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록 에세이] ‘부유한’ 노동자? 생명의 옷

최형록(인문학자)

현대의 ‘왕회장’이 한줌 티끌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자신을 ‘부유한’ 노동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떤 이름 없는 노동자가 쓰레기더미 아래에서 시신이 뜯어 먹힌 채 발견되었다는 참담한 소식이 떠오른다.

권문세가는 술과 고기가 썩어나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다.
빈부와 귀천이 지척에서 다르니
이 슬픔 어찌 다 말로 하랴.
(기세춘・신영복 편역, 『중국역대시가선집』중에서)

당나라 현종의 실정(失政)에 대해서 755년 두보는 이렇게 슬픔을 읊었다. 천년이 넘는 시공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가 않다.

        

왕회장이 자신을 부유한 ‘노동자’라고 하는 것은 일제에 대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꾸역꾸역 토해냈던 조선일보가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정색하는 것처럼 정말 가소로운 일이다. 왕회장은 ‘부유한’ 노동자로서 통일운동가이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일이 옳은 것일까? 이런 평가의 저변에는 실용주의적 사고방식, 이런 사고방식의 인식론적 토대인 경험주의 혹은 실증주의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윤리성을 장신구 정도로 보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고 성취하려는 데에서 삶의 행복을 찾는 속물근성과 열등감이 있다.

‘바늘도둑’ 올챙이로부터 국가보안법을 소똥으로 뭉개버리면서 금의환향할 수 있는 재벌총수가 된 일대기가 왕회장의 이를 악다문 개인적 또순이 기질만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그가 수백, 수천의 ‘지적인 노예들’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 다만 그의 통찰력 덕분이었을까?

그가 일신의 부귀를 착실히 쌓아나가는 동안, ‘영원한 청년’ 전태일은 비인간적 계급사회를 불사르기 위한 ‘화형대’의 길을 택하였고 세계적 음악가가 된 윤이상은 ‘동베를린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후에도 비장(悲壯)한 광주민중항쟁에 ‘표본, 광주의 회상’을 헌정하였으나 끝내 몽매에도 잊지 못했던 고향 충무를 밟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왕회장의 목표를 향한 불타는 집념과 강력한 추진력 그리고 통찰력이 누구를 위한, 어떤 동기의 행위인가라는 것이다. 그의 통찰력은 ‘군부 파시즘’이라는 역사의 반동적 흐름에 편승해서 이른바 ‘정경유착’―국가권력이 자본가계급의 ‘도구’로서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의 통속적 표현―이라는 큰 거래를 잘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전쟁 이래 기본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남한 자본주의 세력의 광포함과 교활함을 사회적으로 전혀 견제하지 못하는 역사적 상황에 왕회장은 신민(臣民)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지배계급의 거물이 된 것이며 그 성공의 저변에는 비참하고 불안한 노동자들의 한(恨)이 깔려있는 것이다.

또 다른 ‘부유한’ 노동자들이 ‘진짜’ 노동자들의 꿈을 좌절시키며 성공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오늘날, 자신의 처지가 ‘노예적’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민중, 인텔리겐챠―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지식인과 달리 민중해방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회역사적 책임의식을 지닌 지성인들―가 보다 늘어나며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상호 관련된 복잡다단한 과제들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과제의 중심부에 들어가야 할 것, 보다 현명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우선 세 가지만 거론해 보자.

첫째, 계급투쟁을 포함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 악을 깨부수고 정의를 구현한다)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윤리’의 형성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얼마나 사람이 살만한 세상인가? ‘지옥’이 과연 사후에나 있는 것일까? 목사들의 65%가 교회의 세습을 찬성한다? 그들은 재산의 공공성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저항자라는 뜻인데 역사적으로 타락한 독단적 카톨릭에 저항하면서 생성된 개신교도들을 이렇게 불렀다)이며 세속적으로 패배한, 그러나 역사적으로 영원한 예수를 조롱하고 있음을 정말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의사와 약사들은 어떠한가? 어떤 병원의 경우, 진료기록부 8천장 거의 모두에서 허위청구가 드러나고 이런 결과로 이 병원의 보험급여 총액 가운데 55%에 달하는 8억 원이 착복된 것(『한겨레신문』, 2001년 3월 31일자)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PC방의 시간당 요금은 800~1000원 정도임에 비해서 쿠바의 경우 8천~1만원에 달하며 인터넷 접속에 통제가 심하다. 그러나 돈,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체제 때문에 교육과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하지는 않는다. 체 게바라가 ‘혁명적 의학에 관하여’에서 강조한 의사의 사회적 책임의식이 쿠바 의료체계의 중심지주인 것 같다. 테헤란 밸리와 대덕단지 등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책임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오만한 부정부패 행위와는 하늘-땅 차이가 나는 것이 쿠바의 생명과학자들의 성취이다. ‘쿠바의 의료혁명’이라고 불리는 쿠바 생명공학의 예를 잠시 보자.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인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이 서양인에 맞게 개발하고 있는 B형 뇌막염의 백신은 사실 10년도 넘는 이전에 쿠바에서 이미 발명된 것이다. 이 염증으로 매년 전 세계 5만 명의 어린이들이 생명을 잃어가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몇몇 병원에서 사용될 항암용 치료백신의 일종, 암 발생에 관련된 단백질(표피성장인자, Epidermis Growth Factor, EGF)과 면역체계가 싸울 수 있도록 자극해 주는 백신 역시 쿠바인들에 의해서 발견발명 되었다.

이런 의학적 성취는 혁명 권력의 지원과 생명과학자들의 열정의 과실이다. 한 세대를 훨씬 넘는 미 제국주의의 경제봉쇄 위에 소련의 붕괴와 함께 쿠바경제가 극심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과학단지(Polo Cientifico)에 대한 연구자금 지원은 계속되었다―‘조건반사’ 실험으로 유명한 소련의 파블로프는 내전 기에 자신에게 특별히 공급된 쇠고기를 자신의 실험에 썼다. 쿠바의 청년과학자들은 ‘24시간보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동안 연구할 것을 요구하는 카스트로의 관심에 부응했다(FINANCIAL TIMES 2001년 1월 13일자)고 한다.

삶의 일상적 조건이 ‘생지옥’처럼 된 것에는 민중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 부족과 정의로운 행동에의 용기부족 그리고 더욱 심각한 ‘배운 자들’의 ‘반 윤리성’, 사회적・역사적 책임의 망각이 기여한 바가 크다. 언론의 자유를 탐욕스러운 ‘영업의 자유’의 수단 정도로만 활용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중앙일보의 언론고시파의 죄과는 파시스트 군부만큼이나 크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새로운 윤리’, ‘생명의 존엄성’을 핵심으로 하는 윤리가 절박하게 된 역사적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1945년 8월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의 강제적 해체로 반민중적・반인륜적 친일・부일세력을 숙청하지 못한 실패에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제고를 위해서 현대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박정희 기념관의 건립 움직임, 서울대학교 경영대에서의 ‘정주영 학’ 개설 움직임, 제7차 교육개편안에 있는 근현대사의 선택과목화는 결국 친일매국행위의 호도(糊塗), 남한 자본가계급의 천하고 천하며 반인륜적 가치관의 정당화, 민중의 역사적 비판의식을 무디게 만들기, 즉 민중의 우민화를 겨냥하는 지극히 위험스런 움직임이다.

도대체 일본의 현대사 왜곡에―군위안부, 징병・징용 등―항의하는 판국에 근현대사 교육을 사실상 포기하는 교육 안은 어느 집단의 망상일까? 현대사 교육은 남한 노동자계급의 자연적・사회적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현재 극히 중요한 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교육내용에 있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전쟁’의 의미이다. 우리는 얼마나 그 참혹한 전쟁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생명의 존엄성’과 ‘국가권력의 정당성’ 그리고 ‘외세에 대한 자주성’에 관한 자각을 했을까?

셋째, 교육개혁은 경제개혁과 병행해야 할 중대 사안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도교육은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기제가 사회의 전 부문에서 심화되고 있기에 이런 접근은 절실하다. 부르주아 헤게모니가 확대되어가면서 이른바 지식기반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개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량해고와 함께 향후 필요한 ‘노동력의 충원에 합리적인’ 교육제도 개편을 동반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의 이윤추구에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분야는 방치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인식의 원리를 이루는 것이 기존의 미국식 실용주의와 기능주의에 반대해서 ‘생명존중의 윤리’와 비판적 사고력의 함양을 목표로 하는 교육원리이다. 미국의 ‘52번째 주’―조선일보가 찬양하는 국부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 대신에 이 안을 주장하기도 했다―에 가까운 남한의 현실, ‘교육열’의 성과가 무엇인가? 생명보기를 돌같이 보는 의사와 약사들, 법 실증주의의 주문(呪文)에 넋 잃은 것을 넘어서 악을 행하는 변호사, 판사, 검사들―정의의 최후 보루는 사법부가 결코 아니다.

정의의 최후 보루는 민중의 과감한 행동, 불의를 까부수는 행동임을 분명히 하자―등 이 ‘악의 공화국(恐’禍國)‘의 지배계급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대중이 아닌가? 헌법에 대한 각종 해석 그리고 민법조항과 그것에 관한 해석을 보면 한국의 법체계가 얼마나 반민주적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기막힌 현실을 방치하면서 특권을 누린 집단이 법조3륜이 아닌가?

따라서 제도교육의 개편을 ‘생명 중심’의 교육원리로 추구하는 한편 노동자교육에 있어서도 가정교육과 제도교육을 통해서 세뇌된 반민주적 반생명적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생명존중의 가치관과 변증법적 사고방식으로 전환시켜 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단체협약과 관련해서 임금문제를 생산성이나 물가와 관련해서 가르치되 이것이 부르주아적 개념임을 분명히 하며 임금문제는 잉여가치의 착취-피착취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정치투쟁의 문제임을 분명히 교육해야 한다.

‘영원한 청년’ 전태일이 고대했던 대학생 장기표씨는 왜 민국당에서 투표무효투쟁이나 하고 있을까? ‘칠성판’ 고문까지 겪은 김근태씨는 왜 ‘유신잔당’ 김종필을 운동의 선배 운운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인위(人爲)가 있다면, ‘어찌하여야 첨 마음을 변치 않고 끝끝내 거짓 없는 몸을 님에게 바칠고’하는 마음뿐입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생명의 옷까지도 벗겠습니다.

만해의 결의가 새롭지 않은가? 현실의 모순이 부단히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라면 민주화 운동 역시 부단히 자자손손 계속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현명한 희생’ 역시 부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장에서 미래를』제65호 2001월 4월호 233*2

본지는 재야 인문학자 최형록 선생의  철학, 역사, 과학, 정치에 관한 세계관을 접할 수 있는 에세이를 매주 토요일 시리즈로 싣는다. 최 선생은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민중당 국제협력국장, 사민청 지도위원, 진보평론 편집위원을 지낸 바 있다. 저서: 이 야만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꿈나무를 키워나간다, 영역: 모든 노동자의 건강할 권리를 위하여.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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