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少笑한 연대기] 한 사법 연수생의 노동 상담 한 평 자리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 위원을 맡고 있다.)/ 사진 아이레이버

 

1999년 10월, 민주노총 사무실이 영등포에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어수룩한 표정으로 사무실에 나타났다. 사법 시험에 합격해 사법 연수원 2년 차 시험을 끝낸 청년은 민주노총에서 법률 상담을 해 보겠다고 했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연일 파업과 가두 투쟁(가투)을 벌이고 있던 민주노총을 찾아온 청년은 현 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장. 대학생 때 ‘가투’에 나선 친구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청년은 그렇게 노동 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IMF 사태’ 직후 전국에서 벌어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쏟아지고 있었다. 민주노총은 50만 명의 조합원이 있었지만, 정부에게는 ‘불법 단체’였다. 노동 문제에 관심 있던 사법 연수원생들이 ‘노동법학회’를 꾸려 공부도 하고, 노동 단체로 사회봉사나 전문 기관 연수를 다녔지만, 합법 단체가 아닌 민주노총엔 갈 수 없었다. 민주노총에도 변호사를 위한 책상이나 컴퓨터가 없었다. 노동자들에게 ‘투쟁’이 필요하지, ‘법’은 불필요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파업과 가두 투쟁이 벌어지고 길거리에서 화염병이 나돌던 나날이었다. 민주노총이 부당 노동 행위 신고 센터를 만들자 상담 전화가 빗발쳤지만, 민주노총에 변호사는 한 명도 없었다. 하루하루 전투를 치르느라 여념이 없는 조직쟁의실 구석에 권두섭의 자리가 마련됐다. 2000년 1월 그는 민주노총 사무총국 조직쟁의실로 발령이 났고, 2002년 2월 ‘민주노총 법률원’이 만들어졌다. 권두섭의 한 평짜리 자리가 17년 뒤 ‘김앤장’의 맞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악법이 노동을 옥죄는 시대

2016년 3월 기준, 민주노총 법률원(법무법인 여는)에는 변호사 23명, 노무사 11명, 송무 차장 16명이 일하고 있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 법률 사무소가 마련됐고, 서울에서 일하는 변호사들이 지역으로 파견돼 현장 가까이에서 일한다. 김선수, 김진, 권영국, 강문대, 김기덕 변호사 등 민주노총 법률원 소속은 아니지만, 노동자의 곁을 지키는 노동 변호사가 100명이 넘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근로기준법은 최저 기준일 뿐이었고, 현장의 힘으로 법보다 높은 단체 협약을 체결했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렸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결성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민주노총이 불법이었고, 경찰 병력이 노동 현장에 난입해 노조 지도부를 구속하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지만, 민주노조는 생산 라인을 멈추고 연대 파업을 벌여 정권과 자본을 압박했다. 노동운동의 정점은 1996~1997년 정리해고제 도입에 맞선 총파업이었다.

법보다 주먹(파업)의 힘이 세던 시대는 외환 위기 이후 기울기 시작했다. 정리해고제가 도입되고, 파견법이 통과되면서 정규직이 일하던 현장은 비정규직으로 대체됐다. 제조업 생산 현장은 사내 하청, 공공 부문은 민간 위탁, 사무직은 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증했다. 외환 위기 이후 한라중공업 사내 하청, 한국통신 계약직, 학습지 노조, 현대차 사내 하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리해고제・파견제라는 ‘법’과 계약 해지・업체 폐업이라는 ‘주먹’을 가진 자본 앞에서 비정규직 투쟁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늘로 올라갔고(고공 농성),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곡기를 끊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저항해야 했다. 1987년부터 외환 위기까지 단 다섯 번에 불과했던 고공 농성이 외환 위기 이후 105차례나 진행됐다는 통계는 IMF 사태 이후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가 실패하고, 산별 노조 운동이 대기업 공장 담벼락을 넘어서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노동자 투쟁 받쳐 주는 야전 병원

외환 위기 이후 17년, 거센 파도에 휩쓸린 돛단배처럼 위태로운 노동자들의 곁을 지킨 민주노총 법률원은 제조업 사내 하청이 ‘합법 도급’이 아니라 ‘불법 파견’이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2008년 9월 18일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예스코(옛 극동도시가스) 사건에서 불법 파견도 파견법의 ‘직접 고용 간주 규정’이 적용된다고 판결했다. 이어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 하청에 대해 하급심의 엇갈린 판결에 종지부를 찍고,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자동 흐름 방식의 자동차 조립 생산 공정에서는 합법적인 도급이 불가능하다고 판결했다. 비정규직의 투쟁과 법률원의 연대가 재벌과 김앤장을 꺾은 ‘역대급’ 사건이었다. 이후 대법원만 해도 르네상스호텔, 남해화학, 인터콘티넨탈호텔, 현대차 아산 공장, 한국지엠 창원 공장에서 ‘사내 하청은 불법 파견이기 때문에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체불 임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냈다. 한국도로공사 요금 징수원, 발전소 정비・시운전(한국KPS) 노동자, 제철소 노동자 등도 불법 파견이라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고, 삼성전자서비스 등에서도 대규모 소송이 진행 중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과 전투를 치를 때 야전 병원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 야전 병원이 많아져 노동자들에게 조금 도움이 된다고 할까요?” 권두섭 변호사는 노동법률원을 야전 병원에 비유했다. 노동 변호사들이 많아지니까 투쟁은 안 하고 법적 소송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차 등 대부분 사업장에서 보듯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면 이를 뒷받침하는 소송도 함께 진행된다.

노동법률원은 투쟁을 지원하고 보조하는 역할이다. 거꾸로 자본은 훨씬 전투적이다. 노조에 가입하고 투쟁을 벌이면 초반부터 고소·고발, 손해 배상, 가압류, 업무 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 등 법을 통해 노동의 권리를 짓밟는 공격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법률원엔 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정규직 지위 인정 소송), 통상 임금 소송 등 우리가 자본을 상대로 한 파란색 소송 용지(원고용)보다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빨간색 소송 용지(피고용)가 넘쳐 난다.

물론 노동자들이 승리한 판결만 있는 건 아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KTX 승무원, 발레오만도 산별 노조 탈퇴 사건이 보여 주듯, 대법원은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서 하급심 판결을 뒤엎음으로써 법이 가진 자와 권력자들의 무기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앞으로 더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

오늘도 노동법률원은 야전 침대를 펴 놓고 밤을 지새운다. 경찰에 끌려간 노동자들이 유치장에서 휴식을 취할 때 법률원 식구들은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을 안심시키고, 2~3일씩 밤을 새워서 영장 실질 심사를 준비하고 재판에 임한다. 잠 실컷 자는 게 소원이다. 소송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송도 부지기수다.

권두섭 변호사가 지난 17년의 세월을 떠올리며 말한다. “노동자들을 접견하고 영장 실질 심사 하고 노심초사하면서 잠 못 자고 일해서 노동자들이 석방됐을 때, 고생했다는 따뜻한 한마디가 노동 변호사의 이후 활동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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