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디플로 읽기]'87체제에 매몰된 진보의 궤멸과 보수의 진화

이택광(경희대 영미문화)

분열하는 한국의 보수주의

2012년 대선 기간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무엇인가? 박근혜 정부의 출현은 보수주의의 전면화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익숙한 대립 구도에서 다시 보수가 집권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운위되던 '이명박 뒤에 박근혜 있다'는 명제는 현실화됐다. 그러나 이 상황을 단순히 '보수의 승리'라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 익숙한 진보와 보수의 대립 구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지난 대선은 그 사실을 보여줬다. 물론 이런 현실을 진보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수라고 분류된 새누리당이 더 재빨랐다. 진보의 의제를 벤치마킹한 것은 물론, 아예 환골탈태해서 자신들을 새로운 정당으로 포장해버렸다. 동일한 의제를 놓고 겨루는 상황이라면 유권자는 능력을 보고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능력에 신뢰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뢰를 잃었던 정당이 쇄신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다시 지지세를 회복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사실은 기본적으로 정당의 이념이 유권자의 표심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보수가 자신을 '진보'라고 포장하는 일은 비단 한국에 국한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주도한 영국의 보수당도 '진보'를 정체성으로 들고나와서 내각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인민자본주의, 보수의 반격

보수가 진보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인민 자본주의'(People's Capitalism)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비효율적인 '큰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 선택인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저항하는 이미지를 각인시킴으로써 과거와 단절하는 새로운 보수를 내세웠다. 이런 변화를 추동한 것은 알게 모르게 전개된 보수의 혁신이었다. 이 혁신은 일부 좌파 지식인이 지적하는 것처럼 '뻔뻔스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집어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보수의 변신은 레오 스트라우스나 에인 랜드 같은 전투적인 보수주의 철학자를 통해 논리를 획득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집어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보수의 변신은 레오 스트라우스나 에인 랜드 같은 전투적인 보수주의 철학자를 통해 논리를 획득했다. 특히 랜드는 철학뿐만 아니라, <아틀라스>라는 소설을 통해 '세상의 주인'을 자본가로 설정하고 가상의 국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파격적인 내용을 선보였다. 소설의 내용은 정부의 조세제도를 거부하면서 자본가들이 연대해서 파업을 단행하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줄거리로 구성돼 있다.

애덤 스미스 이래 자본가에게 부과된 책임의식을 랜드의 소설은 부조리한 정부 시책에 대항하는 영웅의 저항의식으로 대체시켰다. 과거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미지로 대변됐던 가치가 자본가의 것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랜드의 소설은 그냥 허구에 그치지 않고 이후 신자유주의를 이념 지표로 내세운 금융자본의 헤게모니 장악에 명분을 제공했다. 정치적 투쟁뿐만 아니라 미학적 투쟁에서도 보수는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조짐은 철학이나 문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대중문화에까지 확대됐다. 1980년대를 풍미한 '람보'라는 캐릭터는 실제로 좌파의 전유물이라고 할 게릴라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베트남전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온 반전 여론에 일대 반격을 가했다. 이런 방식을 보수의 역전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존 가치를 둘로 쪼개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구분한 뒤 전자를 취하고 후자를 무마시키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보수는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이런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위기를 넘어갔다. 부정적 박정희와 긍정적 박정희가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구사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서 독재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연좌제'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연좌제'라는 것이었다. 이 또한 기존 판단을 헷갈리게 만드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가치와 사실을 서로 겹쳐서 가치를 통해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보수의 반격은 기존에 강고해 보였던 보수와 진보의 구도를 뒤흔들어놓았고, 급기야 그 구분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보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궤멸했다. 특히 한국의 진보는 과거 '87년 체제'로 대표되는 가치에 집착한 나머지 보수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87년 체제'는 무엇이었던가? 이 체제의 가치는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명제로 상징할 수 있었다.


'87년 체제' 관성에 매몰된 진보

독재에 반하는 인민주권에 의한 공동의 정치 형태인 공화주의가 곧 '87년 체제'의 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 대해 평등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공화주의의 핵심이었고, 대통령 직선제는 이런 이념을 물질화한 제도였던 셈이다. 공화주의에서 언급하는 인민주권은 루소가 말하는 것처럼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일반의지는 공동이익밖에 염두에 두지 않지만 전체의지는 사적 이익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전체의지는 개별의지의 총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루소의 견해였다. 일반의지는 전체의지와 다르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이미 존재하는 정치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일반의지는 개별의지에서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을 감산하고 상쇄한 차이의 합계다. 알랭 바디우가 지적하듯이, 이런 일반의지의 문제야말로 오늘날 정치에서 핵심을 이룬다. 일반의지는 공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공백은 사회의 몫을 분배하는 감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요소다. 이 공백이 국가의 부분집합에 고정되지 않고 방황하기 시작할 때, 정치 상황이 발생하는 법이다. 이 공백의 방황을 붙잡아두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시민사회'의 개념일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제시하는 연대의 구성은 공화주의에 내재한 불안의 항구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민사회는 공화주의를 통해 구성된 국가의 불완전성을 채워주는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87년 체제'는 공화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확산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루소의 명제를 상기시킨다. 한국의 계급갈등은 평등주의를 사이에 두고 발생했다. 평등주의는 필연적으로 평등의 고원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어떤 평등 제도도 완전하게 평등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이 지적한 민주주의의 모순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실은 과두통치에 근거한 '귀족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플라톤의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통치자와 피치자를 동일한 것으로 상정한다는 역설을 내재한다. 민주주의가 확산될수록 만인이 통치하고 만인이 그 통치의 대상이 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자기모순을 내장하고 있는 셈인데, 보수는 이런 민주주의의 역설을 이용해서 민주주의 무용론을 곧잘 주장해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야말로 국가를 재구성하고 정치를 복원시켜서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념이 없다면 사실상 국가는 변할 수 없다. 한국의 '87년 체제'는 이 사실을 적실하게 보여줬다. 2008년 촛불은 '87년 체제'의 이념이 발현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이념의 귀환을 '소극'으로 판단한 이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 촛불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공화주의의 실체를 보여준 중요한 계기였다. '87년 체제'가 확산시킨 평등주의는 독재로부터 자본을 해방시켜서 시장주의를 확산시켰다. 이 평등주의 이념은 시민사회의 연대에 대한 요청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비자민주주의'로 전환됐다. 평등은 곧 동일한 상품을 공평하게 구매할 수 있는 권리로 바뀌었다. 최근 불거진 음원 종량제 논쟁에서도 소비자민주주의는 여지없이 등장한다.

음원권리자, 다시 말해 창작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자는 취지로 논의된 음원 종량제에 대한 어떤 기사에서 한 '소비자'는 지나치게 이 논의가 창작자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음원을 창작하는 이를 위한 제도가 창작자의 이익만을 고려한 나머지 소비자의 이익에 무관심하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평한 소비'를 평등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소비자민주주의라는 이념이다.

평등주의가 만들어내는 평등의 고원을 넓히자는 쪽이 진보였다면, 보수는 그것을 좁히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진보 역시 평등의 고원 자체를 없애는 근본적인 방법을 폐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것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진보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되었다. 진보 역시 평등의 고원을 없애자는 쪽이라기보다, 그것을 조금 넓혀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진입하게 만들자는 주장을 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진보가 궤멸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여기에 있었다. 2008년 촛불에서 진보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노래가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실제로 이 공화국의 요체는 '명박산성'으로 드러났다. '명박산성'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논란은 결국 거기에서 멈추었다. 국가는 호출되지 않았다. '87년 체제'의 공화주의가 제공한 불편한 진실이 '명박산성'에서 여지없이 폭로됐던 것이다. 공화주의가 요구한 저항은 그렇게 공화주의가 제공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외면으로 종결됐다. 말하자면 공화주의가 허락하는 인민주권의 주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누구도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진보의 궤멸과 보수의 진화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사회 합의를 통해 연대의식을 구성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민이 아닌 시민의 호출이 이 지점에서 필요했다. 그런데 '87년 체제'의 관성에 빠져 있던 진보는 여기에 적절하게 호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보수 언론이 당시 상황을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칭송하면서 시민의식의 성숙을 주문했다. 상황의 변화를 간파한 쪽은 진보라기보다 보수였다. 이 보수를 보통 '합리적 보수'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이 보여준 향후 행보는 진보의 자리를 점유하면서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표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의회제도는 일반의지를 국가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의회제도를 강화하는 선거는 공화주의의 불안을 관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보수가 의회제도에 근거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보는 의회제도로 재현될 수 없는 다른 정치가 있고,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제도의 한계를 확장시키려고 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제도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러한 태도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낳는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는 더 이상 정치적 기능을 할 수 없었다. 1980년대 반독재 투쟁 과정에서 성장했던 진보의 가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자신의 이념 기반을 상실했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와 마찬가지로 진보의 의제를 보수에게 넘겨버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에 회자된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정부'라는 표현은 시의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 세이무어가 지적하듯이, 블레어 정부는 진보의 의제를 보수의 것으로 만들었다. '혁신'이라는 말은 공공영역의 민영화를 의미했고, '성장발전'이라는 말은 기업을 위한 감세로 나타났다. 진보가 정권을 잡은 기간에 보수의 가치는 축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확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 진보의 가치와 대립적이던 요소를 대거 진보의 이름으로 도입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를 '재벌개혁'이라는 진보의 의제와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박근혜 정부의 장관 후보자로 지목됐다가 자진 철회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김종훈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에 관심 없던 자신이 정쟁에 휘말려 마녀사냥을 당하고, 그 결과 조국에 봉사하는 것에 회의를 느껴서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일하겠다는 결심을 포기했다는 주장은 그 뒤 이어지는 한국 재벌과 관료사회의 복지부동을 비판하는 내용과 쌍을 이룬다.

김종훈의 논리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의 파워엘리트가 자신의 조국에 대해 느끼는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념을 떠나서 한국의 파워엘리트는 고리타분한 사회 분위기에 대해 적대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김종훈을 진보라고 분류하기는 어렵다. 그는 보수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그가 한국에서 받은 느낌은 평소 진보가 한국의 보수에 대해 토해냈던 불만과 유사했다. 한국 사회에 대한 편견이 작동한 것이다. 이 편견은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를 뒤처진 것으로 보고,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입장에 기인한다.
                
2008년 촛불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한국의 진보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낡은 공화주의의 논리를 고집했다. 그러나 이 공화주의는 정작 '명박산성'이라는 합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로써 발본성을 상실한 진보의 이념은 촛불과 더불어 운명을 다했던 것이다. 촛불은 공화주의의 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민사회의 구성 내지는 복원을 요청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공화주의만으로 포괄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촛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요소가 복지 요구로 발전해 지난해 선거에서 표출됐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미 확인했듯이, 이런 요구를 발 빠르게 받아 안은 쪽은 진보라기보다 보수였다. 보수의 표상이던 새누리당은 무늬만 바꾸는 것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여하튼 변화를 모색했다. 그 결과 보수는 표심을 얻는 데 성공했고 효과적으로 의회제도를 방어했다. 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거의 모든 의제를 새누리당에 빼앗겼다. 그 이유를 민주당의 무능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가치의 전도 현상 때문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보의 의제가 보수의 것으로 전환돼버린 상황에서 선거의 승패는 누가 더 보수의 가치에 부합하는지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누가 진정한 보수주의를 표방할지가 관건이었다. 진보의 이념이 생명을 다한 조건에서 남은 문제는 보수의 가치를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미국처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새로운 가치로 부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87년 체제'의 잔재는 완강했고, 선거는 독재 대 민주, 또는 박정희 대 노무현이라는 거짓 대립으로 치러졌다. 당연히 잘못된 의제를 내세운 민주당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안철수, 한국 보수주의 분열의 상징

민주당은 더 이상 진보의 대표 정당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민주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보수주의의 분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진보와 보수라는 대립 구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단일한 보수주의였다. 냉전체제에서 만들어진 이 보수주의는 북한을 대항 테제로 삼아서 반공을 국시로 여겼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한국이 고립된 섬사회에서 세계체제로 편입되면서 이렇게 단순한 보수주의는 견뎌낼 수 없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전개된 시장주의의 확산은 민주주의 이념의 도입과 더불어서 보수주의 내부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국은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선진국에서 완성돼 있는 것을 도입해서 거기에 적응하는 것을 능력으로 인정해왔다. 전용 아이스링크장이 없다고 개탄했던 김연아가 승승장구하면서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야구선수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독창성이라기보다 적응성이다. 선진국 시스템에 어떻게 잘 적응하는지 여부가 관건인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영어 능력'인 것이다.

여하튼 이런 측면에서 한국은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이념과 무관하게 외부의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변화 방향은 본격적으로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보수의 가치도 새로운 체제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보수주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대선은 이명박 정부를 계승한 박근혜 정부가 집권했다기보다, 다른 보수가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막연하게 진보로 분류되는 현상이 실제로 보수의 분열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안철수 현상'은 한국 보수의 분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과거 19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의 커밍아웃을 연상시키는 보수의 커밍아웃이 지난 선거 기간에 두드러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줄까? 말할 것도 없이 보수의 분열이 가속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가 궤멸한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보수의 약진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의 출현이 한국의 보수에 유리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는 한국 보수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증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선된 뒤 보여준 내각 구성의 난항과 리더십 부재는 한국의 보수가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형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실제로 인민주권에 대한 공포를 항시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한국의 보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의 강조일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제도 확대'라는 의제는 바로 이런 보수의 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공약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작 새롭게 등장한 보수 정부는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복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박근혜 정부는 출범 한 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창조경제'라는 의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보수의 경쟁이 시작됐다

때늦은 종북 논쟁도 보수의 위기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화주의에 멈춰 있다는 점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순의 피해자가 되기 일쑤다. 민주주의 원칙은 우상파괴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문제 모두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가 제대로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려면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강조해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종북 논쟁은 결과적으로 공화주의 원리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종북 논쟁은 지금 한국의 보수가 추구해야 할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파괴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심판이라는 마녀사냥을 호출하게 된다.

종북 논쟁이 보수의 공화주의를 암시하는 것이라면, 진보의 공화주의는 지난 대선을 '패배'로 인식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실패한 혁명으로 선거 과정을 포장하는 정서적인 반응을 영화 <레미제라블>에 대한 동정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선거는 혁명이 아니며, 또한 <레미제라블>의 상황은 21세기 한국과 동떨어져 있다. 공화주의가 하나의 판타지로 작동하는 것을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통해 재차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또 다른 보수 정권의 출현이라기보다, 한국의 보수가 자기 한계에 도달한 완성의 순간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딸이 청와대로 돌아감으로써, 한국의 정치는 근대의 기원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보수의 뿌리 같은 것이 박정희이지만, 정작 박정희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파시스트였고, 시장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측면에서 박정희 체제의 계승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는 '불가능한 박정희'를 보여준다. 더 이상 효용성을 가질 수 없는 박정희를 확인시키는 것이 박근혜 정부다.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없이 유지될 수 없는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는 균형을 잃고 표류할 공산이 크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보수는 과거에 안정적이던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분열하게 될 것이다. 보수의 경쟁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진보의 자리를 점하고 있던 보수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을까 한다. 너도나도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새로운 브랜드를 내걸고 말이다. 물론 그 브랜드가 던지는 메시지는 '중도보수'일 테다. 중도보수는 쉽게 말하자면 기존 의회제도를 수렴할 수 없는 보수 정치를 의미한다. 한국 보수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까? 아직은 당분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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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계간 <미래와 희망> 편집위원. 저서로 <마녀 프레임> <임박한 파국> <당신들의 대통령> 등이 있다.


▒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5호] 2013년 4월 [공개분]
바로가기 http://www.ilemonde.com/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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