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28세상’이란 칼럼에 한 가지 대의를 붙여 보자면 대강 이렇다. 청소년 문화를 다뤘던 전작 18세상(2014)을 내고 나니 일종의 헛헛함이 찾아왔다. 물론 더 잘 쓰지 못했다는 자기 책망이 제일 컸지만, 그래도 모든 글이 후회막심이기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겨우 다독였다. 문제는 지금 세상이 어디 청소년한테만 18세상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헬조선, 지옥불반도, 망한민국 같은 자학적 세계관(?)은 20대에게서 나온 게 아니던가. 10대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세상과 만난다면, 20대는 권리를 가졌으되 쉽사리 행사할 수 없는 더 기만적인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아이러니, 부조리, 역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학위 논문을 집필 중임에도(!) ‘28세상’을 쓰는 무리수를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 운이 좋으면 어쩌다 뒷걸음질로 개구리 밟는 좋은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엔 빈틈투성이 글이 될 공산이 클 것 같다. 하지만, 어차피 불혹은커녕 입지(立志)에도 다다르지 못한 ‘키덜트’ 필자이므로, 그저 성장 중이겠거니 자위하면서 20대 청년들에 동일시하고(되도록이면) 그 틈을 드러낼 생각이다.

대차게 시작은 하지만, 사실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근 몇 년 사이에 청년에 관한 이야기들이 넘쳐 나는 바람에 부담이 여간한 게 아니다. 나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답습하게 되는 건 아닐까.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보탬이 되면 좋을 텐데, 청년 담론이라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몰염치에 빠지는 건 아닐까.

확실히 청년 담론이 과잉이긴 하다. 88만 원 세대, ‘20대 개새끼론’, 아프니까 청춘이다, ‘N포 세대’ 등등. 모아 놓고 보면 대강 이렇다. 한국의 청년들은 이 시대의 피해자다, 포기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래서 힘들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이거나 생존을 위해서라도 맞서 싸워라, 싸우지 않으면 비겁한 ‘개새끼’다, 하지만 정작 맞받아치면 괘씸하게 여겨져 미운털만 박힐 뿐이더라.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겹겹이 철옹성을 쌓은 세상이다. 안 그래도 갑갑한데 벗어나려 할수록 더 갑갑해진다.

하지만 양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이게 어디 20대들만의 문제일까. 비정규직화, 불안정한 삶, 정신적 취약함, 절망에서 비롯된 원한과 냉소. 이런 문제들은 모든 세대의 문제이며, 차라리 우리 시대의 문제,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역사적 국면의 문제에 해당한다. 사회 경제적 자원들이(종종 기성세대로 표상되곤 하지만) 기득권 세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폐쇄된 현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문제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대개의 세대론이란 사태를 왜곡하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의 청년 담론이란 것에도 그런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좌절 때문에 외향적으로 분노하거나 내성적으로 우울해지는 문제들을 그들만의 문제로 몰아 버리는 지적 착각, 그리고 혁명이든 힐링이든 사태 해결의 책임마저 그들에게 전가해 버리는 정치적 착각. 히스테리적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뭐라도 하라니. 당신들이 나에게 원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막연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렇게 써 내려가다 보니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는 느낌도 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생각은 오늘날 청년들이 가진 세계관과 세계-이미지를 더 명확히 그려 내야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이런 의심을 떨굴 수가 없다. 청년들이 겪는 세계 그리고 그들에게 훈수를 두는 기성세대의 세계가 과연 같은 것일까. 기성세대들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청년들을 나무라거나 재촉하겠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기성세대가 알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일 수 있다.

대강 이런 식이다. 세계를 만들어 가면서 성장했던 어른들과 달리, 이들은 첫 출발에서부터 세계가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어른들은 말한다. 예전에 흉악했던 시절을 극복하고 좋은 시절이 있었지만 IMF 등등 때문에 세상이 이 꼴이 됐다고.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내가 망가뜨린 것도 아닌데.

물론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인 이상. 거의 모든 이야기가 무너져 버린 세계 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이 세계가 제법 안주할 만하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다들 말하지 않던가. 경제적으로 이만하면 살기 좋은 축이고, 정치적으로도 이만하면 악독한 것만은 아니라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세계에 ‘진격의 거인’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아수라장이다. 파국의 세계에선 그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어른들은 다시금 말한다. 이와 같은 환란을 극복하기 위해선 청년, 너희들이 패기로 무장하고 세상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자기네들 젊었을 때처럼 힘을 내서 악의 무리를 처단하라고(어차피 패기 부리면 싸가지 없다고 욕할 거면서!). 하지만 그리 말 안 해도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내가 살 방법이 없다는 것쯤은.

마치 소년 만화의 주인공처럼 버거운 사명을 부여받은 청년들은 원한에 차 악전고투를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감지하게 된다. 실존을 위해서든 소명에 의해서든, 정체불명의 ‘거인’과 싸우면 싸울수록 찜찜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안에도 있다! 그들이 거인의 진격을 초래한 것이다!

문제는 감각적인 느낌만 있지 아직은 이 세계의 비밀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양이 된 세계를 어떻게 쉽게 파악할 수 있겠나. 그래서 의견이 다분하다. 누군가는 일찌감치 체념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말한다. 사실은 착취하고 수탈하는 놈들이 있었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사람들을 기만하는 놈들이 있었다고. 저들이 거인을 들였어. 그런가 하면 이 거지 같은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뜬소문이 돌기도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자원을 독점한 386 때문에 이렇게 됐어. 음흉한 외지인들 때문이야. 속물스러운 여자들이 세상을 망쳐 놨어. 속닥속닥.

오늘날 청년들이 냉소에 빠지지 않고 분노함으로써만 바로 설 수 있다면 분노의 표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할 텐데, 그 표적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다행한 일이기도 하고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다행스럽다는 건 우리의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이어서 아직은 틈입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고, 불행하다는 건 어쩌면 지금 상황이 표적의 상실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실상은 표적을 가리지 않는 분노와 혐오가 넘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 때문이다.

어느 신문 보도에서처럼, 청년 세대가 바라는 대한민국의 미래상이 ‘경제 성장’도 ‘민주화’도 아닌,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만화에서야 주인공의 중2병 같은 초-능력 덕분에 세계를 ‘리셋’이라도 시킬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 세계의 구원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해야 세상을 바꾸고 자신도 지킬 수 있을 텐데, 지금 청년들 안팎에는 성장을 거부하는 장치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대체 뭘까. 정말, 저주를 퍼붓는 것 말고는 없는 걸까. 그게 무엇이든 우리의 28세상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망해라, 28세상.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라는 곳에서 연구원 겸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대중의 정서 구조 변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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