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디플로 읽기] 광주, 지금도 민주화의 성지인가?

오승용(전남대 정치학)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聖地)로 알려져 있다. 누가 최초로 명명했는지 알 수 없지만 광주가 '성지'라는 종교적 용어로 불리게 된 계기는 5·18 항쟁의 희생이 결정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성지란 종교의 발상지나 순교가 있는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광주는 정권과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권위주의 정권에는 민주적 정통성 부재의 증거로, 민주화운동 세력에게는 투쟁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고, 한국의 '진보'를 상징하는 도시로 호명되었다.

그렇지만 1980~90년대 광주가 한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의미, 2000~2010년대 광주가 한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달라졌고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권위주의 정권의 퇴장과 민주화의 진전으로 민주화 투쟁에 대한 대중적 갈망과 요구는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광주의 비중과 역할도 축소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광주의 위상 변화를 가져온 내적 요인이 있는데, 아마 5·18 항쟁의 제도화에 따른 다소 실망스러운 행태는 민주화의 성지로서 광주의 위상과 역할에 무시 못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5·18 항쟁 관련자들에겐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5·18 문제와 관련해 많은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었다. 국가는 5·18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모두 6차례에 걸쳐 관련자들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 또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후 국립묘지 승격과 국가유공자 지정까지 국가가 국가폭력의 희생자에게 제도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치가 취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세포분열같이 5·18 항쟁의 제도화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와 광주시민, 광주와 타 지역의 분리를 가져왔다. 집단보상이 아닌 개별보상과 관 주도의 기념사업을 핵심으로 하는 5·18 항쟁의 제도화가 되면서,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가 곧 전두환·노태우 정권 반대투쟁과 동일시되던 1980~90년대 민주화운동 등식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었다.

또한 5·18 항쟁의 제도화는 홀로코스트 피해 보상 과정에서 나타나던 폐해를 재현시켰다. 가해자인 국가에 자신의 피해를 더 많이 인정받기 위한 이른바 '피해자 간의 경쟁'이 나타났다. 보상받은 자와 보상받지 못한 자, 많이 보상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생겨난 장벽과 거리감은 항쟁 관련자 간 분열은 물론, 5월운동 과정에서 하나던 5·18 항쟁 참여자와 광주시민, 광주와 타 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을 분리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도화 이후 5·18 단체의 퇴행적 행보는 모두가 지켜본 바와 같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민주화 이후 광주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토론해보는 시간은 필요하다. 야권 후보의 대선 패배 이후 집단적 좌절감을 경험하고 나서, 5·18 민주화운동 33주년을 맞이한 지금이 토론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인 것 같다. 더욱 진전된 토론을 위해 먼저 오늘의 광주가 처한 현실과 문제점을 거칠게 정리해본다.


지역주의와 적대적 상호의존?

오늘의 광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역주의의 폐해다. 일반적으로 광주는 지역주의의 피해자로 종종 인식된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다. 지역주의는 호남과 비호남의 기득권 세력을 강화하고 옹호하는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를 만들어다. 영남과 호남의 정치독점 세력에게 지역주의는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지역 균열을 통해 이익을 보는 세력(특히 정치인, 관료)은 단지 호남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호남 안에도 존재한다.

기득권 수호를 매개로 한 정치세력의 '신성동맹'은 여전히 불가침의 영역이다. 지역주의의 대표적 기생세력은 지역주의를 호명함으로써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영역을 지배하는 토착 정치세력이다. 호남인은 가장 선진적이고 개혁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앞선 정치적 선택을 해왔지만, 호남의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은 지역주의에 기대 사적 이익을 실현해왔다.

그 결과 'DJ 이후' 호남의 정치인들은 선수(選數)가 쌓이면 쌓일수록 중앙정치의 중심인물로 성장하기보다는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되는 일이 반복돼왔다. 지역주의 프레임은 호남의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성장을 위한 혁신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퇴화를 촉진했다. 아무리 혁신적인 새로운 인물을 수혈해도 결국 4년, 8년 후 똑같은 악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은 결국 지역주의 프레임이 만든 온실 효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적으로 호남과 호남정치가 내재하는 현재의 문제들은 지역주의 프레임에 상당 부분 연유해 있고, 기득권 수호를 매개로 한 지역주의 신성동맹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호남정치의 고질적 문제는 극복할 수 없다.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선거구제 개혁을 많이 이야기한다. 이는 근본 해결책은 아니지만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라고 본다. 게임의 룰을 바꾸면 패권적 기득권 구조에 작은 파열은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고령화와 의제 설정 능력의 실종

인구의 고령화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광주(전남) 지역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비수도권 지역에도 아마 비슷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의 고령화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1960년대 이후 지역사회의 의제 설정을 주도해온 활동가들의 연령이 실제로 고령화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역의 의제 설정을 여전히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지역사회의 의제 설정을 주도할 청·장년 그룹은 아직 성장하지 않았다. 시민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또 다른 측면은 의제의 노후화이다. 노령화된 시민사회는 화석화된 1970~80년대식 사고를 2010년대에 적용하려 한다.

사회가 변하고 환경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1970~80년대 사회를 바라보던 시각으로 현재의 문제를 바라봄으로써, 민주-반민주구도에 입각한 낡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천 방식도 구태의연하다. 시민사회의 고령화로 인한 새로운 의제 설정 능력의 실종은 자연스럽게 수도권에서 형성된 의제를 뒤따라가는 의제추종주의를 만들어냈다. 정치적 투쟁과 운동, 정치적 선택에서 대중의 집단적 지혜를 이끌어야 할 광주 지역 활동가들의 의제 설정 능력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퇴보했다.

중요한 정치 국면에서 지역사회의 의견을 모아내고,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데 무기력할 때가 많다. 시민사회 단체의 탈학습 조직화와 렌트(Rent) 추구적 활동 방식도 이유가 되지만, 이런 무기력한 모습의 원인은 다른 지역보다 유독 고령화된 시민사회 운동의 고령화와 세대 교체 실패에서 기인하며, 그로 인한 의제 노후화가 문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호남정치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전략적 선택'이다. 얼핏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일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패배적 언어에 가깝다.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우선 정치공학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중앙권력의 쟁탈을 놓고 벌어지는 소용돌이의 정치에서 독자적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집단이 선택하는 일종의 균형전략(Balancing)이란 사실은 감출 수 없다.

조금 과도하게 이야기하면, 당선 가능성이 높은 비호남 후보(특히 영남 후보)에 대한 호남의 전략적 선택은 호남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한계를 정치공학적으로 해결하려는 호남인의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지만 전략적 선택의 이면에 똬리를 튼 자기 패배 의식은 문제다. 전략적 선택의 제1 전제는 호남인 스스로 '호남 출신은 안 된다'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이후 더 이상 호남 출신은 대통령이 될 수 없거나 되기 힘들다는 인식은 급기야 호남 출신 정치인은 '2등 정치인'이라는 왜곡된 시선을 호남에서 만들어냈다. 스스로 뛰어난 정치인을 만들어내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지역의 정치인과 시민사회 인사들은 19대 총선에서는 후보가 좋아서가 아니라 야권단일화를 위해, 18대 대선에서는 문재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권 교체를 위해 후보자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진보적 선택이라는 역설이 가능한가', '그런 선택을 앞장서서 요구한 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선호와 선택의 괴리, 그로 인한 지역민의 정신적 충격과 트라우마에 책임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호남인의 전략적 투표를 진보적 투표 행태로 간주하거나 진보를 위해 전략적 투표를 강요하는 것이 호남과 호남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소용돌이의 정치, 후진적인 지방정치

한때 한국 정치에 대한 탁견을 지닌 분석가에서 지금은 문화재 편법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인을 세상에서 가장 야심적인 국민이라고 평가했다. 모두 위로만 올라가려는 욕망을 갖고 돌진하고, 그래서 한국 정치는 언제나 소용돌이치고 격동한다고 했다. 그런 욕망은 오랫동안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심각한 차별을 경험한 지역에서는 더 강렬할 수밖에 없다. 중앙정치를 향한 열망은 대통령 권력의 향방을 둘러싼 강력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지난 18대 대선처럼 소용돌이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지역의 사고와 행동이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되면서 소용돌이의 크기는 커진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 대한 90%의 지지는 소용돌이의 정치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중앙정치를 향한 소용돌이가 강하면 강할수록 지방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방치 역시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진보주의자 시각에서 보면 중앙정치에 대한 호남의 선택과 열망은 확실히 타 지역보다 강렬하고 결집되어 있으며, 언제나 새누리당에 반대하는 압도적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호남인의 삶과 직결된 지방자치와 지방정치에는 놀랄 정도로 무관심하거나 관용적이며, 진보주의자의 시각에서 봤을 때 퇴행적이기까지 하다.

광주시는 총인시설(오염물 저감 시설) 비리, 갬코(GAMCO) 스캔들로 휘청거렸고, 전남은 F1(포뮬러원) 경기로 수천억 원의 빚을 감당해야 한다. 전남의 한 군에서는 부부 군수, 형제 군수가 번갈아가며 지방자치를 황폐화했고, 인접 시에서는 국회의원과 시장은 물론 지방의회까지 재·보궐 선거를 치를지 모를 상황에 처해 있다. 5월 한 달 동안 광주·전남에서는 33건의 지역축제가 열리는데, 재정자립도가 전국 최하위권인 광주·전남 지역의 지방자치단체는 축제와 이벤트, 공연 등의 과시 정치로 운영되고 있다.

인류학자 클리퍼드 거츠의 '극장국가' 개념에 빗대 표현하면 가히 '극장 자치단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극장 체제를 운영하는 비용은 전부 주민에게 전가된다. 이에 대한 어떠한 생산적 대안과 건설적 비판 세력도 바로 서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관심이나 의식 또한 과시 행정·정치에 편입되어 이런 문제에 둔감하다.

모든 것은 대통령 권력만 장악하면 해결된다는 '중앙정치 결정론'과 그 결과물인 '주변화된 지방자치'는, 무엇보다도 지역의 지방자치를 황폐화하는 요인이다. 지방자치가 정치의 배후지가 아니라 중심지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없는 한 지방자치를 통한 새로운 대안과 지역의 활로 모색은 요원하다. 지방자치가 지역의 미래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 못해 더욱 위험한!

호남과 호남정치는 위기다. 정부의 지역개발 정책에서 밀려서 위기가 아니다. 재정 자립도나 국비 확보가 부족해서만도 아니다. 이미 호남과 호남정치를 지배한 낡은 패러다임은 무너졌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것이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세력도 나타나기 힘들기 때문에 더 위기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과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두렵다.

이제 중앙권력을 통해 광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각과 태도를 버려야 한다. 광주 내부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광주가 가진 정치적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앙정치보다 지방자치의 강화와 민주성 강화에 눈을 돌리고 힘을 쏟아야 할 때다. 중앙정치의 소용돌이에 모든 것을 걸고 휩쓸려버리는 모습은 광주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글 / 오승용 전남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상임연구원, 서울대 규장각 선임연구원 역임. 현재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6호] 2013년 5월 [공개분]
바로가기 http://www.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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