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평론] 아버지 없는 사회, 그리고 임금노예 노동자

한 가정에서 딸아이의 의문이 실린 일기장이 기사화 된 적이 있다.
“엄마! 아빠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 용돈은 엄마가 주고, 먹을 건 냉장고에 있는데 말이야~”

아빠가 아이한테 유일하게 아빠노릇 할 수 있는 휴일조차 방구석에서 잠만 청했거나 아니면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출근했던 모양이다. 잔업·특근으로 노동에 지친 아빠는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한 잃어버린 시간의 대가를 이렇게 혹독하게 치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요미 공주님(혹은 왕자님)에게 들어갈 돈 때문에, 그리고 가족을 꾸린 책임감으로 한갖 ‘돈 버는 기계’는 될 수 있어도 꼭 필요한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은 상실한 우리 이웃의 평범한 초상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부모님께는 힘을 보태야 한다는 효도에 대한 강박을 지녀야 했고,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일만 할 뿐 2세로부터 대접은커녕 어떤 기대도 접어야 하는 샌드위치 세대의 비극이라고나 할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핵가족 제도가 지닌 문제점에 대해 일찍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아버지 없는 사회’를 파시즘에 유리한 조건들로 규정했다. 이들은 아버지가 가정에서 주눅들어 사라지면서 그 권위를 파쇼국가가 대신한다고 본 것이다.

그 일원인 마르쿠제는 “아버지와 자녀 간의 강한 친화관계는 인격구조에서 초자아가 확실히 자리 잡을 때 생기는 자율성의 유일한 기초”라고 했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의 가부장제와 범주가 다른 논리이다.)

이와 관련, 아버지에 대한 자연스런 반항 경험에서 생기는 강한 초자아가 없는 개인은 외부적인 권위에 저항할 수 없기에 히틀러(와 황색언론 연예 스포츠 테크놀로지 자본) 같은 괴물들이 권력을 장악한 파쇼국가에 굴복하게 된다.

먼 나라 예가 아니다.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간에, 대다수 노동자들이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커녕 자본의 가공할 유혹인 돈만 쳐다보고 ‘임금노예’로 자족하는 바로 이 사회에 던지는 엄중한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오늘도 TV드라마에는 ‘오야오야’ 하는 딸바보 아빠들과, 눈꼬리 치켜 뜬 여성에게 연신 '미안해' 남발하며 조아리는 꽃미남들이 득실거린다. 아내는 애들에게 "아빠! 돈 많이 벌어오세요"라고 시키고.. 문화?상품으로 노동자들을 ‘거세’ 시키는 데 상당부분 성공하고 있는 자본의 영악함에 기가 질린다.

물론, 노동자들이 “나는 스파르타쿠스는 싫어, 그냥 노예가 좋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대신 “아빠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라는 아이들의 힐난은 기꺼이 긍정해야 하고, ‘돈 버는 기계’로서 용도가 폐기되는 지점의 ‘황혼 이혼’도 그리고 '고독사(孤獨死)'도 묵묵히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상대로 투쟁하는 노동자끼리 만나거나 일정 정도 사회적 역할을 분담하는 가족을 이루면 꽤 괜찮은 그림이 나온다. 촘촘히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도 그런 공동체적인 삶을 일구는 이들이 제법 있지 않은가.


최덕효 (인권뉴스 대표)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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