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칼럼] 역사의 진보는 식욕과 성욕의 고른 충족과 인권의 고른 보장에서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학자로 유명한 E. H. 카는 그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본질상 변화요, 운동이요, 진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보'는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가설'이라는 애매모호한 사족을 달았다. 미래의 진보(또는 발전)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다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인 것 같다.

역사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이들은 카 말고도 많다. 아니, 대중에게 사랑받은 사상가들은 대개 역사의 발전가능성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데카르트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고 헤겔이 그랬다. 볼테르나 테야르 드 샤르뎅, 베르그송 같은 이상주의자나 계몽주의자들 역시 인간 이성에 의한 역사의 발전을 확신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고 미래를 암담하게 바라본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함께 20세기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인류 문명의 장래를 어둡게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만성적 정신질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양식이 편의롭게 변화된다고 해도, 인간은 언제나 도덕적 초자아와 동물적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며 사도마조히스틱(sado-masochistic)한 피, 가학적 행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좌파에 속하는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도 인간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다. 그의 대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히틀러의 독재를 불러일으킨 독일 국민들의 집단적 마조히즘 심리를 해부하고 있다. 인간은 '진정한 자유의 확보'를 발전의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언제나 자유를 두려워하며 피학의 상태에서 안존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인류가 성인으로 떠받들고 잇는 예수나 석가도 인간 또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자기가 죽은 뒤 곧바로 말세가 닥쳐오리라 예언했고, 석가도 불법이 쇠하는 말법세계가 닥쳐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 후세의 종교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민중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려고 애썼는데, 그 결과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심판 뒤에 오는 구세주의 재림과 하늘나라의 도래'가, 불교에서는 '미륵불의 강림에 의한 인류의 구원'이 교리로 성립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최후의 심판'이나 '말법세계의 도래' 같은 종말론적 역사관이 예수나 석가 사상의 핵심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들은 힘을 가진 자들이 민중들에게 자행하는 끊임없는 수탈과 인권유린이 그저 슬프고 짜증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당시의 지배 엘리트였던 바리새파 종교지도자들을 이를 부득부득 갈며 미워했던 것이고, 석가는 전제 군주가 될 수도 있는 자신의 신분을 과감히 내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역사의 진보 또는 발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낙관주의적 사상가들은 대개 귀족 신분이거나 기득권 엘리트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프로이트가 부정적 역사관을 가졌던 것은 그가 소외받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이고 에리히 프롬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성에 의한 역사발전을 믿었던 헤겔은 살아 생전의 명예와 지위를 누릴대로 누렸던 운 좋은 사람이었고, 헤겔과는 반대로 염세적인 인생관과 부정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한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교수로 출세하는 데도 실패했던 국외자였다.

마르크스는 다소 예외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소망하던 교수 자리도 못 얻고 평생을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본주의의 당연한 붕괴에 따른 공산주의 낙원의 도래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부정적 인간관에서 그의 유토피아니즘을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 '자본가들에 대한 미칠듯한 적개심'이 없었다면 그의 사상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특히 교회도 많고 절도 많고 유사종교도 많다. 그리고 점술가들이 유난히 활개치며 주요 일간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적 종교들은 대개 다 말세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데, '민심이  천심‘이라고 볼 때 이런 현상을 그저 ’합리적 지성의 미숙‘에서 오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넘겨버릴 수만은 없다. 이런 현상의 진짜 원인은 아직도 우리나라엔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나 가렴주구가 많고, 법을 빙자한 자유권의 침해 역시 많기 때문인 것이다.
    
역사는 물론 발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문화나 이념의 진보를 이룩한다는 구실로 민중들을 끊임없이 희생시킨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였다. 피라미드의 장려한 건축미보다 피라미드를 짓다 죽어간 노예들의 억울한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역사는 발전할 수 있다.  식욕과 성욕의 고른 충족과 인권의 고른 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의 진보를 말할 수 있다.


(마광수 저 <인간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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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권뉴스는 ‘성性인권운동/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 중입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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