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칼럼] 야(野)한 문화가 필요하다

온통 보수일색, 그 서슬 퍼렇던 진보세력은 다들 어디에

함석헌은「들사람 얼」이라는 글에서, 역사에 자취를 남긴 들사람(野人)의 예로 소부(巢父), 허유(許由), 장자(莊子), 디오게네스, 김시습(金時習) 같은 이들을 든다. 소부와 허유는 요(堯)임금의 소싯적 친구들인데, 요가 정치에 뜻을 품고 임금이 되자 그를 비웃는다. 그래서 요가 그들더러 자기를 도와 정치 일선에 나서달라고 부탁하자, “에이, 더러운 말 들었군” 하며 귀를 물에 씻었다는 것이다.

장자 역시 정치와 기성문화를 경멸하여 평생을 야인으로 지낸 사람이다. 그는 유위(有爲)보다 무위(無爲)에서 진리를 찾았고 겉치레적인 예(禮)와 도덕을 비웃었다. 그래서 공자 같은 인물은 장자에게 건방진 시혜의식(施惠意識)으로 똘똘 뭉친 위선덩어리로만 보였다. 디오게네스는 그리스의 거지 철학자로 이름난 인물.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햇볕을 가리고 섰지 말고 좀 비켜달라”고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사람이다.

김시습을 예로 든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되는데, 순수하게 비정치적이고 반(反)문화적인 야인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자라다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 되어 초야에 묻힌다. 그러니까 그는 유교적 충효사상에 충실했던 인물이지 정치나 권력 자체를 우습게 본 초탈자(超脫者)는 못 된다. 이 점에 있어 함석헌은 야인(野人)과 야당인(野黨人)을 혼동했던 것 같다. 야인이란 글자 그대로 ‘야한 본성에 솔직한 인물’이요, 야당인이란 단지 권력을 잡지 못해 투덜거리는 사람일 뿐 반문화적 기인(奇人)은 못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함석헌은 역사가 들사람들에 의해 꾸려져 왔다고 주장한다. 겉보기엔 지배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문화인들, 즉 점잖은 엘리트들에 의해 역사가 이끌려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문화적 기인 또는 아웃사이더들이 역사의 이면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말은 맞다. 역사를 정치사로만 파악하지 않을 경우, 인류의 진보엔 문화적인 삶을 산 사람들보다는 반무화적인 삶을 산 사람들, 즉 당대엔 괴짜나 기인이요 아웃사이더로 간주됐던 사람들이 더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꼭 순수한 아웃사이더가 아니더라도, 김시습같이 의리 있는 은둔자들 역시 소중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적어도 ‘정치적 눈치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물이 음양의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이끌려가듯이, 인간사회의 안정된 발전은 지배 엘리트와 야인, 문화와 반문화, 보수와 진보, 정신주의와 육체주의 등의 조화로운 상보작용(相補作用)에 의해 이루어진다. 점잔을 빼는 도덕주의자만 설쳐서는 안 되고, 솔직한 쾌락주의자도 활동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관변단체만 설치면 안 되고, 재야단체도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보수세력 대 진보세력의 형평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한다.

중국철학사를 보면 어느 시대에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대립한다. 유가가 주장하는 것이 이성적 삶이나 문화적 삶이라면 도가가 주장하는 것은 본능적 삶이나 반문화적 삶이다. 미국이 양당제도를 확립하여 대통령책임제를 독재의 위험으로부터 구했듯이, 중국철학사 역시 유가와 도가의 대립이 있어 문화독재의 위험성을 막았다. 장자나 양주(楊朱) 같은 기인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요, 진보세력이 무조건 적대시되지 않는 정치가 좋은 정치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 정치계나 문화계를 보면 온통 보수 일색이다. 여당도 보수요, 야당도 보수다. 그 서슬 퍼렇던 진보세력은 다들 어디로 가버렸는지 자취가 희미하다. 다들 ‘호랑이굴’로 들어가려고만 하지, 호랑이를 무시하거나 초연해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호랑이의 말단 비서관이라도 돼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상당수 ‘진보 성향의 인사’들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문화계도 마찬가지다. 서슬 퍼렇던 진보적 이념문학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온통 보수적 서정주의 일색이다. 기인은 용납받지 못하고, 이렇다 할 괴짜도 없다. 다들 품위와 절제만 따지고, 거친 도전이나 실험성은 조악하다고 놀림을 당한다.

진짜 ‘들사람’이나 ‘반문화인’이 되기는 사실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야한 기질’을 가진 엉뚱한 반골들이 보수나 수구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치졸한 투정이나 반항이라 할지라도 너그럽게 용납받는 사회, 아웃사이더적이고 반문화적인 삶이라 할지라도 억압받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민주사회이다.  


마광수(연세대 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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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권뉴스는 ‘성해방운동’ 실천의 일환으로, 그동안 선진적인 성담론을 주장하다 보수수구세력은 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진보진영에게도 외면당한 채 제도 권력으로부터 고초를 겪은 바 있는 마광수 교수(홈페이지)와 '웹2.0'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세계관이 유교적 성문화에 침윤된 한국사회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진보적 성담론의 공론화로 변혁의 한 축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사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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