의 국가에서 그리고 제3세계에서 이런 혁명은 젊은, ‘광범위한 노동계급’(민중)이 주축이 되고 현재 태어난 영아와 유아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야할 것이다. 이제까지 변혁적 민주세력의 관심영역 밖에 있어온 ‘어린이들’에 필자는 주목한다. 본고에서는 2회에 걸쳐서 아동의 도덕적 성장, 10대의 뇌, 태교 그리고 태아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뇌신경세포의 작용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2. ‘미친 지구’에서 ‘윤리의 나무’ 기르기

가. ‘미친 세계’ 그리고 방치되고 있는 북한의 어린이 세대


온몸에 상처투성인 노인들은 난도질당해서 단말마의 고통을 겪으며 유혈이 낭자한 젖가슴께로 아이들을 꼬옥 껴앉은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영웅적 병사들의 자연적 욕구를 채워준(강간-필자) 다음 배알이 튀어나온 처녀들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불에 타 거의 죽게 된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 빨리 죽여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땅바닥에는 머리와 절단된 팔다리가 널려있었다.

코소보 사람들의 참상인가? 르완다의 참상인가?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인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볼테르가 묘사한 불가리아 사람들에 의한 전쟁의 참상이다. 한국은 휴전상태이나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투표하기에는 너무 어리지만 살인하기에는 충분한 나이’에 속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18세 미만의 소년병은 전 세계에서 25만 명에서 30만 명에 달한다. 이 꼬마병정들의 인생은 지구인의 미친 정도를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에서 군인들은 임신부의 배를 갈라 학살하기도 하고 어린 소녀를 잠자리에서 끌어내 죽이기도 한다.

              

우간다의 반정부 무장집단, ‘신의 저항군’에 납치되었던 수잔(16세)은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그 어린 소녀는 반군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잡힌 같은 마을의 소년을 막대기로 때려죽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란-이라크 전쟁 때 아동들은 전격대의 선봉에 서거나 지뢰제거를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지뢰밭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리고 소녀들은 요리사나 ‘위안부’ 심지어는 전투원으로 강요되었다. 도청된 라이베리아군 사령관의 비밀 전신문의 내용은 “어린 소녀들을 발견 즉시 강간하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가상공간을 통해서 전쟁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전에 참여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동남아의 어린이들은 피자는커녕 그리고 다이어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사실상의 ‘강제노동’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남한 어린이들의 상황은 이와는 분명 다르다. 필자와 같이 70년대 중반에 사춘기를 보낸 세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학교는 여하튼 집과 대립적인 혹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곳, 재미없고 권위주의적인 곳이다.

분명 우리 세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교직원들의 노동조합이 있다. 그런 반면 근면을 강조하면서도 교사들은 노동자 나부랑이가 아니라는 시대착오 속에 살아가는, 냉전논리에 장조림 된 훈장들이 있다. 그리고 파렴치한 각종 부패 심지어는 학교의 내규로 3명이상 집회 시 신고(?)해야 하는 ‘미친 훈장’들이 통치하는 학교도 있다.

그런 한편 우리세대는 방과 후 동네에서 소란스럽게 여럿이서 ‘함께’ 놀았는데 현 세대는 PC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논다. 이런 긍정적 변화와 부정적 정체 가운데 현재는 물론 미래 한국사회와 관련해서 심각한 현상은 ‘왕따’에서 드러나는 ‘냉혹한 집단적 배타성’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말에 우려했던 경향, 청소년기의 세대적 동질성 못지않은 계급적 이질성과 배타성이 현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약 1개월 전 받은 충격적 사실 한 가지. 서경석 목사에 따르면 강남의 한 학교 학생들에게 통일관련 강의를 하였는데 적지 않은 학생들이 반대하였고 그 반대의 이유는 통일을 하면 못사는 북한사람들을 먹여살려야하는 부담을 져야한다,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일문제에 대한 아동다운 관점이 남한 내 계급투쟁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동시에 생각해야하는 고도의 판단을 요하는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면서 그 깊이와 폭을 더해가야 할, 맹자의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惻隱之心)’ 에 기초한 동포애 이어야 한다.

이런 ‘냉혹한’ 어린이들은 타인의 처지를 도외시하면서 오로지 가족의 편안함, 자신의 부와 권력 장악을 지향하는 즉 출세 지상주의적 반인륜적인 불의스런 사회 환경 그리고 그것의 논리적 귀결인 입시 위주의 교육현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항해서 모든 영역에서 심사숙고하면서 동시에 강력하고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미래 한국인 다수의 운명은 참담한 것이 될 것이다.

불의스런 사회현실과 자본주의적 질서의 안정적 재생산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라는 맥락과 함께 남한 언론의 반동성과 비열함이 북한민중, 특히 어린이들의 참상을 정확히 보도하지 않는 것 역시 ‘냉혹한’어린이들의 성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기가 막히는 북한 식량난으로 인한 어린이 피해보고서, ‘사라져가는 한 세대, 북한 어린이’를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인구 중 최소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그런 결과 1995년에 이미 92%에 이르는 지역에서 중앙배급시스템에 의한 정상적 식량배급이 중단되었다.
세째, 식량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60세 이상의 노인 약 70~80%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네째, 식량 난민들의 증언을 기초로 추정할 때 3세 미만 어린이의 사망률은 56% 이상이다. 다섯째, 북한관련 의료전문가의 경고는 현재 기아상태의 비참함을 가장 적절히 규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은 거대한 실험실이 될 수도 있다.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굶주리게 되면 뇌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현재 대부분의 북한 어린이들은 지속된 영양실조로 심각한 발육부진을 보이고 있으며 ‘저능아가 집단적으로 발생할 가능성’(필자의 강조)이 매우 높다.”

몇 가지 증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탈북한 의사에 따르면 일부 당 간부 아이들을 제외하면 보통 아이들 다수가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영양실조 2도 상태인데 3도가 되면 영양섭취를 할 수 없고 만성적 설사를 하면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며 길어야 한 달 내에 죽는다고 한다. 단천 출신의 30대 노동자는 “1996년은 부부가 갈라지는 해라면 1997년은 형제가 갈라지는 해이고 1998년은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는 해이니 끝장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양산된 무리가 이름 하여 ‘꽃제비’다. 회령시의 40대 남성은 ‘꽃제비’의 처참함을 이렇게 증언한다. “평양시 시교에는 외지에서 모여든 꽃제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비참하게도 웅크리고 앉아 얼어 죽었는지 굶어죽었는지 도저히 눈뜨고 볼 수가 없더군요. 어떤 꽃제비는 눈을 똑바로 뜨고 죽고, 어떤 아이는 입을 벌리고 죽고, 어떤 아이들은 형제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죽은 것을 보면 기막힌 일입니다.” 이런 ‘꽃제비’들은 20여명이 머리와 머리를 대고 몸과 몸을 붙이고 눕고 엎드려 죽기도 한다. 이런 ‘굶지 않고 추위도 모르게 죽는 터’를 ‘기쁨 터’라고 부른다.

해주시의 30대 교원은 이렇게 묻는다. “… 특히 수학교과서는 학생마다 있어야 되지만 종이공장이 문을 닫아 종이도 생산하지 않으니, 후대 양성에 막대한 손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들은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자라지도 못했거니와 굶어 배우지 못하니 몇 십 년 후에는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나. ‘사막화된 사회’를 옥토로 바꾸기 위한 ‘윤리의 나무심기’

어린이 세대가 소멸해가는 북한 사회에 대해서 반동적 혹은 보수적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선동의 종범(從犯)이나 방조범이 된 어른들의 반 윤리성에 물들지 않는 ‘인정머리 있는’ 어린이의 육성은 이 사회의 미래와 관련해서 백년대계를 넘어 ‘천년의 대계(千年之大計)’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교육학자들과 아동심리발달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심지어는 직접적인 자기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당히-때때로 예외적이랄 정도로- 도덕적 방식으로 행동할까? 왜 어떤 어린이들은 사회적으로 승인된 기준에서 벗어나 심지어는 그들 자신과 남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일까? 어떻게 어린이는 사회적 관습을 습득하거나 못하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평생의 동참의식을 발전시키거나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날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대한 설명방식으로는 대략 세 가지가 있다. 생물학적 혹은 유전적 결정론으로서, 누구나 제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식의 생득설(‘nativist’)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성은 측은지심 같은 감정의 성향들로부터 비롯하는데 그런 성향은 인간이라는 종에 선천적으로 배선(配線)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립적인 관점은 학습설 이다. 여기에서는 어린이들이 관찰, 모방, 보상을 통해서 행위규범과 가치체계를 습득한다고 본다. 이런 전통에서 수행된 연구의 결론은 도덕적 행위는 전후 상황의 맥락에 구속되어 있어서 도덕적 신념과는 거의 독립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행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과 다시 구별되는 관점은 유명한 쟝 피아제와 로렌스 콜베르그의 전통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 성장을 강조하면서 선악은 궁극적으로 의식적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필자의 관점은 이상 세가지 관점을 보다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범주와 개념에서 수용하는 것인데 앞의 글에서 밝혔듯이 차후에 별도로 다룰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스탠포드대학교의 청소년센터의 소장인 발달심리학자 윌리엄 데이먼의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오늘날에도 도덕적 논거가 얼마나 발달되었는지를 측정하는 데 활용되는 콜베르그의 도덕적 판단의 발전 6단계를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다.

제1 수준의 논거는 자기이익이다. 이 수준은 벌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단계 그리고 보상을 받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단계로 구성된다.
제2 수준의 논거는 사회적 인정이다. 이 수준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단계 그리고 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단계로 구성된다.
제3 수준의 논거는 추상적 이상이다. 이 수준은 어떤 행위를 하지 않기로 사회적 계약이 맺어져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단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옳지 않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보편적 정당성의 단계로 구성된다. 이 이론은 1950년대 말에 처음 제시된 것인데 로스토우의 경제성장의 3단계 설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사람들의 실제 행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데이먼 자신의 연구소에 의한 연구를 비롯해서 많은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단순히 벌을 두려워해서 어떤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데이먼은 앞의 세 가지 이론에서 포착하지 않은, 도덕적 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차원들 즉 성격과 동참(同參,commitment)에 주목한다. 어떻게 어린이들이 최초의 가치체계를 발전시키는가라는 것과 무관하게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상에 따라서 살도록 만드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최근 과학적 연구의 초점이 되었다고 한다. 데이먼과 동료 연구자들의 실험은 어린이가 성숙해 감에 따라 이상의 영향력은 증대한다는 명제를 지지해주었다. 여기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 사상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것인지 자유주의적인 것인지 혹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인지 구별하고 그 영향력의 사회적 그리고 인지-신경과학적 기제이다. 특히 후자는 조만간 규명될 성질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의 논의에 있어서 핵심개념은 도덕적 정체성과 행동에의 결의이다. 도덕적 정체성이란 자아를 정의함에 있어서 도덕적 원리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도덕적 정체성은 무엇을 올바른 행동경로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왜 결정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근거가 된다. 그리고 올바른 행동경로를 결정하더라도 개개인의 행동이 다른 것은 이상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결의의 문제라고 본다.

그는 도덕적 정체성을 자아정체성의 핵심으로 보는 것 같다. 그와 카네기재단의 앤 콜비에 의한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인물들-자선사업과 민권운동의 오랜 경력자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도덕적 목표라는 견지에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건에서 도덕적 문제들을 보며 자신들이 이런 문제들에 반드시 연루되어 있다(앞서 지적한 동참-필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앞서 제시하였듯이 어린이들은 어떻게 도덕적 정체성을 습득하게 되는 것일까? 데이먼에 따르면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으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되먹임(feed back), 고무적인 것이든 소름끼치는 것이든 타인의 행동에 대한 관찰,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한 반성, 가족・학교・종교기관・대중매체와 같은 문화적 영향력들을 통해 조금씩 쌓여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데이먼의 견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문화적 영향력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차원이다.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지극히 어려운 과제인데 한국의 역사적 과정을 생각할 때 특히 한국전쟁-5・16 파시스트 쿠데타-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집단적 경험을 다각도로 반성해서 지배적 해석이 보지 못하거나 은폐하는 것을 극복하고 그 교훈적 의미를 널리 공유하는 것은 ‘문화적 돌연변이’에 있어서 중대한 하나의 과정이다.

또한 앞으로 추진될 「친일인명사전」의 편찬 작업은 민중해방의 멀고 험난한 도정에 있어서 진정으로 해방 이래 이 사회 최초의 역사적 반성과 결의의 구체적 성과물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해서도 그 공과(功過)를 역사적 맥락에서 심층적으로 성찰해서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87년 이래 10여 년 동안 축적된 고립 분산적 반성의 축적물들을 기초로 총체 상을 구성하여 민중이 공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런 총체 상을 어린이 수준에 맞추어 교육함으로써 정신적 토양에 정의감의 튼튼한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가 진전된 오늘날 정의감과 관련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법치주의’이다. 자유주의가 자유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듯이 국가권력이 소멸하지 않는 한 ‘법치’는 지속될 것이나 법치주의는 향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점증해갈 것이다.

이전에 ‘인치주의’라는 권위주의적 정치형태의 한 가지에 대항하던 시기에는 상식적 수준에서 법치주의가 비판의 무기가 되었지만 역사적 현실을 생각한다면 민주화의 기본 동력은 법과 법률 종사자들이 아니라 정의감과 민중운동이다. 즉, 민중운동이 흐르는 강물이라면 법이라는 것은 댐에 불과한 것이다. 항상 어디에서나 정의로운 민중운동을 법이 다 담을 수 있었던 적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

전통적으로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되어있는 편인데 부모는 도덕적 지도의 원천이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권위 있는(authoritative)” 부모의 양육은 “오냐오냐하는(permissive)”식의 양육방식이나 “권위주의적(authoritarian)” 양육방식보다 확실하게 어린이의 도덕적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냐오냐하는”식과 “권위주의적” 방식은 둘 다 사회적 관습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습관화하여 도덕적 정체성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양육방식은 어린이에게 자기 통제력과 사회적 책임성의 성장을 억압한다. 필자와 같은 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방식이 “권위주의적” 방식이었다면 상대적으로 신세대의 경우에는 “오냐오냐”식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는 성장해가면서 행동반경과 사고의 지평선을 넓혀 가족의 경계선을 뛰어넘게 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일 가운데 한 가지는 올바른 친교관계(peer relations)를 고무하는 것이다. 밀착연구에 따르면 특히 동년배 어린이들의 토론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동시에 다른 친구의 견해를 경청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는(易地思之)’ 윤리 가운데 기본 한 가지를 습득하는 것이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공동체 수준의 변수들을 즉 다양한 도덕적 영향요인들-부모, 교사, 대중매체 등등-이 상호 일관성이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교의 사범대학 소속인 프란시스 이안니가 미국의 10개 시・읍 출신 청소년 311명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어떤 읍에서 어린이들이 지속성 있는 도덕적 척도를 가지게 되는 것의 여부는 인종, 문화적 다양성, 사회경제적 지위, 지리적 위치 그리고 주민규모와 관계가 없다.

이안니는 조화로운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기준들의 집합을 ‘청소년 헌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어린이, 부모, 교사 그리고 다른 영향력 있는 성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낳는 사회적 개입이라는 점에서 탐구되고 있으나 미국사회에서 실제로 ‘청소년 헌장’의 주된 개념들이 구체화 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라고 한다. 요컨대 어린이들에 대한 바람직한 사회적 개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사회의 경우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가 일정한 사회적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천년지대계라는 관점에서 우리나라 제도교육은 근대화론적인 기능주의에 그치지 않고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와 결합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청사진을 가진 대안적 교육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를 영역했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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