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뮌영상] 황선길의 인문사회학교실 "우리 안의 파시즘" (1강)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현재적 의미

4일 저녁 복합문화공간293에서 열린 황선길 선생의 인문사회학 교실. 동영상 강의와 함께 그가 번역한 라이히의 책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소개한다.
우리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우익 파시즘과 운동진영에 배회하는 붉은 파시즘의 발호를 이론적으로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파시즘의 대중심리
<저자 빌헬름 라이히 | 역자 황선길 | 출판사 그린비>

파시즘은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반응의 총체이다

이 책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독일이 파시즘의 광기에 본격적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던 1933년 처음 발간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전세계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출간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이 이렇게 널리 읽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라이히의 질문, “대중들은 어째서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며 대답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말은 라이히가 개탄해마지 않았던 이런 상황이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빈번히 재현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라이히가 염두에 둔 ‘억압’은 히틀러로 대변되는 독일 파시즘(즉, 나치즘)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억압’을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파시즘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파시즘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회집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이상’을 조직하여 대표하는 ‘정당’으로 여겨졌다. …… (그러나) 파시즘은 권위적인 기계문명과 이 문명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의 억압을 받은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감정적 태도이다. …… 순수한 형태의 파시즘은 평범한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반응이 모인 것이다(본문 12~13쪽/강조는 라이히).

따라서 우리는 라이히가 제기한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대중들은 어째서 자신에게 해가 되는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을 욕망하는가?” 또는 라이히가 말하는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생관’이 비합리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을 이렇게 좀더 간단히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대중들은 스스로 비합리성을 욕망하는가?” 그렇다면 라이히는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가.


1) 파시즘은 대중들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된다

라이히는 히틀러에 대한 맹신으로 상징되는 당대의 비합리성을 대중들이 스스로 욕망하게 된 이유를 제일 먼저 지도자의 성격구조와 대중들의 성격구조 사이의 상동성(相同性)에서 찾는다. 대중들은 무지하거나 환상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지도자, 즉 히틀러의 성격구조와 동일한 성격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기꺼이 속은 것이라는 것이다.
라이히가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분석하며 도출해낸 성격구조의 특성은 권위에 대한 반항과 수용·복종이 동시에 얽혀 있는 태도이다. 이것은 당시 독일 중산계층(소시민계층)의 전형적인 성격구조로서, 지도자와 대중들 양자가 이런 성격구조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자연스럽게 속고 속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으로 상징되던 당시 좌파의 주장과 대조해 보면 우리는 라이히의 주장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를 더욱 잘 알 수 있다. 기존 좌파처럼 개인의 존재조건에 입각해 대중들의 행위를 설명(“개인의 경제적 조건이 개인의 이데올로기를 규정한다”)하게 되면, 개인에서부터 출발해 대중들을 설명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라이히처럼 성격구조의 상동성으로 대중들의 행위를 설명하게 되면, 대중들의 성격구조를 ‘항상-이미’ 포함하고 있는 개인의 성격구조를 문제삼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기존 좌파의 설명방식을 따르면 히틀러의 성공은 개인의 존재조건에 반(反)하는 ‘대중들의 모순적 행위’로 설명되거나, 히틀러라는 개인이 대중들에게 끼친 ‘일방적 영향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기존 좌파들이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의 무지와 환상을 한탄하고 히틀러의 정신이상 운운하며 당면 문제 앞에서 허둥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와 달리 라이히는 성격구조의 상동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시즘은 대중들에 의해 탄생되고 대변된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사실, 히틀러라는 한 개인이 수천만 대중들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기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게다가 이런 주장은 혁명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해버린다는 점에서 오히려 나치즘보다 더 반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히틀러가 대중들을 속였다기보다는 대중들이 히틀러를 승인했다고, 즉,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적이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성격구조를 갖고 있었던 대중들이 히틀러를 승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히틀러가 원했던 대중조직화의 성공은 히틀러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달려 있었다. …… 히틀러를 이해할 때 중요한 점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그가 대중들로부터 부여받은 의미인 것이다”(79쪽).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히틀러와 대중들이 공유했던 성격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면밀히 추적하는 것이다.


2) 성의 억압이 비합리성의 원천이다

라이히는 히틀러와 대중들이 공유했던 성격구조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가족 이데올로기, 인종이론으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적 국가, 그리고 앞의 양자에 공통되는 성의 억압경향에 주목한다. 라이히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질서는 ‘대중들에 대한 지배’라는 자신의 주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성격구조를 그 사회의 구성원인 대중들 속에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과정은 각 개인의 생후 4~5년 동안 권위주의적 가족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다. 나치즘이 지배한 제3제국 같은 민족주의적 국가가 권위주의적 가족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족주의적 국가는 ‘가족의 유대’라는 권위주의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민족/인종의 유대’라는 이데올로기로 전이시킴으로써 이 과정을 연장시킨다. 라이히는 파시즘의 인종이론을 분석하면서 이것을 설명한다. 히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아리아 인종은 세계의 지배인종이다. 그런데 모든 지배인종은 다른 열등한 인종과의 혈통혼합으로 몰락해 왔기 때문에 나치당은 아리아 인종의 인종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을 가장 큰 의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등한 인종과의 투쟁은 불가피한 일이며, 이 투쟁을 이끌며 아리아 인종을 보호할 지도자는 ‘민족의 화신’이다.
라이히는 이와 같은 주장이 대중들에게 ‘더 큰 가족’으로서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고 말한다. 엄격하지만 보호를 제공하는 지도자상은 권위주의적 가족의 아버지상과 얼마나 가까운가! 이처럼 민족의 유대라는 이데올로기는 권위주의적인 소규모 국가, 즉 가족을 통과해 형성된 대중들의 수동적이고 복종하는 성격구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매개체가 된다.

특히 라이히의 주장을 더욱 파격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가 권위주의적 가족과 민족주의적 국가의 공통점을 성의 억압경향에 찾는다는 데 있다. 권위주의적 가족이 생동적이고 자유로운 모든 성적 충동(자위)을 인위적으로 금지(거세 공포)시켜 어린이를 불안하게 하고 수줍음 타게 만들며 권위를 두려워하고 복종하도록 만들듯이, 민족주의적 국가는 혈통의 보존이라는 미명 아래 성적 순수성을 강요하고 타 인종의 성적 능력을 과장함으로써 대중들이 성을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라이히의 주장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성에 대한 도덕적 억압은 일반적인 사고까지 억압하고 비판능력까지 무력화시킨다.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67쪽). 따라서 라이히는 지도자와 대중들이 공유하는 성격구조, 즉 권위에 대한 반항과 수용 복종이 혼재해 있는 태도를 변혁하려면 자연스러운 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동민주주의를 통한 파시스트적 성격구조의 극복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적 억압을 극복해 파시즘을 욕망하게 된 대중들의 성격구조를 바로잡고 비합리성을 원천적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 라이히가 제시하는 대안은 생체적인 욕구와 노동이 어긋나지 않는 노동형태인 ‘자연스러운 노동민주주의의’의 확립이다. 라이히는 강제적 노동, 즉 생체적 욕구에 적대적인 노동이 존재하는 한, 비합리적 성격구조를 뿌리뽑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라이히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들을 자신이 행하는 노동의 생산물과 동떨어지게 만든다(‘노동으로부터의 소외’).
그러므로 노동은 즐거움이 결여된 귀찮은 것이 되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강제적 작업형태로 변해버리고, 결국에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생물학적 쾌락욕구와는 반대되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은 노동이 생물학적으로 비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 달리, 즐거움에 근거해 수행되는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과 노동의 적대를 자연스럽게 지양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활동 욕구가 최대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며, 자연스러운 성욕구를 해방시켜줌으로써 경직된 성격구조의 형성을 방지해 준다. 요컨대 생물학적 활동 욕구가 충족되고 발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을 설계해, 성적 에너지를 노동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승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노동민주주의이다. 라이히는 소련이 볼셰비키 혁명의 근본 목표였던 ‘국가의 소멸’이라는 과제를 포기하고, 결국 스탈린 독재체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강제적 노동에서 찾는다.
혁명 초기에 볼 수 있었던 노동민주주의의 단초(젊은이들에 대한 포괄적 직업교육, 작업장의 자주관리 등)가 사라지고, 급격한 산업화를 위해 강제된 노동과 그 강제성을 은폐하기 위해 급조된 노동의 신성화와 성과주의 등이 자연스러운 성적 에너지의 승화를 가로막아 소련 대중들의 성격구조를 비합리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왜 다시 『파시즘의 대중심리』인가?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1930년대의 파시즘, 노동자운동의 스탈린화, 정신분석가들의 보수주의에 대항해 ‘삼중의 투쟁’을 외로이 수행했던 한 과학자가 남긴 지적 유산이다. 그러나 흔히 ‘프로이트-맑스주의’라고 명명되는 라이히의 이 지적 유산은 라이히 본인이 프로이트주의 때문에 독일공산당에서 축출되고, 볼셰비즘 때문에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제명된 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를 거쳐 힘들게 도착한 미국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음으로써 한동안 잊혀져 왔다.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은 최근의 혁명, 즉 프랑스 68년 혁명에 의해서이다. 드골의 권위주의적 체제가 복귀함으로써 68년 혁명이 급격히 퇴조한 뒤, 많은 사람들이 68년 혁명의 실패를 라이히의 문제의식에 근거해 설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다(최근 국내에서 각광받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 『앙띠 오이디푸스』도 이런 시도 중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본격적으로 제 대접을 받게 된 것은 68년 혁명 이후 10여 년이 흐른 1980년대부터이다. 유럽(특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 불어닥친 또 다른 파시즘, 즉 극우 정당들의 부상이 이때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보다는 폭력과 독재를 선호하고, 이민자들과 소수집단 또는 유색인종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극우 정당들이 각종 선거에서 대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 것(일례로 2002년 치러진 프랑스의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르펭의 민족전선은 1위를 차지했고, 오스트리아 총선에서는 극우 정당인 하이더의 자유당이 2위를 차지했다)은 기존 정당들의 무능력이나 부패, 그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다. 비록 유럽과 달리 정치운동의 형태로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라이히가 말하는 파시즘이 정치운동으로서의 파시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번 황우석 사태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빈번이 분출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반응(최근 사례로는 강정구 교수사건이 있다)은 멀리는 독일 제3제국, 가깝게는 최근의 유럽 대중들이 보여주는 비합리적 반응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대중들은 어째서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는 문제제기 아래 국가라는 거시적 구조와 인간의 성격구조라는 미시적 구조를 함께 고민하려 한 라이히의 문제의식은 사회 곳곳에 도사린 ‘일상적 파시즘’, 더 나아가 독재에 대한 대중들의 동의/합의를 문제삼는 ‘대중독재론’이 폭넓게 논의되고 있는 최근 국내 학계의 문제의식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번에 소개되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빌헬름라이히유아신탁재단>이 제공한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를 직접 완역한 최초의 것이다. 라이히의 독일어 수고는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완곡하게 표현된 채 발표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판본들과는 달리, 라이히의 원래 표현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게다가 본문에 수록된 총 29개의 도판과 도판관련 설명, 그리고 기존의 그 어떤 판본들보다 꼼꼼한 각주 등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엿볼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라이히가 본문에서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넘어갔던 당대의 여러 인물과 사건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붐으로써 라이히의 문제제기를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 말미에서 “노동하는 인민대중들은 정치가들의 어깨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어깨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대중들, 바로 이런 대중들만이 파시즘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지금 여기의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황선길
독일 브뤠멘대 경제학 박사, 성공회대 인천대 외래강사, <역서> 로자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판네쿡의 '노동자평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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